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열심히 살기는 했는데 살림을 엄청 잘한 것 같지는 않고, 성인이 된 아이들이지만 걱정거리는 여전히 끊이지 않고, 남편에게는 불만이 쌓이고, 경력단절은 이미 오래전 일이고, 노후대책도 마련돼 있지 않은 현실까지, 뭐 하나 맘에 드는 것 없이 점점 억울한 감정만 쌓였다.
심지어 어느 날 저녁,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그만할 말을 잃어버렸다.
“뉘신지….?”
최근 들어 나의 이런 상태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모조리 갱년기 증상으로 치부되어 억울하기도 했지만, 사실 이해를 받고 대충 넘어가는 날도 있어 나름 편리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몇 달 동안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우울했고 이런 감정에 빠져있는 것에 대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녀를 만난 날도 그런 우울한 날들 중 하루였다.
그녀는 1년간 준비해 오던 자격증시험에 합격해 새로운 일을 막 시작하던 중이었고, 나는 마침 몇 가지 서류일로 그녀의 조언이 필요했다.
같이 서류를 검토하고 있자니 그렇잖아도 무능해 보이는 나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던 시기여서인지 눈에 보이는 성과를 이뤄낸 그녀가 부럽기만 했다.
우리는 서류일을 끝내고 브런치를 먹으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는 최근 플랜테리어에 관심이 생겼고 집안에 식물을 하나둘씩 늘려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나보고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을 했다.
“손재주는 무슨…. 제 주변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나마 식물 키우는 것이 내 뜻대로 되는 것 같아서…”
그만 나의 속내가 흘러나와 버렸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아이도 남편도 내 상황도… 어쨌든 주변은 바뀌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엔 내가 뭔가를 보여주면 주변에서 영향을 받거나 나를 인정해 주지 않을까? 아니면 잠시 힘든 현실을 잊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여러 가지 생각에 공부를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게 되고 처음에 들었던 생각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어요. 그렇잖아도 이번 생일엔 나한테 특별한 것을 해주고 싶었는데…이 자격증이 선물이 되었네요.”
그녀는 생일 즈음 합격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작년에 있었던 여러 차례 모임들이 떠올랐다.
사실 모임이 있을 때마다 뒤늦게 나타나고, 일찌감치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못마땅해했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즈음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와 만난 이후,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나도 그녀처럼 문제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주체가 된다면 다른 사람이나 혹은 환경에 책임을 전과하는 일은 없어지지 않을까?
그동안 나를 괴롭혀 왔던 수많은 생각들이 사실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녀처럼 자격증 따기는 아닐 것 같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막연하지만 매우 긍정적인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지금 뭔가 대단한 인생의 비밀을 알아차려서 긍정적인 기분이 든 것은 아니다.
다만, 나만의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 덕에 내 마음상태가 바닥을 치고 곧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이렇게 내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오랜 기간 동안 계속해서 어르고 달래는 과정인 것 같다.
나만의 답을 찾을 동안,
급한 대로 화장실 거울 앞에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어르고 달래기 위해!) 안티 에이징 화장품 몇 가지를 사러 쇼핑몰에 들리기로 했다.
노화로 인한 신체변화가 나의 정신세계를 쉽게 잠식할 만큼의 위력은 없다고 장담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도 모르는 새, 그것에 제압당해 마음이 더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새 화장품을 좀 바르고, 깊은 우물에 퐁당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를 구해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