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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정률 Jan 31. 2024

그 동요를 부르지 말라

곰 세 마리와 멋쟁이 토마토의 무시무시함에 대해

잔혹한 동요의 세계

엄마가 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곤혹스러운 동요의 세계가 있다. “나는야 주스 될 거야 (꿀꺽) 나는야 케첩 될 거야 (찌익)”라는 다소 자기 파괴적인 꿈을 가진 야채의 노래를 들었을 때 나와 짝꿍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를 어떻게 하면 좋지? 이건 결국 무엇을 희망하는 것일까? 아이들이 이 노래를 상당히 좋아한다는 걸 알고서는 더욱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따당따당 사냥꾼”은 갑자기 왜 등장하며 “소라”라고 외치는 그 동요의 마지막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알아낼 수 없다. - 작은 동거인은 왜인지 그 부분에서 땅으로 엎드린다, 심지어는 나의 머리를 내리누르며 동작을 강요한다. 사냥꾼이 나타났는데 이 경쾌한 리듬은 무엇이며, 결국 숨는 것이 "소라"라니! 콘크리트 유토피아 같은 디스토피아일까?


최고의 인기 캐릭터 뽀로로에 등장하는 ‘멋쟁이 사자’는 소비를 부추기는 나쁜 녀석이다. 마트의 골목을 런웨이처럼 누비는 이족보행의 사자는 “피자 사자” “진짜 사자”를 외치며, 쇼미더머니 1차 예선에 떨어지고도 남을 질 나쁜 라임을 뱉어낸다. (다행히 동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이도 이 사자만큼은 싫어한다)


어떤 노래들은 너무 슬프다. 괴담으로도 유명한 섬마을의 아기는 엄마가 일하러 간 사이 “팔 베고 스르르” 잠이 든다. 기찻길 옆 오두막에 사는 아기도 우리 집 아기와 달리 참 잘도 잠이 든다. 같이 잠을 재워줄 수 없는 엄마와 시끄러워도 그곳에서 잠을 재워야 하는 엄마에 감정 이입을 하다 보면, 동요를 부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곰에게 새로운 가족을 선물하자


나의 작은 짝꿍은 곰돌이를 지나치게 애정한다. 목을 가누지 못할 때부터 곁에 있던 북극곰 인형은 이제 4마리가 되어 한 가족을 이뤘는데, 하루 종일 “아빠곰, 엄마곰, 아가곰, 동생곰”을 반복해서 말한다. 잘 때는 “곰귀곰귀” 일어날 때는 “곰코곰코” 기분 좋을 때는 곰과의 “코뽀뽀”를 즐긴다.


그런 그에게 가장 자극적인 노래는 “곰 세 마리”인 것이 당연하다. 문제는, 이 노래는 이해할 수 없는 동요의 세계에서 나는 절대 불러주지 않으려 노력하는 노래라는 데에 있다. 왜 아빠곰은 굳이 뚱뚱하며, 엄마는 날씬하고, 아가곰은 - 실제로 귀엽지는 하지만 - 귀여운가. 정상가족과 성별 이데올로기까지 골고루 갖춘 문제적 동요는 단지 귀여움만 남기지 않을 것이다. 이 곰 가족의 외피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두렵다. - 비슷한 동요로는 그토록 유명한 '아기 상어'가 있다


아이가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게 되고, 스스로 율동하며 뿌듯해하기 시작했다. 장난감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아이는 “뚱뚱해”, “날씬해”하며 제 팔을 벌렸다 오므린다. 아이의 세계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율동을 어린이집에서 배웠듯이. 어린이집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무수히 또 다른 노래들을, 그 가사 그대로 듣게 될 것이다. 시각화하는 동작을 배울 것이고, 잘한다며 칭찬을 건네주는 사람들이 표정을 보며 더 많은 노래를 확정적으로 부르게 될 것이다.


아이가 “너무 귀여워”라고 말하며 두 손으로 볼을 감싸 안는다. 그 모습이 귀여워 반사적으로 웃음이 나왔다가, 다시 울적해졌다가 끝내는 어떤 표정을 해야 할지 칭찬을 해주는 게 좋은 것일지 몰라 잠시 멈춰있었다.


“아빠곰은 최고야, 엄마곰은 아주 멋져, 아가곰은 아주 씩씩해”

"언니곰은 잘 삐져, 동생곰은 우렁차, 할미곰은 무릎 아야 해"

“아빠곰은 코골아, 엄마곰은 피곤해, 아가곰은 아주 잠 안 자”


오늘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좀 다른 곰 가족을 만들어주는 일뿐이다.


엇갈린 플레이리스트들의 공존


언젠가 그 친구들은, 연말 시상식에 나오는 아이돌들을 보느라 잠을 자지 않을 거고 내 차에 흘러나오는 노래는 구식이라며 소리 지를 것이다. 내가 들려주지 않는 노래들을 더 많이 알게 될 것이고, 때로 내가 싫어하는 노래들도 당연하게 - 모두가 부르기 때문에 - 부르게 될 것이다. 자라며 점점, 더 많이, 나와는 다른 책을 읽고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다른 음악을 들으며, 끝내는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당연한 일이다. 작은 동거인은 내가 아니다, 그의 세계는 나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에게는 스스로의 세계를, 자신의 언어를, 그리고 취향을 선택하고 배제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결이 비슷한 사람일 수는 없을까? 이 동요들이 나에게 불편한 것을 언젠가 네가 찾아내고, 깔깔 거리며 같이 웃을 수 있는 날이. 너 자신과 세계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살아지게 되었을 때, 우리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게 되기를. 우리가 어떤 날 전혀 다른 플레이리스트를 들고 여행길을 떠나더라도. 


그날은 꽤 진지하게 기도했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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