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스마트폰에서 검색을 하다가 온라인으로 출생신고가 가능하다는 뉴스를 봤다. 언텍트 시대에 이젠 출생신고도 온라인으로 할 수 있구나,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20년 전 출생신고를 하던 그때가 떠올랐다.
아이를 낳고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행복해야 할 초보 부모는 갈팡질팡 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아프니 어쩔 줄 몰랐다. 첫 아이라 산부인과에서 시키는 모든 검사를 하고, 몸조심하고, 평상시 듣지 않던 클래식을 들었다. 남편은 처음엔 쑥스러워하면서도 봉긋한 내 배를 쓰다듬으며 동화책을 읽어 주었다. '네가 우리 곁으로 와 줘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라는 말을 자주 말했고, 건강하게 만나자는 말도 매일 했다. 나쁜 것은 보지 않았고, 나쁜 마음은 먹지도 않았다. 그러면 건강한 아이가 나온다고 믿었다. 진통 끝에 태어난 아이는 울음소리도 컸고, 엄마 아빠를 반씩 닮은 딸이었다.
산부인과에서 퇴원 해 친정집으로 갔다. 친정에서 첫 손녀라 부모님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둘째 딸이 결혼하더니 순풍 딸을 낳았다고 동네 자랑을 하고 아빠는 한턱을 내겠다고 큰 소리를 쳤다. 2주 정도 지났을까 엄마는 아이를 목욕시키다 혼잣말을 했다.
"우리 손녀딸 배꼽이 이상하네" 붙어 있는 모양이나 배꼽 주변이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리고 얼마 후 검진 차 방문한 병원에서 한참을 진료하던 의사는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찾아간 종합병원에서 의사는 한 번도 웃음기 있는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말은 '간단한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라고 말했지만 왠지 부모는 떨렸다. 의학 용어와 병명을 늘어놓는 의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했다. 각종 검사와 주사로 힘들어하는 아이를 달래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최선이었다.
태어난 지 20일 만에 장 수술을 했다. 다른 산모들은 산후조리를 하고 아이에게 젖을 먹일 때였지만 난 아이가 수술하는 수술실 앞에서 앉아 있었다. 주인도 없는데 모유가 흘러나와서 화장실에서 젖을 짜 내고, 가슴에 가제 손수건을 대었다.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라고 했다. 오래 걸리지 않은 수술 후에 의사는 수술이 잘 되었다며 며칠만 있으면 퇴원할 수 있다고 우리를 안심시켰다.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에 아이를 두고 친정집에서 몸조리를 하며 지내며 병원을 왔다 갔다 했다. 몸조리...라고 했지만 아이는 옆에 없고 수술을 하고 병원에 누워 있으니 잘 먹지도 잠을 잘 잘 수도 없었다. 죄인처럼 느껴졌다. 건강하게 낳아주지 못한 죄인 엄마.
안타깝게도 장 수술을 하고 아이는 집으로 퇴원하지 못했다. 선천성 심장병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임신기간 내내 아무 탈 없이 건강하다는 소리만 들었는데 아이는 태어나서 20일 만에 수술을 한 것도 모자라 한 달이 지났을 때는 심장 수술도 해야 했다. 심방, 심실중격 결손이 아이의 병명이었다. 심장에 구멍이 여러 군데 있다고 했다. 몇 군데는 크기가 작고, 닫힐 가망성이 있지만 몇 군데의 구멍은 위험해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엄마의 젖을 힘껏 빨았는데 아이는 갑자기 숨 쉬는 것을 힘들어하고, 의사는 가슴에서 잡음이 많이 들린다고 했다. 심장전문병원을 알아보았다. 서울은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면서, 수술을 빨리 할 수 있는 병원을 소개해 줬다. 가족들은 생각지도 못한 현실에 당황을 했지만 아이가 아프다는 말에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빨리 움직였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 줄 몰랐다. 밤이 되면 잠을 자고 끼니가 되면 배가 고프다는 사실이 힘들었다. 엄마라면 아이를 건강하게 낳아야 하고, 옆에서 사랑을 주면서 안아주는 게 내가 알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었는데 그 일반적인 엄마와 자식의 일이 우리에겐 힘들기만 한 일이었다. 두 번째 수술을 하기까지 정신이 없었다.
"출생신고는 하지 마라. 좀 더 있다가 아이가 건강해지면 하도록 해라"
어느 날 아이를 보러 온 시어머님이 말을 꺼냈다. 물론 아이가 건강해져서 퇴원하길 바라지만 혹시 이후의 일이 어찌 될지 모르니 출생 신고는 좀 미루자고 했다. 난 그럴 수 없다며, 친정 엄마를 쳐다봤지만 엄마도 시어머님의 의견에 동의하는 표정이었다. 누구보다 첫 손녀에 대한 건강을 바라고 소원하고 마음 아파하는 사람이지만 만약에... 라며 출생 신고는 조금 더 지켜본 뒤에 하자고 했다.
남편과 나는 그다음 날 출생 신고를 했다. 양가 부모님께는 "우리 딸 반드시 건강해질 거예요. 두 번째 수술을 앞두고 있는데 계속 누구의 아이라고 이름을 쓸 수 없어요. 출생 신고할래요"라고 말했다. 어른들은 우리 뜻을 말리지 못했다. 아마 틀림없이 건강해져서 집으로 금방 돌아올 거라는 부모의 간절한 바람을 어른들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딸이라는 성별을 알고부터 몇 개월 동안 생각했던 수많은 이름 중 고르고 골라 결정지은 이름을 서류에 적었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지혜롭고 밝게 그리고 건강하게 자라라는 소망을 가득 담은 이름이었다. 한자(漢字)까지 생각하며 매일 밤마다 초보 아빠와 엄마는 첫 딸의 이름을 생각했었다. 출생 신고서에 한 글자씩 또박또박 적었다. 글자마다 병원에 있는 아이를 생각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지 않아 내 손으로 아이의 사망 신고를 했다. 남편은 출근하고,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혼자 길을 나섰다. 사망 신고서와 병원 서류를 내 손으로 제출했다. 직원이 사망 서류에 적힌 생년월일을 확인하고는 나를 몇 번이나 쳐다보는 걸 느꼈다. 출생 연월을 제대로 쓴 것 맞냐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난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동사무소 사망 신고 창구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초봄에 태어난 아이는 그렇게 몇 개월을 우리 곁에 머물다가 겨울이 시작될 때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