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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Aug 28. 2020

연대기

흐르지 않는 것은 쉬 잘려나간다.

솔고개를 지키던 늙은 느티나무 줄기로 시나브로 흐르던 수액은 겨울 강줄기처럼 졸아들어 목발처럼 겅둥겅둥거리더니, 바람 소리 세차게 몰아치던 밤에 그만 툭 부러졌다. 푸른 꿈을 허공에 띄우며 우리들에게 그늘이 되어주던 초록의 날들이 힘없이 잘려나갔다.


구순이 되신 아버지는 마른 다리로 걸으면서 발바닥이 아파 자꾸만 절룩거렸다. 양말을 벗겨보니 새끼발가락이 먹물에 적신 듯 까맣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치자로 떡을 만들어 붙여 나쁜 피가 몰린 거라고 우기는 아버지를 급히 병원에 모셨다. 위급한 상황이라 먼저 흐르지 않는 혈관을 걷어내고 다른 혈관을 이식하는 수술부터 마쳤다. 괴사가 진행된 다른 발가락들과 함께 아버지의 발가락들이 삭정이처럼 잘려나갔다. 온 생을 디디고 걸어온 길 하나가 끊어져 기우뚱거린다.


산소 옆을 400년 동안 지키며 쉼터가 되어주던 느티나무, 지나온 발자취를 나이테로 그리며 수많은 봄날을 맞았다. 발치에 있는 연못에서 흰 연꽃들이 수없이 피고 지는 동안 산소에 봉분을 만들던 자손들이 때마다 다녀가는 것도 보았다. 그들을 따라다니던 새끼들이 어느새 어른이 되어 아비를 묻고 눈시울을 적시며 돌아가는 모습에서 가족의 연대기를 읽었을 것이다.


발가락들이 거즈에 싸여 휴지통에 던져진 저물녘, 당신을 받치던 신전의 기둥들도 한참에 무너졌다. 희망이 없는 가지들과 손잡은 성한 발가락도 함께 베어내어 뭉툭하게 봉합되고 남은 반쪽의 생은 자주 묵살되었다. 한없이 느린 걸음과 듣지 못하는 귀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말씀도 잘려나갔다. 슬픔도 희석되는지 발가락 세 개만큼 우리도 다가올 이별의 슬픔을 조금씩 덜어내었다. 소통은 남아있는 것들끼리 길을 트는지 바깥출입을 모르는 먼지 낀 문 안에서 토막 난 말들은 갈피마다 불통이다. 


이제 반쪽이 부러진 느티나무는 더 이상 풍성한 그늘을 만들지 못하고 옛날을 복원하지 못한다. 살아남은 늙은 나무의 빈자리에 허공이 가득 들어앉았다. 옆에 남은 어린 느티나무 생가지들이 잎을 수다처럼 피우는 걸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오래된 나무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은 잔금이 가고 빛이 바래는데 새로 쓰는 신화들의 무게는 벅차기만 하다.


삭정이들이 잘려나가면서 그늘과 함께 한 연대가 저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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