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난했다. 7남매였고 부모님들은 경제적 능력이 없었다. 언니들은 학업을 그만두고 10대부터 공장에 가서 철야를 밥 먹듯 하며 돈을 벌었고 그 피 같은 돈으로 9 식구가 살았다. 언니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보육원 신세를 져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라도 분이신데,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분들이었다. 어머니가 스무 살에 시집을 가보니 시댁에서 일하는 인부가 10명이 넘었고 그 동네에서 제일 부자였다고 했다. 결혼할 때 논을 4마지기를 받았는데 그 정도면 먹고사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였는데 이후에 여러 사정으로 헐값으로 팔아버리고 도시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어머니는 동네에서 금슬 좋기로 유명한 집 딸이었다. 부모님 사랑을 받고 자랐고 부모님을 많이 사랑하셨다고 하였다. 아버지처럼 큰 부자는 아니어도 평생 성실하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덕분에 먹고살 걱정은 안 했고 대대로 머리가 좋은 집안이라 외갓집은 유독 신문사, 세무사, 교사, 공무원이 많았다.
좋은 집안에서 자란 두 분이 잘 사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는 즈음에 정신질환이 발병하였고(심각한 우울증 증세였던 것 같다.) 아버지는 군대를 다녀오고 그런 어머니를 간병하다 사람이 변했다고 했다. 어머니의 증세는 점점 심해지고 굿을 몇 번이나 했는데도 차도가 없자 부산에 가면 낫는다는 동네 점쟁이의 말을 듣고 모든 재산을 헐값에 넘기고 부산으로 이사를 왔다. 막상 부산에 오니 그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은 방 두 칸짜리 전세방이었다고..
평생 시골에서 살다가 도시로 상경한 부모님은 도시에서 살아남는 법을 모르셨다. 서당에 다니며 한자공부를 하셨던 아버지는 본인이 배운 것을 써먹을 방법을 몰라 세상을 원망하다 병을 얻어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철없이 자식들에게 의지하며 살아오셨다.
언니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난은 지속되었고 결국 셋째 언니도 결국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나마 넷째 언니부터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 뒤로 나 역시 고등학교에 가게 되었다. 지금처럼 등록금이 무료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하게 생각했다.
상고 졸업 후 취업을 하니 넷째 언니가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첫째 언니부터 셋째 언니도 모두 가난한 친정을 피해 서둘러 결혼한 상태라 나는 20살이 되자마자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부양해야 할 가족은 엄마, 중고등학생인 남동생 두 명이었다.
그 뒤로 10년간 가장 역할을 해왔다. 야간대학을 다니면서도 일을 놓지 못했다. 결혼한 언니들이 여유롭게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다들 상황이 좋지 못했고 어느 누구에게 기대거나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
나에게 가난은 생존(?)과 직결된 것이었고 그것은 돈에 대한 강박증으로 나타나곤 했다.
알바를 하며 야간대학을 다닐 때에는 지갑에 돈이 있어도 쓰질 못했다. 저녁을 사 먹기는커녕 100원짜리 자판기 커피도 사 먹는 걸 망설였다. 대학 내내 A장학생이었는데 1등이라는 타이틀 혹은 성취감보다 학비 면제에 더 동기가 타올랐다. 당시 학비가 130만 원 전후였는데 그 돈이면 석 달 치 아르바이트비였다.
대학 졸업 후에는 열심히 직장을 다녔다. 월급을 많이 주는 곳으로 이직을 하고 또 이직을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몇몇 사람에게 배신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월급 받아하고 싶은 것 하는 20대의 직장동료들과 나의 처지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나를 이해해 줄 거란 기대도 안 했다. 하지만 지금에야 깨닫는다. 솔직했더라면 좋았을 걸.. 그러면 그렇게 날 아껴주던 언니와 동료들이 이해해 줬을지도 모르는데, 행여 이해를 못 하더라도 적어도 배신감을 남겨주지는 않았을 텐데...
큰 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고 막내가 대학을 졸업할 즈음 나는 정말 홀가분해졌다. 그리고 내 인생을 생각하며 당시 남자친구(전남편)와 결혼을 계획할 수 있었다.
결혼할 즈음, 나의 통장은 두둑해져 있었다. 당시 작은 소형아파트를 구입할 정도의 예산이었지만 나는 산꼭대기에 있는 13평짜리 빌라 전원세를 구했다. 가진 돈이 없었던 남편은 나에게 아무 말도 못 했고 나는 통장에 있는 돈을 꺼내 쓰기 싫어 그렇게 결정을 했다.
이후 아이들을 낳고 맞벌이를 하면서 형편은 점점 나아졌다. 아파트도 구입하고 차도 바꾸고 남들 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가난했다. 옷도 거의 사 입지 않고 외식도 잘하지 않았다. 미용실을 가거나 꾸미는데도 전혀 투자하지 않았다. 내가 쓰기 시작하면 그동안 쌓아 올린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불안과 강박이 존재했던 것 같다.
시장에 장을 보고서도 버스비가 아까워 걸어 다니고 100원 200원 더 저렴한 물품 사러 온 동네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아이들 옷을 만들 입히거나 중고로 사입히고 영화관에 갈 때에도 팝콘을 사는 대신 만들어갔다. 남편 차는 좋은 걸로 바꿔주고 아이들 교육비며 외투는 좋은 걸 사줘도 내 것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건 아직도 여전히 바뀌지 않는 생활습관이다.
결혼 10년 차가 넘어가는 즈음, 아이들과 함께 장을 보러 갔다. 날이 좋아 산보 삼아 도보 15분 거리 마트로 갔는데 나올 때는 짐이 많아 걸어갈 수 없어 마을버스 타고 가자고 아이들과 남편에게 얘기했다. 그때부터 남편은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너랑 사는 거 숨 막혀. 구질구질하고 답답해."
그 눈빛을 잊을 수 없다. 버스 타는 것이 구질구질한가? 집에 아무리 좋은 차가 있어도 난 여전히 버스 타는 거 상관없고 오히려 좋아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남편에게 내 생활방식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전남편 역시 가난했다. 가난한 걸로 따지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지위가 올라가면서 지난 시간들을 잊으려 했다. 그리고 더 여유 있고 나은 사람들을 바라보고 부러워했던 것도 같다. 여유 있는 처가가 있었더라면 더 능력 있는 여자를 만났더라면 그게 너무 아쉬워 가끔 술을 거하게 마신 날이면 필터 없이 농담하듯 얘기를 하곤 했다.
하지만 나 역시 바뀌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 원하는 처가를 만들어줄 수 없고 그렇게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절약하며 살아왔기에 네가 공부할 때 도움을 줄 수 있었고, 절약하며 대출금도 갚아 당신이 원하던 차를 구입할 수 있었고, 절약하며 살아왔기에 지금처럼 지낼 수 있는데.. 당신이 벌어다 벌어다 주는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열심히 저축하고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이 나의 최선인데...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일 뿐 전남편이 보기엔 그 일련의 과정들이 답답하다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가끔 생각해 본다. 내가 여유 있는 집 딸로 태어나 사랑 듬뿍 받고 풍족하게 살았더라면 지금 다른 모습이겠지.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나 자신을 먼저 챙기고 아껴주었겠지.
하지만 일어나지 않을 일을 생각해 보아도 답은 없다. 이미 나는 지금의 나니까. 변하지 않을 거니까..
가난은 나에게 있어 불행이기도 했지만 또 하나의 선물이기도 하다.
가난했기에 포기할 수 없었던 것들이 있었다. 갓 20살이 되어 울면서 일을 배웠지만 먹고살아야 했기에 그만둘 수 없었다. 끝까지 해내야 했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대신 살아주지 못한다는 걸 어린 나이에 생존본능처럼 알아갔다.
그렇게 배운 성실과 끈기는 내 삶의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처음엔 어려워도 성실히 하다 보면 잘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고 어려운 일을 극복할수록 성장해 나간다는 것도 알았다. 웬만한 일을 겁내지 않고 시작할 용기도 얻었고 일에 대한 책임감도 생겼다.
돈을 많이 쓰지 않아도 행복해지는 법을 터득해 나갔다. 행복의 기준이 낮아 남들보다 작은 것들에 더 행복해한다. 사람들은 통창으로 보이는 바다 카페에서 비싼 브런치와 차를 마시며 행복해하지만 나는 바다에 앉아있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오션뷰에서 비싼 음식을 먹는 것보다 바닷가 산책로 계단에 걸터앉아 편의점에서 사 온 컵라면과 맥주 한 캔으로도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 굳이 비싼 곳에 가지 않아도 비싼 명품이나 옷을 걸치지 않아도 만 원짜리 티 한 장에도 행복할 수 있는 게 현재의 내 모습이다.
여전히 가난하다.
하지만 가난이 곧 불행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얻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현재 가난해서 힘들어하는 젊은 영혼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다고 다 좋을 수도 다 나쁠 수도 없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