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은 사절합니다
며칠 전 대리를 뛰면서 있던 일이다. 고객이 약속장소에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는다.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시간이 곳 돈이다. 시간에 민감하다. 그렇게 슬슬 짜증이 나려던 찰나, 추가요금을 요구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주차장 저 편에서 고객이 나타났다. X86과 X세대 중간쯤 되어 보이는 아재.
"뭐 제가 뭐 문제 될만한 상황인 건 아니죠?"
태연한 목소리로 말하는데 추가요금 언급하긴 촘 애매한 타이밍이었고 긴 말 하기 싫어서 괜찮다고, 빨리 출발하려 시동을 걸었더랬다. 그렇게 주차장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운전대 잡는 꼬라지부터 틀려먹었구먼? 이런 게 무슨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나참ㅋㅋ"
운전대 잡은 지 2분도 안 되었는데 시작부터 아 씨... 그리고 난 베스트 드라이버 어쩌고 한 일이 없는데? 아마 정황을 보고 집작 하건대 기사 배정이 안되어 짜증이 난 고객이 상담원한테 지X을 하니까 할 말이 없는 상담원이 "정말 죄송합니다 고객님. 저희 가장 출중한 베스트드라이버 분으로 선정중이오니 부디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ㅜㅜ." 이랬던 모냥이다.
오래된 페친들이라면 2년 전? 페북에 올렸던 모 진상고객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운전 시작하자마자 걸쭉~한 꼰대 목소리로 "당신 내가 누군지 알아? 으이?" "운전 똑바로 하란 말이야 이 새꺄" 이러던 금마. 결국 다 끝나고 모욕죄로 고발하려 경찰 부르니까 오만 원 꺼내면서 "야! 이거면 됐냐?" 이질알 하면서 가오 잡던 병X새X.
여튼 수년 전 그때를 떠올려보건대 이런 상황은 운전을 안 하는 게 맞아. 기분 나쁜 건 둘째 치고서라도 여차하면 주행 중에 위험한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까. 물론 이 경우 난 시간적으로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되지만 그래도 무리하다가 더 큰 난리가 나는 것 보다야..
"이거 이거 기사가 영~ 시언찮구만. 이래가꼬 집에는 갈 수 있겠어?"
"저기 고객님. 혹시 제가 불편하시거나 안 맞으신 거 같으면 그냥 이 주행 취소처리하고 돌아가도록 할까요?"
"ㅁ.. 뭐? 뫼야? 애애? 이 사람보소?"
"..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그냥 차를 돌려서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갔다. 손놈은 계속 이 놈 봐라? 뭐 이런 게 다 있어? 이러고 있고ㅇㅇ
쨋든 원래 자리로 돌아간 후 바로 통제실에 전화를 걸었다. 빨리 취소하고, 나도 기분이 꽤 고까운 상황이기 때문에 "취소했으니까 난 이제 당신이랑 아무런 계약관계가 아닌 거고, 우리 인간대 인간으로 얘기 좀 하자?" 한 마디 하려고ㅇㅇ 그런데 그날 따라 유독 통화가 연결이 안 되더라
"지금은 모든 상담원이 통화 중이오니 먼저 온 전화가 끝나는 대로 상담원을 연결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남은 대기인원은 3명입니다."
아씨..
".. 남은 대기인원은 5명입니다."
심지어 대기인원이 줄지도 않고 오히려 늘어나는 판국이었다. 애매하고 민망 찝찝한 분위기
"야 됐다ㅋㅋ 나 그냥 취소된 걸로 알고 있으면 되는 거 아냐? 그냥 가세요 네?ㅋ 나가서 님 원데로 천~~천히 취소처리 하세요 ㅇㅋ?"
아 ㅆㅂ 진짜
한 손에 수화기 들고, 뭔가 고까워 고객 얼굴 함 쓱 쳐다봤다가 그냥 너털너털 주차장 밖으로 걸어 나갔더랬지. 그렇게 밖에 나와서 계속 기다리다가, 정말 간신히 전화 연결이 되었더랬다.
"이 고객은 아닌 거 같으니까 이 주행은 일단 취소처리 해 주시구요, 그리고 이 고객은 걍 차단처리 해주세요! 이런 사람은 여차하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대리운전은 기사와 고객의 쌍방평가가 이루어진다. 기사가 고객을 블랙리스트 걸 수도 있는 거지ㅇㅇ)
라고 통화를 종료하려는데, 하필 딱 그 타이밍에 그 손놈이 주차장에서 내 쪽으로 걸어 나오더라. 살짝 민망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쨋든 취소처리는 했고, 차피 나도 오늘 일과는 망한 거 같은데 그냥 가기엔 무언가 아쉽던 상황.
"거 기사님 나한테 원망이 많으신가 봐? 그래서 제가 나왔습니다."
"아, 예. 뭐 좋습니다. 차피 취소처리도 끝났으니 우리 진솔하게 대화 좀 해 보실까요?"
뭐 그렇게 자기 말을 시작하는데.. 자기도 오늘 기분 좋은 날이 아니었다는 둥 자기 입장에서도 손해를 본 거라는 둥 어쨌든 둥 씨발 그게 나랑 뭔 상관인데 대부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법한 말들이라 무슨 말들을 했었는지 한 20%도 기억은 나지 않는다. 여튼 그렇게 즈 혼자 실컷 떠들다가
"뭐.. 아까 보니 제가 무슨 기사님의 블랙리스트 명단에라도 오르게 된 모냥인데 우리 어지간하면 서로 앙금은 남기지 말고 갑시다. 아까는 뭐 제가 좀 미안했습니다."
이러면서 고개 숙이면서 악수를 청하더라. 얼떨결에 나도 악수를 받았더랬지. 이런 상황에서 뭐라 더 쏘아붙이기도 그렇고 나도 그렇게 뻘쭘한 기분으로 돌아 나왔더랬다.
여튼 이 바닥 운전대 잡은 지 4년 차에 '최고 역대급'을 갱신하려나 싶었으나 막판에 고개를 숙임으로써 챔피언(?)을 갱신하진 못하게 된 어느 하루의 일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