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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Oct 07. 2024

얼마 전 만난 진상

진상은 사절합니다

며칠 대리를 뛰면서 있던 일이다. 고객이 약속장소에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는다.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시간이 돈이다. 시간에 민감하다. 그렇게 슬슬 짜증이 나려던 찰나, 추가요금을 요구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주차장 편에서 고객이 나타났다. X86과 X세대 중간쯤 되어 보이는 아재.


"뭐 제가 뭐 문제 될만한 상황인 건 아니죠?"


태연한 목소리로 말하는데 추가요금 언급하긴 촘 애매한 타이밍이었고 긴 말 하기 싫어서 괜찮다고, 빨리 출발하려 시동을 걸었더랬다. 그렇게 주차장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운전대 잡는 꼬라지부터 틀려먹었구먼? 이런 게 무슨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나참ㅋㅋ"


운전대 잡은 지 2분도 안 되었는데 시작부터 아 씨... 그리고 난 베스트 드라이버 어쩌고 한 일이 없는데? 아마 정황을 보고 집작 하건대 기사 배정이 안되어 짜증이 난 고객이 상담원한테 지X을 하니까 할 말이 없는 상담원이 "정말 죄송합니다 고객님. 저희 가장 출중한 베스트드라이버 분으로 선정중이오니 부디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ㅜㅜ." 이랬던 모냥이다.


오래된 페친들이라면 2년 전? 페북에 올렸던 모 진상고객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운전 시작하자마자 걸쭉~한 꼰대 목소리로 "당신 내가 누군지 알아? 으이?" "운전 똑바로 하란 말이야 이 새꺄" 이러던 금마. 결국 다 끝나고 모욕죄로 고발하려 경찰 부르니까 오만 원 꺼내면서 "야! 이거면 됐냐?" 이질알 하면서 가오 잡던 병X새X.

여튼 수년 전 그때를 떠올려보건대 이런 상황은 운전을 안 하는 게 맞아. 기분 나쁜 건 둘째 치고서라도 여차하면 주행 중에 위험한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까. 물론 이 경우 난 시간적으로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되지만 그래도 무리하다가 더 큰 난리가 나는 것 보다야..


"이거 이거 기사가 영~ 시언찮구만. 이래가꼬 집에는 갈 수 있겠어?"

"저기 고객님. 혹시 제가 불편하시거나 안 맞으신 거 같으면 그냥 이 주행 취소처리하고 돌아가도록 할까요?"
"ㅁ.. 뭐? 뫼야? 애애? 이 사람보소?"

"..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그냥 차를 돌려서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갔다. 손놈은 계속 이 놈 봐라? 뭐 이런 게 다 있어? 이러고 있고ㅇㅇ

쨋든 원래 자리로 돌아간 후 바로 통제실에 전화를 걸었다. 빨리 취소하고, 나도 기분이 꽤 고까운 상황이기 때문에 "취소했으니까 난 이제 당신이랑 아무런 계약관계가 아닌 거고, 우리 인간대 인간으로 얘기 좀 하자?" 한 마디 하려고ㅇㅇ 그런데 그날 따라 유독 통화가 연결이 안 되더라


"지금은 모든 상담원이 통화 중이오니 먼저 온 전화가 끝나는 대로 상담원을 연결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남은 대기인원은 3명입니다."


아씨.. 


".. 남은 대기인원은 5명입니다."


심지어 대기인원이 줄지도 않고 오히려 늘어나는 판국이었다. 애매하고 민망 찝찝한 분위기


"야 됐다ㅋㅋ 나 그냥 취소된 걸로 알고 있으면 되는 거 아냐? 그냥 가세요 네?ㅋ 나가서 님 원데로 천~~천히 취소처리 하세요 ㅇㅋ?"



아 ㅆㅂ 진짜

한 손에 수화기 들고, 뭔가 고까워 고객 얼굴 함 쓱 쳐다봤다가 그냥 너털너털 주차장 밖으로 걸어 나갔더랬지. 그렇게 밖에 나와서 계속 기다리다가, 정말 간신히 전화 연결이 되었더랬다.


"이 고객은 아닌 거 같으니까 이 주행은 일단 취소처리 해 주시구요, 그리고 이 고객은 걍 차단처리 해주세요! 이런 사람은 여차하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대리운전은 기사와 고객의 쌍방평가가 이루어진다. 기사가 고객을 블랙리스트 걸 수도 있는 거지ㅇㅇ)


라고 통화를 종료하려는데, 하필 딱 그 타이밍에 그 손놈이 주차장에서 내 쪽으로 걸어 나오더라. 살짝 민망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쨋든 취소처리는 했고, 차피 나도 오늘 일과는 망한 거 같은데 그냥 가기엔 무언가 아쉽던 상황. 


"거 기사님 나한테 원망이 많으신가 봐? 그래서 제가 나왔습니다."

"아, 예. 뭐 좋습니다. 차피 취소처리도 끝났으니 우리 진솔하게 대화 좀 해 보실까요?"


뭐 그렇게 자기 말을 시작하는데.. 자기도 오늘 기분 좋은 날이 아니었다는 둥 자기 입장에서도 손해를 본 거라는 둥 어쨌든 둥 씨발 그게 나랑 뭔 상관인데 대부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법한 말들이라 무슨 말들을 했었는지 한 20%도 기억은 나지 않는다. 여튼 그렇게 즈 혼자 실컷 떠들다가


"뭐.. 아까 보니 제가 무슨 기사님의 블랙리스트 명단에라도 오르게 된 모냥인데 우리 어지간하면 서로 앙금은 남기지 말고 갑시다. 아까는 뭐 제가 좀 미안했습니다."


이러면서 고개 숙이면서 악수를 청하더라. 얼떨결에 나도 악수를 받았더랬지. 이런 상황에서 뭐라 더 쏘아붙이기도 그렇고 나도 그렇게 뻘쭘한 기분으로 돌아 나왔더랬다.

여튼 이 바닥 운전대 잡은 지 4년 차에 '최고 역대급'을 갱신하려나 싶었으나 막판에 고개를 숙임으로써 챔피언(?)을 갱신하진 못하게 된 어느 하루의 일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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