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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벌거숭숭이 Jun 06. 2024

아주 오래된 농담

처음으로 읽은 책이 불륜내용이라면

어릴 적, 나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아주 어릴 때 읽은 전집만이 집에 있었을 뿐이다.

초등학교 때는 교과서만 읽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야 도서실이란 곳을 알게 되고 거기서 책을 골라보게 되었다.

그 당시에 책을 읽으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tv에 노출된 책들은 이미 대여중인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읽지 않은, 눈에 익은 작가의 책을 골라보게 되었다.

내가 고른 책은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이다.

중학생이 읽기에 괜찮은 책일까.

결론적으로 불륜의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내가 자발적으로 고른 책이 바로 불륜 이야기였다.

친구들에게 책 추천하면 늘 이 책을 말하곤 했는데, 불륜얘기라고 하면 다 싫다고 했다.

졸업할 때까지 이 책을 읽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렇게 잊고 살다가, 오랜만에 익숙한 제목을 보고 다시 읽게 되었다.


나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다.

라이벌 한광과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어느 날 선생님이 자신의 꿈에 대해 일어서서 한 명씩 발표를 하라고 했다.

한광이 먼저 일어나 의사가 되고 싶다는 말을 했다.

나도 의사가 되고자 했지만, 한광이 말해서 왠지 그의 말을 따라 하는 것 같아 기분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생각한 꿈은 의사밖에 없었기 때문에 의사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발표가 끝나고 쉬는 시간, 그다지 예쁘지는 않지만 눈길이 가는 여학생 현금이 다가와 자신은 의사와 결혼할 거라고 한다.

분홍빛 혀를 쏙 내밀고 사라지는 모습이 필름의 잔향이 되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그렇게 어른이 되었고, 나는 꿈에 그리던 의사가 되었다.

순탄한 삶은 아니었다.

부족함 없이 살았던 유년시절에 비해 어느 날 갑자기 가세가 기울었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사업체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심지어 아버지가 공금횡령혐의를 받고 불명예스럽게 퇴직한 것이다.

어머니는 임신상태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게 된다.

형과 나(영빈) 두 형제에서 여동생(영묘)이 하나 생긴다.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와 형에게 애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나는 사랑을 주고 싶었다.

그와는 별개로, 나는 어릴 적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던 현금을 잊지 못해 연애 자체를 시작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이를 먹고 의도치 않게 어머니 소개로 여자를 만나 무난하게 결혼을 하기에 이른다.

교사로 조건도 괜찮고, 적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가정에 애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딸이 둘이 생기니 삶이 달라진다.

애정이 샘솟고 아이들에게 잘하고 싶어 진다.

아내가 직장생활을 하기에 어머니를 모셔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지만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러던 중에 병원에서 불현듯, 현금을 만나게 된다.

어릴 적부터 속내를 숨기지 않았던 현금은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많은 사람들과 연애를 하고, 그중에서 제일 돈 많은 남자와 결혼을 했다.

능력은 없지만, 집에 돈이 많아 여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유흥을 즐기는 삶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집밥을 먹고 싶다고 말한다.

현금은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3일을 굶고 남편은 두 번 다시 현금에게 집밥이 먹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랜 결혼생활에도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현금의 철저한 피임 때문이었다.

삶에 회의감이 들무렵 이혼을 하게 된다.

이혼 후, 현금은 몸이 바쁜 일이 하고 싶어졌다.

시골에 땅을 사서 농사일을 시작하는데, 쉽지 않다.

1년을 고생하고 농사일에 학을 떼고 시골에서 나오게 된다.

운 좋게도 현금이 산 땅의 가치가 높아져 현금은 농사일에 대한 패배감보다 더 큰 부를 획득하게 된다.

풍족해진 현금에게서는 여유로움이 풍겨왔다.

조건에 맞춘 결혼, 직장생활에서의 회의감, 어머니와 부인 사이의 고부갈등에 치이던 삶에 현금은 나에게 휴식과도 같았다.

전혀 편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계속 생각나고 조바심이 나고, 또 보고 싶었다.

그런 와중에 영묘가 병원으로 찾아온다.

첫 연애의 슬픔에 울던 영묘는 금방 새로운 사랑을 찾았고, 그 사랑은 허우대가 멀쩡한 졸부의 아들이었다.

준재벌급의 건축회사라 조건이 부담스러웠지만, 영묘가 사랑하니 그러려니 했다.

부잣집에 시집을 가고도 영묘는 간간히 오빠에게 자금을 요청했다.

이상한 부잣집의 생활에 대해 생각만 하고 있던 터라 동생의 방문이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다.

동생문제가 아니라 매제(손아래 누이의 남편) 이야기였다.

시댁식구의 가족력으로 폐병이 많은데, 집안을 담당하던 주치의가 큰 병원에 가기를 추천했다는 것이다.

호흡기내과 전문의였던 오빠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폐에 물이 차서 숨쉬기 힘드니까 일단, 간단한 수술을 하고 병의 경위를 검사해 보기로 했다.

열고나니 확실히 보였다. 매제는 암이 맞았다.

그러나 시댁어른들은 매제의 병을 본인에게 알리기를 꺼렸다.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대체의학에 의존하고 있었다.

의학지식이 풍부한 전문가는 부작용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고, 대체의학으로 치료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나을 수 있다는 말을 해주는 판에 환자의 가족이 따를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영묘는 남편에게 병을 알리고 싶고, 항암치료를 받게 하고 싶었지만, 시댁어른들은 완강하다.

아들 둘은 시댁에서 보살피고, 영묘에게는 남편 간호나 하라고 한다.

가정부를 보내와 살림을 다 보살펴주고 때 되면 약을 보내고, 뜸 치료사를 보내고, 도사를 보내기도 한다.

환자는 점점 이성을 상실해 가고 옆에 있는 영묘 또한 지쳐가기 시작한다.

나는 서슬 퍼런 어머니와의 대화를 거부하고 하기 싫은 이야기를 아내에게 떠넘기고 현금을 찾아간다.

그럼에도 늘 그 여자가 그곳에 없을까 봐 불안해한다.

현금에게 영묘의 이야기를 하니, 현금은 암에 걸린 할머니가 의사진단보다 더 오래 살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아주 오래된 농담이다.


능소화 덩굴이 늘어지는 집에 살던 현금이 불현듯 생각나곤 했다.

짓궂은 계집애. 의사랑 결혼할 거랬는데, 의사보다 더 돈 많은 집에 시집을 갔다.

내가 의사가 되기도 전에.

나쁜 년이다.

그런 나쁜 년과 나쁜 짓을 하는 나는 도대체 무어인가.

작가를 모르고 읽었다면, 아주 가부장적인 남자어른이 쓴 글같이 느껴진다.

과연 중학생이 읽을만한 글이었는가.

만약 지금의 내가 중학생에게 추천할만한 글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아직은 순수함을 간직해야 할 나이이니까. 졸업 후에 읽으라고 할 것 같다.

소설을 써야한다면 알아야되는 전개방법, 글의 짜임새, 이야기를 풀어내는 속도감의 정석이 될만한 글이다.

소설 속 배경을 풀어내는 표현방식도 귀감이 된다.

인생을 살다보면 으레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들이 있다.

나이가 어느 정도 차면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

가족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

내 아이들에게만큼은 부족함 없이 해주는 부모가 되는 것.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사는 것.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현금을 제외하고는 모든 자식들이 부모가 원하는 삶을 산다.

주인공인 영빈 또한 어머니가 원하는 의사로, 버티고 버텨 대학병원에 자리하고 있는 삶.

조건에 맞는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

유복자로 태어난 동생에게 든든한 백이 되어 주는 것.

영묘와 결혼한 매제 또한 어른들이 하는 말을 잘 들었다.

가업을 이어받는 것보다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 아들을 2층에서 던져버린 아버지의 행동에 굴복해 가업을 물려받고, 자신의 병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묻지도 않고 그저 어른들이 원하는 대답만 해주고 체념한 삶을 사는 매제의 모습이 그러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알 수가 없다.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어떨 때는 이 사람이 옳고, 다른 쪽에서 보면 저 사람이 옳다.

당신의 선행이 나에게는 악행이 될 수도 있고, 나의 최선이 당신에게는 최악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는 다 빛을 보게 된다.

답이 없는 형에게 계속해서 지금의 상황을 알렸던 나의 노력.

부조리하다고 느껴질 때는 때론 자신을 굽혀가며 시할머니에게 부탁했던 영묘의 노력.

갖은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오빠를 보채지 않았던 동생의 노력.

자신이 가진 화에 대하여 절대 집에서 배출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노력.


누구나 마음 한 구석에 자신만의 방이 있을 것이다.

그게 어릴 적 친구들과 만들었던 추억 한 자락일 수도 있고, 사랑했던 이와의 한 순간일 수도 있다.

영빈에게 있어서 그의 삶을 살게 했던 것은 아주 오래된 농담 하나였다.

의사랑 결혼하겠다던 현금의 진한 농, 분홍빛 혀. 나쁜 계집애

그 나쁜 계집애는 어른이 되어 나를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들었다.

속내를 숨기지 않은 능소화 같은 그리움을 닮은 현금

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 안식을 얻은 나는 분명 잘못을 했지만, 이 책에서는 벌을 받지 않았다.

다만 잘못을 깨달은 현금에 의해 관계정리가 됐을 뿐이다.

나보다 6살 어린 부인의 당당함과 10살은 어려 보이지만 나와 동갑인 현금은 여전히 철이 없지만, 나보다는 더 성장해 있었다.

나쁜 계집애는 현금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서로에 대한 기대를 진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비록 작가는 작고하였지만, 그다음이 궁금해지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됐을까.

다시는 현금이를 만날 수 없었을까? 혹은 부인에게 용서를 구했을까.

책은 덮었지만, 내 머릿속에는 그다음이 그려지는 책이다.

아주 오래된 농담.

당신에게도 가볍게 던질 수 있는 짙은 농담이 있으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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