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은 꽤 오래전(최소 4억 년?)부터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성 접촉 행위를 해 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억 년 전 하등생물 단계에서부터 '애정'이라는 개념까지 같이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사마귀는 성관계 이후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 행동양식으로 악명이 높은데 이는 이 종이 '성욕'은 있어도 '애정'은 없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증표일 것이다.
그럼, 성욕이 아닌 이 애정욕구는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생물학자가 아니라 단언은 못 하겠지만 나는 이게 모성(母性)으로부터 기인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태초 성욕이 존재했던 시점에 모성도 같이 존재했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설령 아주 예부터 존재한 감정(?)이 맞다 해도 그 형태나 정도는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이를테면, 수 억년 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는 하등생물(절지동물 내지 물고기류)일수록 모성의 정도는 작고 얕다. 어버이 개체는 수백수천의 알을 그냥 '흩뿌릴' 뿐이고 게 중 운 좋게 살아남는 놈들에 의해 유전자가 이어져 나가는 것인데 여기서 모성이라는 개념을 끼워 넣을 여지는 딱히 보이지 않는다.
흥미로운 건, 상대적으로 고등한 종으로 올라갈수록 이렇게 '뿌려지는' 알의 개수가 줄어드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파충류 단계만 올라와도 어버이 개체가 '뿌려대는' 알의 개수는 한 번에 두 자릿수를 넘지 않게 된다.
알의 개수가 적어지다 보니 아무렇게나 '뿌려놓고' 알아서 생존을 기대하는 방식은 효율적이지 않다. 이제는 지키고 보살펴야만 한다. 숫자가 적어지니 그 하나하나가 점차 소중해지기 시작하는데 비로소 우리가 '모성(母性)'이라 부를 만한 어떤 모습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파충류들의 모성 역시 알에서 새끼가 나오고 나면 끝이다. 새끼가 알을 까고 나오는 순간 어버이는 그 곁을 떠난다.
조류로 올라가면 모성 역시 한 층 더 발전하는 모습을 보인다. 새끼가 알을 까고 나와서도 어버이는 이들을 돌본다. 그리고 이 양육의 과정은 새끼가 스스로 날 수 있을 때까지 지속된다.
누가 뭐래도 이 모성의 최고봉은 우리 포유류이다. 포유류라는 단어 자체에 내포된 의미를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알을 낳지 않는다. 알이 없는 상태의 새끼를 뱃속에 품고 있다가 꺼내놓고 젖을 물려 키운다. 당연히 한 어버이쌍이 내어 놓을 수 있는 새끼의 수도 그 아래 하등종들보다 현저히 적다. 우리 포유류는 이 '극히 적은 숫자의' 자식새끼들을 어화둥둥 애지중지하며 모든 걸 바쳐서 길러낸다.
이러한 모성의 발전정도와 종족 내 개체들 간 애정 강도 역시 비례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테면 포유류가 아닌 다른 동물종들은 서로 간에 이유 없이 몸을 맞대는 일이 거의 없다. 이들이 (공간상의 하자가 없음에도) 의식적으로 서로 간에 몸을 닿게 하는 건 두 가지의 목적으로만 나타나는데 하나는 생식을 위한 성접촉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를 공격해 죽이려는 상황이다.
하지만 포유류는 무리 내에서 걸핏하면 서로의 몸을 맞대고 의식적으로 부비부비를 해댄다. 당연히 그 모든 상황이 성접촉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건 너 나 우리가 더 잘 알 것이다. 상대를 죽이겠다는 공격적 의도 역시도 아니다.
일전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는데, 앵무새를 키우는 사람이 주의해야 할 점 중 하나가 새를 함부로 만지거나 쓰다듬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아무렇게나 접촉하면 그걸 성(性)적인 의도로 받아들인다고 말이지. 모성이라는 측면에서 꽤 발전한 조류임에도 불구하고 의식적인 육체 접촉을 성적 의도가 아닌 다른 의미로는 인식하지 못한다는 의미인데확실히 포유동물과는 다른 것이다.
이 포유동물 내에서도 모성의 끝판왕이 있는데 다들 짐작하겠지만 바로 우리 호모 사피엔스종이다. 호모 사피엔스종이 자녀를 양육하는 기간은 그 어떤 생물종과 비교를 불허한다. 초기 인류종인 호모 에렉투스는 8년 정도를 양육했다고 하며 이 정도만으로도 이미 다른 생물종에 비해 얼토당토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까지 올라가면 이 양육기간은 8년으로도 모자라 10년을 훌쩍 넘어가게 된다.
흥미로운 건, 호모 사피엔스종 내에서도 문명의 발전 정도에 따라 이 양육기간의 편차가 크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전근대 사회에서 일반적인 양육기간은 15년 정도였다. 대부분의 전근대 문명권에서 어버이들은 자녀가 15세를 넘기면 소위 '성인식'이라는 걸 치르고서 자녀를 '방생' 시킨다.(이 과정에서 어버이는 마지막 배려로 자녀의 짝짓기 배우자를 찾아 맺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후기 산업화 사회로 넘어가면서 이제 양육기간은 20년을 훌쩍 넘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양육기간의 변화에 따라 '성인'의 커트라인이 올라가자 과거 '첫 성인'이었던 그 나이는 '사춘기'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어 공동체에 의해 별도의 관리를 받게 된다.
워낙에 긴 모성의 시간 때문인지 이 호모사피엔스종의 애정 욕구는 다른 종과 비교 자체를 불허하는데
주변 개체들과 좋은 애착 관계를 유지함이 분명 생존에 유리함을 제공하는 측면이 있겠지만, 이 호모사피엔스종에서의 관계욕구는 이런 단순한 생존 필요조건 정도를 훌쩍 넘어간다. 물리적 생존에 유익함 여부를훌쩍 뛰어넘는 수준으로 인간관계에 투자하는 것이다. 실로 엄청난 물질적 정신적 자원을 쏟아부어가며 타자와의 교류에 매달리는 것인데, 만약 공동체에서 좋은 관계 맺기에 실패해 고립이 되어버리는 경우(왕따..?) 물리적 생존에는 별 다른 하자가 없는 환경에서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상황 역시 비일비재하게 나타난다.(죽지 못하면 조커처럼 되어 버리기도..) 호모사피엔스의 관계교류는 단순한 생존의 필요조건을 넘어 그 자체로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현대시대에 이르러 사회구조적 변화와 맞물려 호모사피엔스종의 양육기간은 한 번 더 극적으로 증가했다. 이제 20살까지로는 턱없이 부족하며 30이 넘도록, 아니 어쩌면 평생 동안 어버이가 자녀 개체를 보살피게 된 것이다.(이와 함께 짝짓기 연령 역시 30을 넘어 40대로, 무한정으로 유예된다.)
그리고 이렇게 기나긴 모성의 시간을 거친 작금 세대의 모성적 욕구는 이전 세대들과 비교해 보아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너무나 강렬해진 모성의 욕구는 역설적으로 개체들 간의 원활한 관계 맺기에 하자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사람들은 방구석에 처박혀 자신만의 안전하고 달콤한 모성의 친구들을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이 친구들과의 소통은 전자신호로 이루어지며, 심지어 친구 자체가 전자신호 덩어리인 경우도 넘쳐난다.
혹자는 이것을 병리적으로 보고 그켬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우리'는 기나긴 발전의 과정 속에서 끝없이 '모성'을 키워왔다. 이미 자녀 양육기간이 20년을 넘어가는 지점에서 '우리'는 그 이전의 조상들, 그리고 다른 종들과 비교해 충분히 '병리적인' 모습으로 나아간 것이고 그 결과가 작금의 문명체계이다. 고로 지금 당장은 병리적으로 여겨질지도 모르는, 이 넘치는 모성의 현대사회와 우리의 모습이 미래에는 또 어떤 발전(?)상으로 이어지게 될지는 모르는 일.
필자가 이 넘치는 모성을 신좌파 리버럴 이후 세계의 근본적인 병폐로 규정하는 '모성의 디스토피아'식 반(反) 모성적 시각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