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 먼 불빛
며칠 전에 만난 등잔이 생각나서 초에 불을 댕긴다.
불꽃이 핀다.
어둠에 둘러싸여 작게 너울거리는 몸짓에, 물건들이 하나씩 살아나고 벽과 천정이 희붐하게 밝아온다.
밤의 숨소리인가. 풀숲이 뒤척이는가 싶더니 벌레 울음이 귀에 파고든다.
간간이 바람을 가르며 멀리 사라지는 자동차 바퀴 소리. 동그랗게 어둠을 밀어내던 오래전의 밤이 떠오른다.
등잔은 젊은 날의 어머니가 떠오르는 그리운 불빛이다. 등잔에 바투 앉은 어머니의 그림자가 벽에 거인처럼 앉았다. 옷들과 반짇고리며 윗목의 요강들도 저마다 그림자를 거느렸다. 초저녁이면 우리들은 두 손으로 말과 새를 벽에 만들며 ‘다그닥 다그닥’ 발굽소리를 내거나 날갯짓하며 그림자놀이를 했다. 막냇동생을 재우고 나면 손끝에 바늘을 쥐고 헤진 양말이나 베갯잇을 깁던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직 귀가하지 않은 아버지가 이불 속에 묻어둔 밥이 식기 전에 돌아오길 바랐을까. 술을 너무 좋아하셨던 아버지의 밤길을 걱정하느라 심지가 타듯 애를 태웠을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그것도 모른 채 아버지가 사 오시는 ‘밤과자’를 생각하며 잠귀를 열어두었다.
지금은 밤도 너무 밝아 어둠을 아예 쫓아버린 게 아닌가 싶다. 불빛에 물상들이 빛으로 표백한 듯 환하다. 첫 발령지에서는 호롱불을 켰다. 해만 지면 하루에 한두 번 지나가는 버스도 끊어지고 사방은 어둠에 갇혔다. 동굴 속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은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모를 정도로 캄캄했다. 어둠을 따라 외로움이 파고들었다. 종지만 한 호롱에 담긴 기름도 아낄 만큼 석유가 귀하던 때라 사람들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지만, 나는 호롱불 아래서 콧구멍이 까맣게 되도록 교재연구를 하며 외로움을 지웠다. 창호지 밖으로 밤의 숨결이 고르게 들려오던 밤이었다.
남편은 가끔 소장수 등에 업혀 오던 달밤을 이야기했다. ‘사기막’에 있는 정미소 일이 늦게 끝나 엄마 등에 업혀가던 날이다. 서너 마리 소를 몰고 다음 장으로 가는 소장수와 엄마가 동행하며 주고받던 말은 생각나지 않지만, 그 밤을 생각하면 「메밀꽃 필 무렵」이 떠오른다고 했다. 남산모랭이가 시커멓게 솟아 있었는데도 무섭지 않던 밤. 아버지를 아는지 어르신이라고 불렀던 그 소장수의 등에도 업혀 오던 시오리나 되는 아름다운 밤길을, 고향 산모랭이를 돌 때마다 되풀이한다. 아마 등잔불을 밝히던 때라 달은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사랑받으며 숱한 낭만을 만들지 않았을까.
어둠이 슬그머니 찾아오면 노동으로 지친 근육을 쉬거나 조용히 등잔불을 밝힌다. 부엌 아궁이에 걸린 등잔불도 꺼지고 사랑방에서는 글 읽는 소리 들려오는 밤, 마당을 지나던 부모님이 듣고 얼마나 흐뭇했으랴. 어머니는 장독대에 정한 수를 떠놓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자식을 길렀고 청사초롱 불 밝혀 혼례를 치른 자식들의 신방에도 불을 밝혔던 날들은 어둠이 모두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타오르는 등잔불은 이제 간절함을 더하는 지난날의 먼 불빛이다.
어디로부터 스며든 바람결인가. 너울거리는 촛불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떠오르는 시인의 시가 뜨겁다. 밀려오는 적막감 속에 쉬 잠들지 못하는 밤, 허옇게 잊힌, 아직은 살이 뽀얀 몸을 가진 백자등잔에게 미안해서 불을 켜본다.
“……
아, 불을 댕기면
불이 켜지는
아직은 여자인 그 몸”
내 안에서 문득 불꽃이 일어난다. 소리 없이 타들어 가는 온기로 깊어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