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지 않는 사람과 맞춰가며 나의 성향을 감추기도 해 가며 그렇게 배려하며 사람들을 만났다.
중년의 나이가 되고 보니 여태 남아있는 인연은 더없이 소중하지만 그렇게 스쳐 지나는 인연 또한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기억에 남은 시절인연이 몇 있다.
20대 자화상을 깊이 새겨주신 분 있다. 대학졸업 후 취업했던 직장의 대표님이다. "일머리가 뛰어나다." "매사 업무처리가 신속하고 정확하다." "미처 생각지 못한 것들을 파악한다." "뭐든 맡기면 잘 해낸다." "내가 본 직원 중에 단연 으뜸이다." 일을 잘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이후 삶에 전반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결국 나는 괜찮은 사람이었고 살아야 할 가치가 있고 꼭 필요한 존재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가족들에게 한 번도 인정받지 못했는데 목말랐던 인정욕구가 충분히 채워졌다.
인정받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은 동료가 있다. 자신을 증명하고 싶다 보니 보이는 것에 더 신경 쓰고 사람들 반응에 예민해지고 서운하고 속상해하는 것이 반복된다. 이미 부모로부터 혹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욕구가 채워진 사람들은 덜 예민하다. 나 역시 굳이 나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이미 나는 스스로 충분하니까.. 일종의 자유인 셈이다.
결혼 몇 달 앞두고 홍콩에 출장을 갔었다. 통화로만 알던 거래처 대표님이 마중 나와 계셨다. 그분의 이름은 조였고 한국 이름으로는 윤창식이었다. 한국의 태권도를 배우고 당시 유행했던 여배우 전지현 팬이라며 인사를 했고 일과 후에는 홍콩 구석구석 맛집을 찾아다니고 관광지도 구경 다녔다. 조는 당시 나보다 20살 많은 연상이었지만 큰 키에 하얀 백발, 면바지와 단정한 티셔츠, 백팩, 카메라를 항상 들고 다녔으며 매우 젊어 보였다.
조와 함께 했던 4박 5일 일정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나는 결혼을 뒤엎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홍콩에 남고 싶었다. 홍콩이라는 도시가 좋아서라기보다 조와 함께 일하고 싶었다. 사실, 미리 얘기가 된 것도 아니었고 조가 어떤 메시지를 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일방적으로 조가 좋았다. 살면서 그토록 진중하고 건강하고 멋진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았다.
마지막날 저녁, 결혼을 앞두었다는 얘기를 듣고 조는 놀라면서 한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네 인생을 살라. 그리고 배우자의 인생도 존중하라" 출장에 다녀오고 결혼식을 하고도 이따금 조와 메일을 주고받았다. 세계각국을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을 보내주고,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라도 했더니 그림을 그릴 것을 강력하게 추천해 주었다. 사스 바이러스로 세계가 난리일 시기, 한국은 어떻냐며 걱정을 해주기도 하였다.
큰 아이를 임신하고 조와 연락을 끊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지나고 보니 그때의 나는 연애할 때는 물론이고 결혼까지 의지하는 애들 아빠와의 삶이 버겁게 느껴졌던 것 같다.
조는 나의 이상형이었다. 덩치가 크고 훤칠하고 호남형에 인상이 매우 좋았다.(사실 누구라도 조를 싫어하진 못할 거다.) 거기다 계산적이지 않고 신중하고 배려심이 깊었다. 아빠 같은 사람, 기대고 싶은 사람, 내가 힘들면 안아주고 포근히 감싸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순간 강렬하게 빠졌던 것 같다.
20년이 지나 이제 나는 조의 나이가 되었다.
조처럼 여유 있는 삶을 살진 못하지만 나 역시 일을 하며 글과 그림, 공상(?)으로 일탈을 꿈꾸고 있다. 일상에 갇혀있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재미있게 살고 싶다.
그 외에도 기억에 남는 시절인연은 많다.
함구증처럼 말이 없던 나를 챙겨줬던 5학년 담임선생님, 선생님이 보던 전과를 주셔서 그걸로 공부를 열심히 했다. 고등시절, 학교선배언니집에 자주 놀러 갔는데 집밥을 무척 맛있게 차려주곤 했었다. 가끔 그 언니의 밥상이 생각이 난다. 1년간 매일 마음을 담아 좋아하는 선배에게 편지를 보냈다. 마음을 글에 담는 연습을 그때 많이 했던 것 같다. 이유 없이 나를 아껴주던 직장언니도 있었다. 그 감사함을 다 표현하기도 전에 이직해 버려 언니가 배신감을 느꼈을 텐데, 아직도 그게 마음에 걸린다. 내 손을 꼭 잡고 앞으로 꼭 좋은 일이 함께 하길 기도해 주던 분도 떠오른다. 불과 작년의 일이다. 그 짧은 기간 내 마음을 알아주고 그렇게 기도를 해주셨다.
나는 힘든 일이 많았던 사람이다. 가난했고 아무리 노력해도 가족들이 나의 존재를 부정하였으며 친구의 배신과 사람들에게 시달린 시간도 많았고 배우자 외도에 이혼도 했다. 세상에 뭐 하나 쉬운 적이 없었던 나는 세상은 왜 나에게만 가혹한가? 원망한 적도 많다.
하지만 돌아보면 굽이굽이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지금의 내가 성장하고 걸어갈 수 있었던 건 나 혼자만의 힘은 아니었다. 나에게 그들.. 시절인연은 따뜻한 선물과도 같았다.
나도 조처럼 살아가고 싶다. 진중하고 사려 깊고 배려심 많은 사람으로, 생계형 일을 열심히 하되 좋아하는 일을 취미로 하는..누군가에게 깜짝 선물 같은 시절인연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