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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Aug 25. 2021

언어의 저편

‘나비물’이란 단어와 마주한 날,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서 풍경 하나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왜 이제야 생각났을까. 오래 만나지 않았던 사람과 만났을 때처럼 그것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딸려왔다. 초등학생 시절인가 싶다.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는 흰 수건을 쓴 엄마와 내가  하얀 이불호청을 사이에 두고 마루에 앉아 있다. 엄마의 보조역할이 필요할 때마다 불려왔지만 정작 내가 해보고 싶은 일은 엉뚱한 데 있었다. 쥐어주는 호청의 모서리를 잡고 펼치면 엄마는 대접의 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뿜어내었다. 푸푸 소리와 함께 물방울은 호청 위로 날아가 앉았다. 마치 모시나비가 꽃밭에 사뿐이 내려 앉듯이 가볍게. 와삭 버석버석 소리나던 마른 호청은 몇 번 나비물의 세례를 받은 뒤 숨이 죽고 차분해졌다. 엄마를 졸라서 마지막 물대접을 받아들고 물을 한껏 머금은 다음 내뿜었다. 가랑비에 젖듯 날아야 할 텐데 호청 한쪽에 홍수가 졌다. 언제쯤 숙달되었는지 모르지만 이제 더 이상 이불호청을 만질 일이 없다.

 어른을 따라 하면서 일을 배우던 시절이다. 재미로 달려들어 풍선을 불듯 힘을 주었으니 꾸지람 속에서 배움이 자랐다. 세탁기가 없던 시절이니 살림을 산다는 건 시간이 더디고 허리가 휘도록 품이 들었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빨래 중에서도 이불빨래를 하려면 좋은 날을 택해 작심하고 시작한다. 호청을 빨아서 시치는 일까지 하루 해는 짧기만 하다. 방망이질로 찌든 때를 빠는 것도 힘들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다. 낮동안 바지랑대 높이 들어 빨랫줄이 팽팽하도록 널어두면 옥양목 호청은 마당을 가득 채웠다. 바람에 그네를 타는 호청은 미로처럼 숨고 싶은 공간이다. 그 사이를 누비며 숨바꼭질하려고 들어갔다가 풀물이 쩍쩍 들러붙듯 어머니의 꾸지람 소리가 귓전에 달라붙었다. 지금 생각하니 얼마나 큰 행사였나 싶다. 노동의 무게를 알지 못하는 나는 특별한 재미를 찾던 중에 만난 놀이 대상일 뿐이었다. 빨래가 따가운 햇살에 뻣뻣해져 새처럼 가벼워지면 허공에 한껏 펼쳤던 날개를 접고 대청마루에 오른다.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물방울들은 연신 하얀 호청 위로 나비춤을 추며 날아갔다.


마당에서는 온갖 일들이 벌어진다. 마당은 언제나 손님을 맞기 위해 정갈해야 한다. 새벽에 아버지의 비질하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세수를 하고 그 물을 마당으로 뿌리는 물 또한 나비물이다. 물을 뿌려 먼지를 잠재우고 마당을 쓴다. 아니 골목까지 깨끗하게 비질하는 마음은 새로운 날을 맞기 위해 치르는 의식이다. 여름날 뜨겁게 마당이 달아오르면 나비물을 뿌리기도 하는데 부채바람보다 시원한 기운이 피부에 와 닿았다. 마당은 열린 무대다. 모깃불 타는 저녁 마당은 국수와 감자 옥수수를 먹기도 하고 별을 보다 잠이 든다. 빨래가 걸리고 닭과 개가 어슬렁거리는 마당은 멍석을 깔면 달라진다. 정월에는 윷놀이판이 되고 가을에는 타작마당이 되는데 그 가운데 잔치마당이 절정이다. 혼례를 올리고 일가친척과 이웃들이 흥청거리는 마당은 지금 만나기 어렵다. 삶이 녹아 있는 공간을 잃어버린 뒤 더 이상 나비물을 뿌릴 일이 없다. 지금은 닫힌 공간에 스스로 가두고 살아서일까 자주 외로움을 탄다. 

나비물은 사라진 풍경을 불러왔다. 참 아름다운 말이다. 언어의 저편에서 건너온 이런저런 일들로 마음이 훈훈해졌다. 어머니의 어머니를 거슬러 가면 가난과 노동으로 얼룩진 날들은 이불호청처럼 깨끗하게 지워져 눈부시도록 희다. 어쩌면 언어가 그리 아름다울 수 있는지, 알지 못할 무엇이 사무쳐옴을 느낀다. 풋눈, 도둑눈, 가람, 갈매빛, 나비잠, 노루잠, 비꽃, 여우비와 같은 정겨운 말은 배고품 속에서 피어난 말이다. 일하면서 즐거움을 발견하고 고난을 견뎌내었을지도 모른다. 오로지 자식들과 등 따시고 배부르면 된다고 말했으리라. 입속에 아름다운 말을 굴리고 있으니 마당을 중심으로 오가던 그시절의 그리운 것들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나는 어느 때보다 풍요로우며 행복을 갈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다지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언어 또한 먹물 든 탓으로 딱딱하거나 외래어가 섞여든다. 서로 경계를 넘지 않으려고 거리를 둔 말들은 온기를 잃었다. 광고 속의 말들은 늘 달콤해서 이내 무덤덤해지고, 젊은이들끼리 주고 받는 말들은 외래어와 줄임말이 많아 은어처럼 알아듣기 어렵다. 컨셉, 버블, 노블레스 오블리제와 같은 외래어는 일상어가 되었고 낄낄빠빠는 그렇다치더라도 갑분싸, 슬세권, 이생망 같은 줄임말들은 설명을 들어야 안다, 같은 세대가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어 괜히 소외되는 듯하다. 정작 몸은 안락하지만 정신은 탱자나무 같다고 할까. 

먼지 풀풀 날리는 내 마음에 나비물을 뿌리고 싶다. 마당을 지나 골목까지 먼지를 잠재워 비질하면 홀가분해지리. 아니면 푸푸 물을 뿜어 당신에게로 날아가고 싶다. 언어의 저편에서  피어오르는 물방울이 촉촉하게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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