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에게 증거를 요구하지 말 것
2021.01.11 말씀묵상
[요4: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갈릴리에 와서 예수님은 탄식한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하시길,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라는 말 처럼. 사마리아인들은 그분의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믿은 반면,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서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현실에 탄식하며 하시는 말씀이 이것이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는구나. 더나아가, 그렇게 믿은 믿음이라는 것이 과연 진실한 믿음일까 라고 질문할수도 있을 듯하다.
과거에는 하나님을 만났다는 신기한 경험을 한 사람들의 간증이 부러웠다. 그리고 나는 왜 하나님이 안만나주실까 생각했다. 사람은 자기가 직접보고 경험해보기 전까지 제대로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기가 경험한 데 까지만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철저히 자기 세계안에 함몰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기 전까지 나는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이라서 이 규모있는 신념덩어리를 채 부정하지는 못한채 그저 착하게 교회를 다녔던 것 같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렇게 ‘어쩔수없이’ 교회를 다니는 상태의 자신을 자조섞인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으면서 나는 이렇게 교회를 다니는구나. 예배를 드리는 구나. 내가 과연 하나님을 정말 믿고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마음속에서는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의심이 자라났고, 영원히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지 못한채로, 그렇게 기독교적인 문화를 경험하는 정도로 삶이 끝나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그건 내 착각이었다. 나는 곧 나의 기도한대로 하나님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었다. 뜨거운 사랑을 경험했고,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 부를만한, 그런 변화가 내 인생에 찾아온 것이었다. 사람은 참 간사해서, 그런 경험조차 이제는 이미 맛 본것이라 여기고 익숙해지고 별것 아니라고 여기게 된다. 이것이 선지자가 고향에서 인정받기 어려운 이유 아닌가.
익숙한 것들을 그냥 지나쳐흘려보내버리고 끝없이 욕망에 갉아먹히는지도 모르는 채 사는 인생말이다. 마치 내가 책을 썼다는 감격도 한겹지나고나서 그것을 감사한지도 금방 까먹는 것처럼. 다 옛얘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까, 어린아이의 신앙을 하나님은 어여쁘게 보신다는 걸 깨닫는다. 왜 천국은 어린아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어떤 논리로. 보지못하고 믿는자는 복이 크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이 그냥 무작정 믿는다 고백하는 어떤 껍데기뿐인 신앙이 아니라. 보지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말씀을 진짜로 믿어버리는 어린아이들의 순수함과 겸손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다면, 나는 그때의 보지못한 채로 믿는 나의 신앙을 그렇게 비하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고있다는 것 자체가 그 순수한 믿음이라는 것에 대한 셀프모니터링이 가능하다는 소리이니까. 불가능한 전제에 의한 불가능한 결론이다.
나이가 먹을수록 죄만 더 쌓인다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미 증거되었다. 그런데 왜 나의 삶은 계속해서 구주 예수님께 증거를 요구할까. 예수님은 나를 소중하게 여기시는데 나는 왜 자꾸 나를 망가뜨릴까. 나는 왜 자꾸 스스로를 믿지 못할까.
죄 많은 인생의 하루, 계속해서 스스로를 갉아먹는 듯 하다. 하나님은 바로 내앞에 계신데, 죄에 눈이 가리워져서 그것을 보지 못한다. 회개한다. 자꾸만 눈을 높여 나에게 나타나라는 말을 하는 나의 교만을. 예수님의 말씀을 그저 믿고 순종하는 과업만이 나의 앞에 있음을. 깨닫는다. 나의 부족함을 이미 누구보다 많이 알고계시니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길 바란다. 그렇게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