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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벌거숭숭이 Jun 25. 2024

그냥 아는 여자가 특별해지는 순간

나는 처음부터 너를 사랑했다

나에게도 시절인연이 있다.

나의 학창 시절을 빛나게 해 준 친구.

공부도 잘하고 학우들에게 사랑받는 친구였다.

중학교 2학년때부터 고등학교까지 쭈욱 함께했다.

단 한 번 옆자리에 앉은 후부터 학교에서도, 방과 후에도, 주말에도 만나 노는 것이 좋았다.

그 친구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 좋아했다.

책을 보고, 영화를 보고, 좋아하는 것을 찾아다니는 것.

휴대폰 저장이름을 [아는 여자]라고 해달라던 친구.

여유가 넘치는 특별한 아이였다.

지금은 만남도, 연락도 하지 않는 친구지만 이 영화를 보면 저절로 떠오르는 이름.

아는 여자


메타세콰이아가 곧게 서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아침부터 그녀와의 약속에 설렜지만, 헤어짐을 선물 받았다.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리고 예정된 병원에 도착해 검진 결과를 듣는다.

흑과 백. 이러면 안 되는 내 몸의 상태.

내년이 없는 삶을 예고받았다.

야구팀에서 활동하는 동치성의 포지션은 외야수다.

투수로서의 실력이 뛰어나지만, 늘 사랑으로 인해 결정적인 순간에 큰 실수로 2군으로 밀려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사랑을 하고 싶어 했다.

친한 형이 운영하는 Pub에서 술을 마신다.

술을 먹다가 눈을 떠보니 숙소의 침대 위다.

Pub에서 일하는 여성이 바로 앞에 있다.

어떻게 자기를 데려왔냐고 물으니 고이 접어서 봉투에 담아왔다고 한다.

웃기는 여자다.

오늘에서야 깨닫는다.

남들에게는 있는, 나에게 없는 3가지.

내년과 첫사랑, 그리고 주사.

내년이 없는 삶은 허무하다.

집을 담보로 대출받아 돈을 쓰고 싶을 때 그냥 쓴다.

집을 털러 들어온 도둑의 슬픈 사연을 듣고 돈다발을 건넬 만큼 허무하다.

Pub에서 일하던 여자가 집엘 찾아온다.

알고 보니 내가 사는 집에서 39걸음 걸리는 곳에 사는 사람이었다.

처음 보았지만, 자신의 사랑을 숨기지 않는다.

필기공주로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여자는 라디오에 자신과의 이야기를 사연으로 보낸다.

당첨 선물로 받은 휴대폰을 나에게 건네고,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다.

영화관에서 만난 전여자 친구.

그녀와의 사이를 묻는 전여자 친구에게 "아는 여자"라고 말한다.

뚱한 표정의 그녀가 나에게 묻는다.

"아는 여자 많아요?"

"아니요. 그쪽이 처음이에요."

그녀의 얼굴이 환해진다.

그렇게 그녀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영화의 장르는 로맨스이지만, 장진감독 특유의 유머가 눈에 띈다.

정재영 배우과 장진 감독의 앙상블을 참 좋아한다.

헤어짐을 고하는 연인에게 화를 내고 나의 밑바닥을 보여주고 싶지만, 상상일 뿐이다.

환자의 사진을 보고 죽을병에 걸렸다는 말보다는 이러면 안 되는데.

말 줄임표가 느껴지는 말에 할 말을 잃는다.

그렇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순간이 인생에 늘 존재한다.

동치성의 인생이 그러했다.

야구 시합 중에는 경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런데 왜 하필 그 순간.

9회전 마지막 순간.

외야수는 날아오는 공을 잡기만 하면 되었다.

왜 그 자리. 그곳에서 남자는 헤어짐을 고했고, 여자는 같이 죽자며 사랑을 이야기했는지.

사랑은 도대체 무엇이길래.

상대방을 애틋해하고 그리워하는 마음.

상대방을 아끼고 위하며 소중히 어기는 마음.

어떤 대상을 매우 좋아해서 아끼고 즐기는 마음.

사랑은 사람에게도, 동물에게도, 물건에게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 되었든 내 삶에 활력소가 되고 행복하게 해주는 존재인 것이다.

나에게 사랑은 오래도록 곁에 있어주는 것이다.

동치성의 곁에는 여러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아는 여자만은 늘 옆에 있었다.

이사 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오래도록 좋아하면 처음 좋아한 이유마저 잊게 만든다.

정말 그렇다.

어릴 때 내가 좋아했던 것들.

아이돌 앨범, 휴대폰, 수첩, 필기구, 가방, 책들.

처음에는 좋아하는 이유가 분명했는데, 지금 좋아하는 이유를 물으면 잘 모르겠다.

그냥 나에게 익숙한 것들이다.

그러나 내 주변에 항상 존재하는 나의 사랑이다.

사랑도 시절인연.

만나고 설레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그리고 또다시 다른 사랑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볼을 던지는 동치성과 늘 그의 곁을 지켜주는 아는 여자는 꽤 잘 어울렸다.

상처받아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영화다.

1997년작.

힘든 시절에도 좋은 영화는 만들어지고 있었다.

아련했던 나의 시절인연이 떠오르는 순간.

너의 건강한 안녕을 바랄게.

그렇지만 내가 더 좋은 사랑을 할 거야.

나는 너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곁을 오래오래 지키는 사랑을 위하여.

그래서, 당신의 사랑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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