- 제3장. 공터 (1/4) :: 소격동은 겨울을 맞고 있었다.
:: 어떤 아저씨가 엄마에게 성경책을 줬다는 것이다.
:: 소격동은 겨울을 맞고 있었다.
:: 아이스크림 중에는 하늘색 야구왕바가 지금 기억이 난다.
:: “산타 그거 엄마 아빠야! 진짜 엄창! 뻥 안치고. 에-.”
언젠가 추운 날이었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일종의 짜증이었다. 서랍장 앞에서였는데 왜 성경책을 가져오냐는 것이었다. 성격책이 왜? 나는 어른들 말을 잘 엿듣는다.
내가 대충 이야기를 들어 보니 어떤 아저씨가 엄마에게 성경책을 줬다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나. 영악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엄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데,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나는 모종의 위협과 불안을 느낀다. 나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고 강건한 가정이 필요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엄마에게 성경책을 주며 엄마에게 수작을 부리던 사람은, 죽는다고 난리를 피우기도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멍청한 소극인가. 그런데 성격책을 주면서 추파를 보내다니, 그 점은 진짜 영악하다고 생각했다. 왜냐, 성경책은 쉽게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이 이야기는 다소 왜곡된 형태로, 엄마와 아버지가 이곳저곳 주고받은 이야기를 단지 어린 내가 주엄주엄 끼워 맞추고 재조립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건 아니지만, 어떤 위협이 되고 어떤 인상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정확한 이야기는 나중에 -대학생이 될 때 즈음에-하도록 한다.
소격동은 겨울을 맞고 있었다.
얼마 전에 나는 엄마와 함께 동생 재롱잔치에 다녀왔다. 동생은 소격/화동 골목 쪽 성덕체육관에 다니고 있었다. 태권도장이었는데 유치원 비슷하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삼청슈퍼 건물 쪽 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 혹시 상회, 슈퍼 차이를 아는가? 상회는 미닫이문이고, 나무 틀이 많다. 이 즈음에 막 생긴 신문물 슈퍼는 통창인 경우가 많고 유리 여닫이문이 많다. 그 외에도 이 둘에는 차이점이 있다. 예를 들어서 상회에 라면을 사러 가는 경우, 손님은 주인에게 "라면 있어요?" 한다. 그럼 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끌고 "몇 봉지 드려요?" 하면서 라면을 놓아둔 위치로 간다. 여름이면 파리채 같은 것을 들고 말이다.
손님은 지갑에서 돈을 꺼내거나, ‘뭐가 있나’ 주위를 조용히 둘러보거나 멍하니 천장 전구 옆 파리 테이프를 쳐다보며 "3봉지만 주세요"한다. 라면을 들고 카운터에 돌아온 주인은 "날씨가 덮죠?" 하며 손에 마른침을 뱉은 후 카운터 옆에서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단호하게 뜯어 라면을 담는다. 왜 침을 뱉냐고? 봉지에서 라면을 꺼내다가 자기 침을 만지라고 말이다. 이제 “휴가는 안 가세요?” 하며 돈을 건네 보면 주인은 서랍을 열고 잔돈을 거슬러 준다. “가면 뭐해요. 가면 더 더워, 장사나 해야지.”
하지만 슈퍼에서는 “라면 어디 있어요?” 하고 물으면 아저씨는 손가락으로 저쪽 어딘가를 가리켰다. 인생의 본질을 알려주겠다는 의미심장한 태도로 말이다.
진열대에서 한참 찾다 못 찾겠으면 힌트를 줬다. “샴푸 있는데 못 가서 봐봐” 하고 말이다. 슈퍼 주인은 힌트를 주는 것이다. “모르겠는데요? 아 여기 있다.” 그래서 손님이 물건을 들고 오면 가게 주인아저씨는 계산을 했다. 손님이 어린이나 학생일 경우, 내 동네 삼청슈퍼 아저씨도 그러했는데, 당연히 반말이었고 최대한 말수를 줄이려 했다.
아기공룡 둘리네 고길동 아저씨의 분위기라고 보면 되는데, 엄마 말로는 우리와 같은 경주 이씨라는 것이다. (아들딸도 경주 이씨- 당연하지만-, 아들은 나보다 한 살 어리고 여동생은 오빠와 두 살 터울이었다.) 장갑이나 골무를 끼고 언제나 과묵하던 경주 이씨 아저씨, 멀쩡히 다니던 훌륭한 직장에서 상사를 들이받았다는 소문이 있었다.
아무튼 이렇게 손님이 직접 물건을 찾는 가게가 이제 슈퍼인 것이다. 그래서 가격은 상회보다 10%가 더 쌌다. 100원짜리 과자를 10원 깎아 90원에 주는 것인데, 이러면 집에 10원짜리가 자동으로 많아진다. 슈퍼 앞에는 맥주 박스가 항상 쌓여 있었다. 그 옆에 아이스크림 냉장고가 놓여 있고 말이다.
아이스크림 중에는 하늘색 야구왕바가 지금 기억이 난다. 빈병도 슈퍼에서 받아줬는데, 델몬트는 100원인가 50원이었고, 맥주병은 30원, 소주 병은 20원이었다. 빈병을 갖다주면 슈퍼는 돈을 주는데, 그걸로 야구왕바나 스크류바 같은 것을 사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비닐 껍질은 아무 데나 버리고 말이다.
아무튼 성덕체육관 위의 삼청슈퍼는 이제 이런 문물의 반영이었다. 편의점은 뭐냐고? 차이가? 편의점은 시대적으로 더 나중에 생기는 것이지만, 깎아주던 10원을 안 깎아 주던 슈퍼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무튼 아래 체육관 돌아와서, 이제 많은 엄마들이 와서 아이들의 재롱을 구경하고 있었다. 바닥은 태권도장 매트였고, 그 위에서 한복을 입은 아이들이 꼬마신랑 춤을 추고 서로 목을 돌려가면서 우는 척 웃는 척을 했다. 세상 귀엽게 말이다. 엄마들은 세계에서 최고로 행복해했다.
그리고 산타 할아버지가 나왔는데, 나는 그때 조금 움찔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남준혁과 제비는 산타 할아버지가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진짜 뻥 안치고 산타 할아버지 없어! 다 사기야!” 특히 남준혁이 그랬다.
“뻥치지 마! 선물은 그럼 뭐야?!” 내가 말했다.
“산타 그거 엄마 아빠야! 진짜 X창! 뻥 안치고. 에-.” 남준혁은 자기 얼굴을 들이밀며 엄지와 약지를 들며 엄창도 걸었다. 직선제 문민시대, 모두가 발언권을 갖고 있었고, 너무 많은 각자마다의 주장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불신 풍조 또한 상당했다. 때문에 아이들은 자기 말에 씨가 먹히려면 담보조로 엄마를 걸어야 했다. 제비는 크게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는데, 크게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가 남준혁이 맞다는 취지였다. 따로 흔들림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딘지 한결 더 무심한 표정이었다. 제비는 누나와 할머니와만 살고 있었고, 하얀 강아지가 한 마리 있었으며, 아버지는 사막에 있다 가끔씩 귀국했다.
“진짜, 뻥 안치고 우리 형한테 물어볼래?” 그리고 특히 남준혁이 자기 형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는 움찔하게 된다. 형 이야기를 꺼내자, 왜인지 진짜 남준혁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내가 유치원생일 때도 유치원에 산타가 온 적은 있었다. 그 산타는 가짜라는 티가 났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진짜 산타가 있긴 있는데, 유치원에서 과자 사탕을 건네는 산타는 그것을 흉내 낸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진짜로 산타가 없다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온 천지 사방팔방에서 티비와 라디오 사방천지에서 산타가 있다고 떠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로서는 이것이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동생들의 재롱잔치가 무조건 재미있지는 않았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잔치에서 돌아온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정확히는 이브에서 성탄절로 넘어가는 날 새벽이었다.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와 엄마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버지는 조용한 목소리로 “사놨어?” 하고 물었다. 엄마는 “아니”라고 답했다. 또 아버지는 “연 데 있어?”라고 물었고, 엄마는 “저기, 학교 앞에 있을 거야”라고 답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깨었던 것이다. 두 분이 나와 동생의 성탄절 선물을 준비하려고 하시는 것 같았다. 동생과 어제 나는 함께 장판에 누워 산타에게 편지를 썼었다. 당장 선물을 내놓으라고 말이다.
동생은 미취학 아동이었기 때문에 글씨체가 엉망이었고, 충격적이게도 편지를 색연필로 쓰고 있었다. 엄마는 “글자인 척만 하면 된다”라고 생각하셨는지 그에 대해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연필로 편지를 썼다.
“산타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성탄절 날 많이 힘드시죠? 어린이들이 많잖아요. 저는 여차저차 착한 일을 했어요. 선물로 여의봉을 선물해 주세요. 재동국민학교 1학년 2반 이상호 올림.”
“이름 쓰고 올림이라고 써야 되지?” 나는 엄마에게 소리를 질렀다. 확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와 동생은 편지를 양말 속에 넣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산타 할아버지가 양말에서 편지를 꺼내 읽어보시겠지. 그다음, 빨간 보따리에서 우리에게 맞는 선물을 꺼내실거야. 선물이 크면…? 아마, 양말 옆에 놔두시겠지?’
나는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산타 할아버지는 착한 어린이에게는 무조건 선물을 주시는데, 나는 착한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남준혁이 “산타는 니네 엄마 아빠야”라고 말한 바 있었지만 일단 선물이 있는 게 아닌가. 내일 선물을 준다는데, 성덕체육관 산타도 그렇고 일단 뭐 따로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남준혁에게 큰 소리를 친 터였다. “산타가 왜 없어, 책에 있는데, 이 멍청아! 니네 형이 어른들보다 나이 많아?!” 내 큰소리에 남준혁도 조금 움찔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다시 엄마에게 물었다.
“손오공 막대기랬나?”
“으음.” 엄마가 대답했다. 그리고 엄마는, 자신의 기억이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겠다는 의미에서, 전날 우리가 써두었던 편지를 언급했다.
“저기, 애들이 써 놓은 것 있어.”
그런 이야기를 쫓아가며 듣다가, 선잠에 다시 빠져드는 듯하다가, 누군가 방문을 열고 밖에 나가는 소리를 들은 듯했는데, 그때 이미 나는 잠에 빠져있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러니까 내가 방안에 들어온 햇살을 느끼고 이불을 발로 걷어찼을 때, 엄마는 이미 우리에게 뭐라 말하고 있었다.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놓고 가셨어! 일어나 봐!” 행복에 겨워 벌떡 일어나는 아이들의 모습을 엄마는 보고 싶어 했다. 엄마는 ‘애들이 평소랑 다르게 선물소리에 빨리 일어나겠지?’ 하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뭐?”
“있어?!” 나와 동생은 스프링처럼 백덤블링으로 이부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비벼놓고 둘러보니, 정말로 머리맡, 양말 옆에는 선물이 놓여 있었다. 물론 불필요한 각종 공책과 스케치북과 필기구도 있었지만, 내가 진심으로 원했던 여의봉도 있었다.
“우와!” 반사적인 감탄사가 나왔다.
내 여의봉은 TV에서 광고를 하던 것이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제법 두꺼웠고, 길이 조절용 단춧구멍도 제법 커다란 했다. 하지만 봉이 다소간 흔들리는 게 그렇게 튼튼한 것 같지는 않았다. 몇 번 가지고 놀면 쉽게 고장 날 것 같았던 것이다. 아무튼 실제로 내가 장난감의 단추를 누르자, 여의봉이 탁탁 소리를 내며 길쭉길쭉하게 늘어났다. 여의봉은 봉의 양쪽으로 해서 2단계나 더 길어질 수 있었다.
산타의 선물을 받고 동생도 웃었고 신나했다. 자신이 원했던 장난감 포크레인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한 뒤, 성탄 분위기를 띄우는 티비프로그램을 틀어놓고, 장난감을 끌어안고 아침밥을 먹으면서, 나는 문득 이런 마음이 들었다.
‘새벽에 내가 들었다고 말할까?’
물론 뛰어난 지성을 지닌 독자분들께서 예상하셨듯이, 나는 엄마 아빠의 새벽 대화를 들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수고를 수포로 돌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는 뻥이고, 산타로부터 선물이 끊길까 봐서였다.
“그래? 이야기하는 거 들었다고?”
“응.”
“잘 되었네, 그럼 담부터 선물 없어도 되겠지?”
이와 같은 난감한 상황은 원치 않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참으로 신기하다. 수많은 어른들이 서로 짜고,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사기를 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던 것이다. 물론 그 사기가 전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했지만 말이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그 많은 사람을 속일 수 있을까? 어떻게 그렇게 대규모로 속일 수 있을까? 서로가 서로를 만나 작전을 짜고, ‘이렇게 속이자’고 한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어쩌면 원래는 산타 할아버지가 있는데 우리 집만 무슨 특수한 사정으로 부모님이 선물을 준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워낙 대규모 아닌가. 하지만 산타가 없다는 친구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 있던 당시 제비의 말이 없는 그 표정이 또 잠깐 스치기도 했다. 나는 약간 슬펐지만, 또 그렇게 슬픈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성탄절 아침밥을 다 먹은 우리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우리는 교회에 다녔고 이제 교회에 가야 했다. 나는 여의봉의 버튼을 눌러 봉을 길게 만들기도 하고, 배로 늘어난 봉을 다시 밀어 넣어 짧게 만들기도 했다. 티비를 보면서였다. 그리고 나는 그 일을 미친놈처럼 반복했다.
멍청한 3단 여의봉을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딸깍딸깍 소리를 내면서, 갑자기 나도 모르게 ‘이게 참 멍청한 막대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에 엄마는 학교 앞 문방구까지 다녀왔을 것이다. 목도리에 커다랗고 촌스러운 잠바를 걸치고, 어두운 새벽길을 헤치며, 안국동 연탄집과 얼음집을 돌아 국민학교 앞의 문방구까지 가는 모습을 그려봤다. 얼음배달, 연탄 배달 그쪽 길을 돌아갔을 것이다. 눈길에 경사도 있는데.
그 생각에 장난감을 다시 쳐다보니, 장난감이 그렇게 재미있어 보이지가 않았다. ‘길도 약간 미끄러웠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떠올려본 어둡고 추운 길바닥 이미지 때문인지는 몰라도, 엄마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필요가 있나, 다 사기인데.
아무튼 엄마가 힘들게 선물을 사 오는 모습을, 이 멍청한 효자가 머릿속으로 그려봤다는 것이다.
속고 속이는 사람이 있고, 주고받는 기쁨이 있다. 신기하지 않은가. 또, 서로가 알음알음 암묵적으로 사실은 다 알고 있지만 모른 척을 하고 있는 산타와 관련된 사실, 그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음. 그런 세상 움직임들이 있다는 사실이 잘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고마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제 여의봉은 곧바로 지루해졌다.
이것이 전셋집에서의 마지막 크리스마스였다.
우리는 이제 이사를 가야 했다. 아버지가 산 집으로 말이다. 다행히 집은 바로 옆집이었다. 정확히는 옆집의 옆집의 옆집이었지만, 골목길로는 저쪽까지 돌아가야 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삼촌들이 리어카를 빌려와서 이삿짐을 날랐다. 아버지의 첫 번째 자가였다. 자가란 자기 소유의 집을 뜻한다.
(제3장 1부 끝. 2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