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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Aug 25. 2021

사과 하나로 파리를 정복한 세잔

예술가의 식탁

흔히 세상을 바꾸어 놓은 사과라면 세 가지를 꼽는다. 이브의 사과, 뉴턴의 사과, 세잔의 사과를 일컫는다. 한때 세잔의 <사과>는 뉴욕의 소더비 경매에서 4160만 달러(약 450억원)에 팔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사과가 되었다.


나는 지금 세잔의 그림 <사과와 오렌지>를 보면서 “빨간 색깔로/누군가의 입술을/진종일 푹 적시고 싶다”는 반기룡시인의 시를 떠올린다. 식탁 위에 차려진 잘 익은 사과와 오렌지들는 감각적이다. 그는 선배들이 해온 방식대로 사과를 실물처럼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았다. 흘러내릴 듯한 하얀 식탁보 위에 빨갛고 노란 색채가 강렬하게 와 닿았기 때문이다.

젊어서 “나는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다”고 결심한 그는 메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철저히 거부했다. 카페 게르부아에 드나들며 마네, 피사로, 모네, 르누아르, 드가, 쇠라와 같은 진보적인 젊은 화가들과 사귀었고 특히 피사로는 그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

세잔이 공을 들인 이 정물화에는 독특한 그의 미술정신이 담겨 있다. 대상의 디테일보다 원근감을 무시하고 입체감과 색체의 관계 실험을 통해 표현하려고 했다. 붉은 색과 푸른 색, 노란 색의 붓질이 선명하다. 입체감을 나타내기 위해 수없이 실패를 했지만 자신만의 그림방식으로 연구를 거듭했다. 화폭 안의 정물을 보고 있으면 시선이 정면, 위, 아래로 달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구형, 원통형, 원뿔로 단순화해 조화롭게 배치하려고 했다. 보기에 단순하고 평면적이라는 느낌을 받았겠지만 그가 사물의 본질을 담아내려는 접근 방법이었다.

당시에는 뜬금없고 파격적이라 혹평을 받았지만 프로방스에 칩거하면서 사과가 썩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대상들을 수없이 반복적으로 그렸으며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도 결코 색채에 대한 집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큐비즘의 대표 피카소와 야수파의 마티스, 추상미술의 선구자 몬드리안과 같은 많은 후배들에게 영향을 주어 미술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시대의 새로운 물고를 튼 그를 20세기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다. 

영화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은 에밀졸라와 오랜 친구관계가 잘 그려져 있으며 그의 고뇌에 찬 그림들을 감상하면 엑상 프로방스를 여행하는 기분이 들 것이다. 졸라의 소설 <작품>에서 실패한 화가의 삶을 그린 것이 자신을 모델로 하였다는 오해로 오랜 우정이 단절되었다. 하지만 세잔이 사과에 몰두해 있던 어느날, 갑자기 졸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화실 문을 걸어 잠그고 한동안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내가 왜 사과를 그렸는지 졸라는 이해했을까?“ 사과처럼 단단한 소재는 그림을 완성하는 동안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아 본질을 파악하는데 알맞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어린시절 우정을 맺은 이야기가 한 몫을 한다. 졸라는 어린 시절 따돌림을 당하는 약한 아이였는데 그런 졸라를 감싸준 사람이 세잔이었다. 그때 졸라가 감사의 선물로 세잔에게 내밀었던 것이 사과였다.

그림을 그리다 죽고 싶다는 그의 말대로 그는 1906년 10월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던 중 강한 비바람에 쓰러진 뒤 폐렴이 심해져 사망하고 말았다. 그는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택하지 않고 그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고난의 길을 걸었다. 당시 유행하던 화풍의 메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보이려고 색채를 실험하면서 고집스럽게 파고들어 드디어 해냈다. 그의 묘비명에는 “나는 매일 풍경을 보러 간다. 그 배경은 아름답고 나는 그 어느 곳에서보다 더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낸다,”라고 써 있다.

사과꽃이 만발한 양재천을 걷는다. 첫사랑을 떠올리면 과수원집 울타리 너머로 사과나무꽃 향기가 넘어온다. 그 아이는 지금쯤 어디에 살고 있을까? 땡볕과 비와 바람의 시간을 지나 가지가 휘어지도록 사과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을까? 세잔의 그림처럼 빨갛고 둥글둥글하게 익어가는 사과를 떠올린다. 어쩌면 내가 냉장고에 사계절 내내 사과가 떨어지지 않는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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