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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Dec 31. 2021

재판정에서 생긴 일(02)

내 남자 이야기(59)

치칙! 칙칙! 삐~~

"아아.. 0000 차량 잠시 정차하세요! 끼어들지 마세요! 공부 집행 중인 차량입니다!"

법원 근처에 도착하면서 보조 교도 경찰관이 스피커를 통해 일반 차량을 통제하고 있었다.


"오늘 법원 주변이 왜 이렇게 장사진이야? 길이 꽉 막혔네. 시간도 촉박한데...."

잔뜩 짜증 섞인 교도관의 말투. 철판으로 가려져 있어도 살짝살짝 보이는 차창 밖의 모습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차량들로 길이 꽉 막혀 보였다.


"이거 일 났네. 지금도 한참 늦었는데, 재판시간까지 법원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아."

여기저기서 경적이 울리고 도로는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덕분에 꼼짝없이 도로 한가운데 서 있는 호송차로 사람들의 시선이 고정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사건이 펼쳐졌다.

"여러분! 지금 교통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재판 시간 내에 법원 진입이 어렵습니다. 어쩔 수 없이 모두 법원까지 걸어서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 IMF 상황이라 재판 일정이 꽉 차서 지금 잡힌 재판 시간대를 놓치면 또 언제 차례가 올지 모르니까 다들 불편하더라도 보조 경관의 통제를 잘 따라 주길 바랍니다. 모두가 각자를 위한 일이니만큼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되지 않도록 해주시길 바랍니다. 포승줄 때문에 넘어질 수도 있고 거리가 생기면 안 되니까 앞에 가는 재소자 등을 잘 보고 걸어갑니다. 아셨습니까!!"


교도 경관이 말을 마치자 재소자들은 일제히 술렁거렸다.

"뭐야. 여기서부터 걸어간다고?"

"니미.. 씨발, 우리는 사람도 아닌가. 이게 뭔 사단이야!"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상황에 대해 여기저기서 불평을 쏟아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있어서도 안 되는 상황.

"..................."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수갑을 차고 굴비 엮이듯 포승줄에 감긴 채 재소자들은 호송차에서 내렸다. 재소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시내 한복판의 인도를 따라 오르막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건, 영화의 한 장면이야. 내가 그 주인공이지. 그런 것뿐이야.

씨발, 씨발... 씨~~~발!!


족히 50m가 넘는 거리. 그날은 그 50미터가 500미터나 되어 보였다. 숙이지 말라고 해도 저절로 숙여진 고개를 수갑을 찬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앞사람과 조금만 거리가 생겨도 엮인 포승줄이 잡아당겨 넘어질 듯 끌려갔다. 꺾어 신은 흰 고무신은 자꾸 벗겨지려 해 발가락에 힘을 주며 걸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재소자들에게로 향했다.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 지금 같으면 자신들의 SNS에 올리기 위해 스마트 폰으로 사진을 찍어대고 영상을 찍어 댔을지 모른다.  어쩌면 재소자들의 인권 문제가 가십거리로 뉴스에 보도 됐을지도....


재소자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가리며 해진 옷 사이로 비치는 속옷을 가리기 위해 어쩔 줄 몰라하며 뛰다시피 길을 올라갔다. 나이 많고 키가 작은 중소기업 사장님은 덩치 큰 폭력범 뒤에서 질질질 끌려가다시피 뛰어갔다.


그리고 그중 유난스레 눈길을 끌며 사람들의 시선을 강탈한 사람. 바로 나.

해진 옷 대신 물려받은 깨끗한 재소자복을 입은 나의 모습은 다른 재소자들과 달라 보였나보다. 대부분 구치소에 오래 머물지 않은 터라 황톳빛 재소자복을 입었는데 나 혼자 깨끗하고 질 좋은 옷을 입고 있었으니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어머, 저 죄인들 봐. 저기 저기 저 젊은 사람이 두목인가 봐. 어쩜 허여멀건 해가지고.... 멀쩡하게 생겼는데 못된 짓을 했나 부지..."

"두목이라 그런가. 옷도 제일 좋은 걸 입었네"

"쯧쯧쯧. 세상이 어쩌려고 저런 놈들이 판을 치나.. 원...."


뭐야?? 그냥 싸 잡아서 무조건 한통속으로 몰아붙이는 중이었다. 죄인이라니.... 하기야. 저들이 뭘 알기나 할까?

우여곡절 끝에 재판 대기실까지 간신히 도착한 후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변호사를 만났다.


"너무 늦게 도착했어요. 재판 시간이 다 돼서 시간이 없으니까. 요점만 간단하게 말할 테니 잘 듣고 판사가 묻는 말에 '네, 아니오'로만 대답하세요. 할 말 없냐고 물으면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세요. 아셨죠?? "

"네..."

"그리고 질문과 답변은 미리 검사를 만나 정한 겁니다. 판사가 집행유예 짧게 때리기로 했으니까 다른 불만이나 토 달지 마시고요. 알았죠. 김 사장님!"

"네...."

"한꺼번에 10명씩 끊어서 재판할 겁니다. 비슷한 경제사범들 재판이라 판사들도 스트레스가 엄청납니다. 점심 먹을 시간도 없이 재판이 잡혔대요. 김 사장님이 일찍 나오게 하려고 간신히 끼워 넣은 재판이니까. 빨리 끝내고 오늘 집에 들어가세요. 그럼 믿겠습니다. 이따 봐요."


그동안 얼굴도 볼 겨를 없었던 변호사는 오랜만에 만나 안부는커녕, 숨 돌릴 틈도 없이 자신의 말만 쏟아냈다. 이 녀석도 나를 죄인 취급하는지 다그치듯 쪼아대더니 이내 재판정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쁜 새끼! 똑같은 도둑놈!'


나는 불만을 토로할 틈도 없이 줄 맞춰 순서대로 재판정으로 들어갔다. 대기실 입구에서 수갑과 포승줄이 풀리고 조금은 편안하게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그제서야 마음의 여유가 생겼는지 걸어 들어가며 재판정을 둘러 보기도 했다.


방척석에는 모처럼 직원들과 관계자 몇몇이 보였다. 말없이 눈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들 가까이 지나갈 때 본사 임원의 중얼대는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뭐야.. 괜히 걱정했잖아. 얼굴 좋아졌네. 야~ 김 사장~ 감방 체질인가부다야~"


속에서부터 부아가 치밀었다.

씨발 새끼. 말이냐 막걸리냐. 넌 나가면 바로 디졌어...


재판이 시작됐다. 내가 속한 재판은 검사가 한 명씩 호명할 때마다 각자의 변호사들이 검사가 제출한 서류에 대해 간단한 질문을 끝내고 판사의 판결로 이어졌다. 그러나 쉽게 넘어갈 리 만무했다.


재판정에서 바라본 한 중년 여성. 그녀는 금융관리법 위반과 유사수신에 해당하는 금융 피라미드 조직을 구성하고 자금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구속되었다. 구치소에 있었던 방장과 비슷한 유형이지만 그 규모 면에서는 매우 작았기 때문에 정상참작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최후 변론에서 어처구니없는 말을 뱉었다.

"판사님, 제가 이번에 나가면 정말 잘 정리해서 다시 한번 좋은 회사를 만들도록 할게요."


순간 방청석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이내 판사가 장내를 조용히 하라는 큰소리와 함께 비웃는 듯한 조소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사건번호 00 나 0000 피의자 000은 아직도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나 봅니다."

"저. 판사님. 그게 아니고..."

"판결하겠습니다. 사건번호 00 나 0000 피의자 000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3년 그리고 추가로 보호관찰 3년을 선고합니다."


마지막에 보호관찰 3년이 붙은 것이 확실했다. 흑빛으로 변한 그녀의 얼굴과 변호사의 모습을 보고 전체적인 재판정 기운이 흑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이후에 이어진 다른 재소자들 역시 그녀의 저주 때문인지 모두 마지막 판결에 추가로 보호관찰이 붙었다.


"사건번호 00 가 0000 피의자 김00 징역 6월 집행유예 10월 추가로 보호관찰 10월에 처한다."

나 역시 보호관찰의 딱지가 붙었다. 그리고 유독 한 마디를 더 듣긴 했다.

"구치소 생활이 맘에 들던가요? 오래 있으려고 아주 좋은 옷을 장만했네요."


헉!!!!


재판이 끝나고 대기실로 돌아오자 교도관이 소지품과 옷을 돌려주며 각자 환복 한 후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귀가하는 사장님들! 다음에는 좋은 곳에서 만납시다. 이제 이런 구질구질한 일로 만나지 말자구요. 이제 죄짓지 말고 조용히 평범하게 사세요."


그런데, 아뿔싸!!

구치소에 입소하면서 입고 있던 양복이 없다! 면회 온 직원에게 양복을 드라이해달라고 맡겼던 터라 런닝, 구두, 양말과 유치장에서 입고 있던 반바지가 전부였다.


"저... 교도관님... 재소자복 입고 나가면 안 되나요?"

"미친 거 아니죠??"


결국 나는 런닝에 반바지를 입고 검은 양말과 구두를 신었다. 그리고 손목시계까지 찼다. 나는 밖에서 기다리는 회사 관계자를 빠르게 따돌리고 법원을 뛰어나갔다. 그리고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21일간의 길고 긴 업무...

드디어 마무리하며 퇴근길에 올랐다.


피곤했다.

온몸이 녹초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불현듯 스치는 생각....


'이렇게 나올 줄 알았더라면 그 옷을 다른 사람에게 줄 걸 그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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