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코너에서 서성거린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제목의 책을 잡았다.
작별하지 않는다.
서로 안녕하고 헤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너와 나의 일인지, 과거로부터의 나 자신인지, 끊어낼 수 없는 천륜을 다룬 이야기인지.
제목을 보자마자 책 안의 내용이 그려졌다.
책의 서론은 스스로를 고립시킨 나로부터 시작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책임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진 순간.
돌봄이라는 행위를 포기한다.
이제껏 나는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낸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책임져야 하고 돌봐야 할 존재가 사라져 버렸다.
쓰던 글은 계속 썼지만, 그 이상의 것은 하지 않는다.
그러다 나를 정리하고 싶어졌다.
나의 짐들을 정리하고 시간이 흐른 후에 나를 보게 될 어떤 이를 위한 글을 적기 시작한다.
고장 난 에어컨과 함께하는 한여름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렇게 글을 썼다 읽고 지우고 또 쓰기를 반복한다.
집을 정리하며 이제는 쓰지 않는 것들을 모아 버리기 위해 집을 나선다.
그리고 죽집에 가서 죽을 사 먹는다.
시원한 죽집이 그렇게 나의 산소호흡기가 된다.
그러던 중 친구 인선에게서 연락이 온다.
병원으로 와 달라는 문자.
지금의 나는 누군가를 위로해 줄 처지가 되지 못하지만, 왠지 인선에게서 온 연락이라면 반드시 중요한 일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렇게 병원 위치를 묻고 곧장 그녀를 만나러 간다.
나는 기획하고 연출하는 작가로, 그녀는 촬영기사로 일하다가 만난 사이다.
동갑이고, 같이 일을 하면서 서서히 그녀와 가까워졌다.
특히 나보다 어른스러운 그녀가 하는 말에 당연히 수긍하는 나 자신을 느끼면서 서서히 친분을 쌓아갔다.
서늘한 거리감을 늘 유지하면서.
인선은 촬영기사로 일하면서 틈틈이 자신의 영화를 만들었다.
평단의 좋은 평가를 받으며 기대받는 감독이 되었지만, 3번째 영화를 만들고 불현듯 그녀는 고향인 제주도로 돌아가 취미로 하던 목공에 열을 올리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단단한 목재를 다듬고 만드는 과정을 거치다가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손가락이 잘렸다고 한다.
떨어진 손가락을 봉합하는 수술을 무사히 잘 받았지만, 경과가 중요하다.
손가락 신경을 계속 살리기 위해 3분에 한 번씩 바늘로 찔러 피를 내야만 한다.
그래야 신경이 죽지 않고 손가락을 쓸 수 있다고 한다.
굉장히 아플 텐데도 움찔거리기만 하고 아픔을 조용히 삼키는 인선이 부탁을 한다.
집에 있는 새에게 먹이를 달라고.
나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 스스로를 버리려고 했는데, 이제는 누군가의 부탁으로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한 여행을 가게 된 것이다.
엄청난 폭설로 겨우 마지막 비행기에 탑승해 제주도로 향한다.
택시도 잡히지 않아 일단 제주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고 그곳에서 다시 환승을 해서 인선의 집으로 가야 한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몇 번이고 돌아가려고 생각하지만, 인선과의 대화가 떠오르고, 인선의 제주도 집과 어머니와 새들의 이야기를 반추하고, 그들과의 만남을 다시 상기시킨다.
그렇게 오지 않는 버스를 꾸역꾸역 기다려 결국 버스를 타고 험난한 길을 지나 결국 그녀의 집에 당도한다.
사고 당시 그대로 방치된 집은 마치 나를 기다리는 것처럼 환히 불을 켜놓고 문을 활짝 열고 있었다.
문을 닫으면서 들어간 집안은 사고당시의 상황이 고스란히 보이는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새를 보러 갔다.
온기가 식어가는 새를 조심스레 안아 본다.
무게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아주 작은 새가 결국 죽었다.
새를 살리려고 여기까지 왔지만, 새는 이미 죽어있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새를 담기 위한 통을 찾고 꽁꽁 언 땅을 삽으로 파서 묻어준다.
폭설이 내리는 제주의 집.
밝았던 집이 어두워진다. 정전이 일어난 것이다.
제주 시내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인선의 집은 복구되는데 오래 걸릴 것이다.
가만히 앉아있으니, 누군가 집 문 앞에 선다.
인선이 돌아온 것이다.
인선이가 죽었나, 내가 죽었나.
이제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인선이 나에게 말을 건넨다.
따뜻한 차를 권한다.
이 온기. 꿈일리가 없다.
그리고 인선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모든 이야기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어떤 새로운 이야기라도 사람은 자신이 가진 기초지식을 바탕으로 작가가 쓴 글의 그림을 그려가면서 이해한다.
이 책의 배경은 제주 4.3 사건이 주된 배경이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이다.
남과 북으로 나뉘어 전쟁을 했고, 우리들 스스로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 의지하여 휴전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고 있고, 북한은 잊을만하면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최근에 북에서 날아온 오물풍선 투석사건이 가장 가까운 예이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둘로 나뉘었을까.
사상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생각을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
전쟁상태에서 나라 안은 어수선했다.
나의 힘을 공고히 하기 위해선 나의 힘을 자랑해야 하고, 나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어야 한다.
그것의 표적이 된 단체가 있다.
바로 서북청년단.
이 실험적 정책을 어디에서 시행해 볼까. 사람들의 접촉이 힘든 섬이 좋겠다.
그렇게 제주도민들이 표적이 되었다.
전쟁 후의 삶은 팍팍하다.
먹고사는데 급급하다. 전쟁은 위정자들의 것이다.
당장 배가 고픈데 무슨 방법이 있으랴.
서명 한 번만 해주면 밥이 나오는데, 옆집에 누구도 했다더라.
그렇게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젊은 남자들은 무조건 잡아간다더라, 지금 군대에 가면 살아 돌아올지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자식이 많아도 모두가 다 소중하다.
어수선한 상황에 아들을 산으로 피신 보내고 딸들을 친척집에 심부름을 보낸 어느 날.
총검을 찬 사람들이 찾아와 가솔들을 집안에서 끌어낸다.
한 곳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른다.
극적으로 살아난 사람들은 혹여라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까.
끝까지 추적하고 기원하고 실천한다.
가족의 이야기를 해도 잡혀가던 무서운 시절이 있었다.
아마도 그러한 연유로 인해 엄마는 자신의 이야기를 꽁꽁 숨겨둔 채 살지 않았을까.
치매에 걸린 엄마는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저 묵묵히 주어진 하루를 살아낸 사람의 삶이 그렇게 기구할 수가 없었다.
인선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인지하고 사실을 알리기 위한 영화를 제작한다.
피해자들은 살아있지만, 그 수는 점점 줄어간다.
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책임을 져야 하는 인간들이 좋아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회피하면 잊힌다는 그들의 생각을 무너뜨려야 한다.
진실은 규명되어야 하고 업보는 반드시 당사자에게 그대로, 혹은 그 이상으로 되돌아간다.
상대방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은 힘들다.
손가락을 잃을 위험에 처한 인선이보다, 당장 폭설의 중심에 있는 경하 자신이 더 불쌍하다는 생각을 한다.
누구나가 그러할 것이다.
그래도 경하는 포기하지 않고 인선의 집을 찾아 새의 자취를 정리해 주었다.
제주도 집에서의 일은 인선의 꿈인지, 경하의 꿈인지. 누구의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
작가의 희망인지, 독자의 희망인지.
둘이서 이야기했던 작품을 만드는 결말을 나 혼자 그려보았다.
백 그루가 넘는 나무를 다듬고 검게 칠하여 경하의 꿈을 실현하는 것.
엄마의 꿈은 이루어주지 못했지만, 친구의 꿈은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까.
어딘가에 꿈을 향해 나아가는 또 다른 인선이 있을 것이고, 삶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직면한 또 다른 경하가 있을 수도 있다.
지금은 만나지 않은 당신의 친구를 위해.
오늘을 빛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작별하지 않는다.
너로부터, 나에게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