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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예나 Apr 01. 2020

"디지털 세계는 여성에게도 친절했는가."

디지털 문명에 사람들은 모두 신 자유 시대가 왔다고 찬양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3학년, 남자아이들은 여자애들에게 ‘보지’를 아냐며 낄낄거렸다. 아는 그들의 말을 알아들으면서도 알아듣지 못한 척 딴청을 피웠다.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알았을지는 알고 있었다. 


21세기는 디지털의 발달로 정보화 시대에 이르렀다. ‘디지털 digtal'이란 손가락을 뜻하는 라틴어 낱말인 ‘digit’에서 기원된 말이다. 원래 숫자를 뜻하는 단어로 쓰였으나. 현재에는 특정한 단위(파장)를 가진 이산적(연속적) 수치를 처리하는 방법을 말한다. 쉽게 말해 디지털이란, on(0)과 off(1)로 이루어진 (이산적) 연속적인 전자적 신호뿐만 아니라 이를 2진법 숫자로 처리하고 출력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과정을 통해 컴퓨터 또는 핸드폰의 화면에는 디지털 데이터인 '이미지와 영상 텍스트'등이 출력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러한 신호 값을 송수신하고 변환하는 기기를 디지털 기기라고 칭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 전화기, 티브이 같은 기기들이 모두 디지털 기기이며, 디지털을 통해 그러한 데이터를 송수신한다. 디지털은 곧 정보의 형태와 전달 방식 그 자체를 이르는 말이다. 


이러한 '디지털'의 발명은 사회 문화적으로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우선 현대 광랜을(빛을 이용한 정보통신망 선) 통해 빛의 속도로 이동되는 디지털 정보는 전 세계의 각국의 거리를 좁혀놓았다. 우리가 디지털 기기를 사용할 수 없었던 가까운 과거로 돌아가 우리나라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르헨티나의 소식을 알아내려고 했다면, 아마 최소한 보름 정도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아르헨티나의 오늘 날짜의 신문과 현재의 날씨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디지털 세계를 접해온 아이들은 공간과 시간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 광활한 디지털 정보의 공간 ‘사이버스페이스’의 주민으로서 자라오며. 자연스럽게 다양한 정보를 한꺼번에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또한 그들은 인터넷 속에서 주도적으로 정보를 생산하고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주체적인 발화자의 역할에 익숙해진다. 미국의 교육학자인 마크 프렌스 키 Marc Prensky는 이러한 디지털 패러다임 속에서 생장한 사람은 디지털 언어와 장비를 마치 특정 언어의 원어민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한다는 의미로 디지털 네이티브라 명명하였으며. 성인이 되어 디지털 패러다임에 편승하게 된 세대는 이전 세대의 흔적이 남아있다 하여 디지털 이주민이라 명명하여 그 차이를 두었다. 


1997년도는 컴퓨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해였다. 어쩌면 디지털 세대의 서막을 알리는 해였을 수도 있지만 디지털 성폭력 사건이 사회에 떠들썩해지기 시작한 때이다.  1997년 청소년들이 찍은 촬영물이 사회에 알려지며 큰 물의가 빚어졌다. 1997년 07월 23일의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김홍수 기자) 2학년의 남고등학생은 집에 캠코더를 설치하고 기다린 뒤 중학생(여) 1년생에게 “바로 지우겠다”는 말로 거듭 졸라 촬영에 이르게 하였다. 하지만 남고등학생은 지우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영상을 세운상가에 불법적으로 판매되었다. 이 사건 속에 중학생은 사건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영상에 등장되었던 사실을 ‘문란한 일탈로’ 바라본 검경에 의하여 ‘음란물 제작 죄’ 가해 학생과 함께 처벌했다. 이후 주변인의 증언에 의해 그녀는 남자 선배에게 성폭력 또는 구타를 당한 정황이 있음이 알려졌으며. 성폭력 사실도 알려졌지만. 그 이후로도 언론은 집요하게 피해 학생의 행적을 쫓으며 그녀의 대한 사회적 가해는 계속되었다. 


그렇게 사회가 떠들썩했던 그때 나는 세상에 태어났다. 


어렴풋 생각나는 나의 기억의 시작은 컴퓨터와 함께한다. 지금처럼 얇은 화면의 컴퓨터는 아니다. 지금은 유물처럼 기억되는 뚱뚱한 모니터에 하늘색 배경 마이크로소프트의 Windows 98 SE. 2018년 6월 18일을 기준으로 20주년을 맞이했다는 나와 비슷한 연배의 그 프로그램은. 인터넷 개막했다는 2000년도에 가정용 컴퓨터를 책임지던 안방 (OS) 운영체체였다. 


7살이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컴퓨터는 요술 박스였다. 우리 집에서 컴퓨터는 항상 부모님과 초등학교를 다니는 오빠의 차지었다. 부모님은 컴퓨터를 들여놓고 ‘공부용으로 써야 한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지만. 오빠는 항상 부모님 몰래 컴퓨터로 게임을 했고. 오락실 게임이나 CD게임을 다운로드하여 플레이하던 그는 2인용 게임을 할 때마다 나를 옆에 앉혔다. 주로 ‘킹 오브 파이터즈’나 ‘드래곤볼’ 같은 격투 게임, 혹은 포켓몬스터 같은 게임이었다. 나는 오빠가 게임을 다운로드하는 것이 신기해 따라 해 보겠다고 컴퓨터에 접속해 이것저것 눌러보다 그만 바이러스에 걸려 크게 혼이 났다. 아마 된통 혼이 난 이후로는 한동안 컴퓨터 근처에도 가지 못했던 것 같다. 


 2000년 8월 배포된 교육부의 제7차 교육과정인 초. 중등 정보통신기술 활용 교육 운영지침이 초등 교육에 반영되며. 학교 안에서는 컴퓨터 교육을 진행했다. 부모님은 그런 교육 변화에 따라 나를 컴퓨터 교실로 보냈고, 초등학교 1학년부터‘한글’ 프로그램에 대한 사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러한 동향은 학교 수업에도 그대로 나타났는데, 학교에서 요구하는 숙제 또한 직접 노트나 종이에 작성해 제출하는 게 아닌 ‘한글’ 작업을 통해 선생님께 이메일을 보내는 일도 있었다. 유년기부터 오빠와 어울려 놀던 어린 기억 때문인지 또래 여자 아이보다는 남자아이와 친했던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내내 게임에 푹 빠져 살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PC방을 다니며 또래 아이들과 게임 대결을 하기도 했다. 싸이월드가 나오기 까지, 버디버디 또한 나의 생활의 일부였다. 


 부모님은 오빠와 함께 컴퓨터 게임에 빠진 나를 보며 ‘여자’ 아이가 왜 이리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며 혼을 내셨다. 특히나 격투를 하고, 싸우는 시스템을 가진 컴퓨터 게임은 ‘여자아이들’이 아닌 ‘남자아이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로봇을 가지고 놀던 남자아이들이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지만. 여자인 내가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는 일은 부자연스럽게 비친 모양이었다. 실제로 또래의 동성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컴퓨터 관련의 이야기를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나는 조금은 특이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것이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이 왜 ‘보지’‘야동’이라는 말을 지껄이며 낄낄거리는지 명확히 알 수 있는 이유기도 했다. 


당시 2006년도에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쉽게 소위 야동이라고 불리는 ‘야한 동영상’을 볼 수 있었다. 인터넷에 마냥 떠돌아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찾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버디버디에서도 천체 쪽지로 그런 사이트들이 공유됬다. 아동 성착취 영상을 올려놓은 홈페이지도 있었다. 또한 게임을 다운로드하기 위해 ‘프루나’와 같은 사이트에 들어가면 ‘국산’이라고 불리는 유출 영상들과, 연예인 유출 영상이 존재했고.  나는 나의 오빠가 그러한 영상을 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빠가 직접 ‘내가 이런 영상을 본다!’ 고 하진 않았더라도 같이 컴퓨터를 공유하고 게임을 공유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정보였다. 사실은 나는 당시 그 영상을 본 적도 있었다. 호기심에 열어본 파일 속에는 여성과 남성이 몸을 섞고 있었다. 영상에 제목에는 이따금‘걸레’라는 말이 함께했다. 


 여성을 비난할 때 ‘걸레’라는 말을 쓰는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있었다. 


커뮤니티나 뉴스 기사에서 여성 연예인들을 비하할 때 그들은 ‘걸레’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아이들은 그것을 빠르게 흡수했고. 여자아이들에게 장난 삼아 ‘너 걸레니?’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그것이 경멸의 의미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이상하다. 의미를 모르고 툭툭 내뱉는 아이도 있었다. 나도 뜻과 의미를 모르고 걸레라는 말을 부정과 경멸의 의미로 사용하다가. ‘걸레’라는 단어의 뜻이 궁금해 인터넷에 검색했다. ‘걸레’는 아무에게나 몸을 내어주는 사람, 아니 여자였다. 여자 애들은 ‘걸레’의 의미를 알고 난 후로부터 ‘걸레’가 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야 했다. ‘걸레’라는 낙인이 찍히면 자연스럽게 ‘따돌림’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터넷 세상은 녹록지 않다. 여학생들이 많이 이용했던 버디버디뿐만 아니라 크레이지 아케이드 알투비트와 같은 게임에는 성적 호기심을 가진 어린아이들을 노리기 위한 채팅이 수도 없이 올라왔다. ‘변태녀 구해요’ ‘변태초딩녀구해요’ ‘야한거 궁금한 여자 구해요’ ‘여자 친구 구해요’ 모든 이들이 그냥 지나치진 않았을 것이다. 그중 여자 친구를 구한다는 게시글에 호기심을 가지고 말을 걸어본 적이 있다.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던 나에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이제부터 연애를 하자고 말했다. 연애에 대하여 잘 모르던 나는 그렇게 첫(?) 연애를 시작했다.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던 그는 계속해서 사진을 찍어 달라며 요청했다. 어릴 때부터 오빠를 통해 간접적으로 ‘한국의 비틀어진 성착취 산업’을 알게 된 나는 나의 신체 사진이 어떻게 쓰일 것이라고 그때부터 어렴풋히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강력하게 거부했고 그는 그렇게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을 몰랐던 아이들도 그렇게 거부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내가 여자라는 것을 알면 또는 여자라는 것을 알고 접근해 몸 사진이나 웹캠을 통한 ‘영상 통화’를 요구하곤 했다. 한 번은 ‘언니’라고 주장하는 한 사람이 나에게 서로 몸 사진을 교환하자고 요청했다. 나는 모니터 너머의 그 사람이 진짜 ‘언니’인지 혹은 중년의 남성인지 알 수 없었지만. 단지 자신이 ‘여자’라고 주장하는 그 말에 사진을 ‘교환’하자는 말에 진심으로 혹했을 때가 있었다. 신체의 변화가 일어났던 초등학교 5학년 시절 나의 신체의 변화를 타인에게 확인받고 싶었던 감정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사진을 교환하는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연예계에서 웹캠 유출 사건이 터지고 사람들은 그녀를 맹렬히 비난했다. 나는 그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정신이 아찔해졌다. 사람들은 욕설을 하면서도 너도나도 그 영상을 다운로드하여보고자 했다. 아마 내가 그때 인터넷의 사람들의 유혹에 넘어갔다면. 나도 그녀와 같이 걸레 낙인을 두려워해야만 했을 것이다. 


나는 그 사건을 보면서 내가 ‘야동’이 될지도 모른다는 현실을 두려워해야만 했다. 


 초등학교에서 중학생으로 넘어가는 무렵 알게 된 사이트가 소라넷이었다. ‘대략 10년 전 2009년 무렵의 나는 지나가는 말로 ‘소라넷’이라는 사이트가 있는데. 그 사이트에는 변태적인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듣고 그 사이트를 접속해보았다. 그때가 처음 소라넷이라는 사이트를 접한 때였다, 그때의 소라넷도 폐쇄되기 직전의 소라넷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시절의 나는 6년 후의 내가 소라넷 폐쇄 운동을 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 시절 나에게 소라넷을 포함한 ’ 야동‘이란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아이들은 말만 하지 않을 따름이지 거의 ’ 야동‘을 본 적이 있었다. 남자애들은 낄낄거리며 야동의 관련된 이야기를 했으며 초등학교 5학년 여학생들도 너 혹시 ’ 야동‘ 본 적 있니? 친한 친구 사이끼리 물어보기도 했다. 아이들은 ’ 야동‘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미성년자가 감히 누려선 안 되는 어른들의 문화였을 뿐이다. 학교에서는 그저 ’ 어른들‘은 저런 것을 보는 구나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중학생 때는 남학생 여학생이 때로 몰려 학급 컴퓨터로 ’ 야동‘을 틀어놓기도 했다. 


2010년도부터 상용화되기 시작한 스마트폰의 물결과 함께 아이들은 ’ 야동 사이트‘의 이름만 알면 손쉽게 영상물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또래 아이들과 집에 모여 놀다가 한 번은 같이 문제의 사이트에 접속해보기도 했다. 호기심이 많은 여자아이들은 소위 ’ 야동‘이라고 불리는 남자아이들의 그것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 함께 영상을 시청하기도 했다. “나는 일본 영상은 좀 과장된 거 같고, 서양 영상은 좀 역겨워 역시 한국인이라서 그런가? 한국 영상이 자연스럽고 볼만한 거 같아.” 아이들은 대수롭지 않게 그렇게 말했다. 한국은 포르노가 불법이라며 투덜거리던 아이들은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말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건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른들은  '야동'을  봐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말보다는 어른이 되어서 보라는 말을 더 많이 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포르노가 1990년도 극장에서 상영되던 애로 영화일지는 몰라도, 그들은 학생들이 ’ 야동‘을 접하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다. 그때 당시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 교내 집단 강간 사건‘들이 그것에 일조했는 언론의 말에. 어른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이 (야동) 포르노에 중독되면 현실과 환상을 구분할 수 없어서 성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어른이 돼서 보거라” 아이들을 어르는 어른들의 말에 아이들은 “우리도 현실과 야동을 충분히 구분할 수 있어요!”라고 뾰족하게 대답했다. 나는 아이들의 의견에 전부 동의하지는 못해도, 현실과 포르노를 구분할 줄 모를 정도로 내가 멍청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 성욕에 약한‘(성교육 교과서에 따르면) 남자아이들이 그런다면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의 대한 생각이 무너진 것은, 2015년도였다. 처음엔 ’ 술 취한 여성‘을 강간한 뒤 실제로 후기를 올린다는 소문에 이를 조사하기 위해 소라넷에 들어갔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술 취한 여성을 상품처럼 내걸었으며. 그들끼리의 범죄의 장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에 이를 부득부득 갈던 나는 문득 ’ 00 대학교 00녀‘라는 제목의 영상을 보고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흐릿한 화질 숨겨진 듯한 카메라. 


 사람들은 댓글로 ’저 여성의 인생이 끝났다며 낄낄거렸다 ‘


 나는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었다. 여태까지 지나쳐 왔던 영상들은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거지? 아니 사실 나는 그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무의식에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왜 우리는 아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지? 왜 문제라는 것 알아챈 그때도 나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사람들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지도 알지 못한 채 혼란을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우리에겐 언어가 없었다. 그들이 누군가의 인생을 참혹하게 유린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 야동‘이라고, 아니면 ’차마 ‘야동’이라고 부르지 못해 ‘그것’이라고 말해왔던 것이었다. 


 이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심신 미약의 여성을 강간하는 영상물은 ‘골뱅이’언제나 뉴스 옆에 붙어있었던 ‘최음제 흥분제’ 광고는 여자를 확실하게 ‘골뱅이’로 만들 수 있는 데이트 강간 약물이었던 것이다. 하나하나 알아갈수록 이상했다.


 현실과 포르노를 구분하지 못했던 것은 단지 아이들뿐이었을까? 우리는 모두 ‘폭력’을 포르노(야동이)라고 말하며 살아왔는데?


 과거의 나의 대한 혐오와 함께,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자체가 거짓된 것처럼 느껴졌다. 왜 나는 내가 ‘야동’이 되는 것을 두려워만 했지 그것을 보며 ‘폭력’이라고 느끼지 못했을까. 왜 사람들은 ‘폭력’을 저지르며 아무도 그것이 ‘폭력’ 임을 알지 못하는 걸까. 왜 영상 속에 그녀는 비난받아야 하는 걸까. 세상이 180도 반전된 것 같았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빨간약을 먹은 기분이었다. 


 2015년도 ‘게임 개발자’의 꿈을 안고 있던 나는 그때부터 2018년도 현재까지 디지털 성폭력 운동을 하게 되었다. 내가 디지털 성폭력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에 거창한 이유는 없다. 단지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이유였다. 



누군가 영상이 유출되었다는 소식에 ‘나는 아니어서 다행이구나.’가 아닌 정당한 분노를 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지금 ‘디지털 성폭력’에 분노해 거리에 나온 여성들 또한 마찬가지 일 것이라 생각한다. 



디지털 성폭력은 디지털의 역사와 함께했다. 혹자는 2000년도 유출된 연예인 유출 비디오들이 ‘한국 네트워크 강국’을 이끌어낸 주역이라고 말한다. 당시 유출 영상을 보기 위해 대학생들이 너도 나도 네트워크 공부를 했더랬다. 그렇다면 중세시대 ‘마녀사냥’에 희생된 그녀들은 ‘근대화’의 주역인가? 그녀들의 죽음이 흑사병과 같은 재앙, 사회적 경제적 불만을 잠식시켰으므로? 나는 지금까지 이뤄졌던 디지털 성폭력을 단순한 ‘사생활 침해’의 범주에서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세계는 지금 ‘디지털 시대’의 마녀사냥을 겪고 있다. 


 서울대 서양학 교수에 빠르면, 유럽의 마녀사냥이 가장 절정에 달한 것은 다름 아닌 ‘인쇄술’이 생겨난 근데 초였다고 말한다. 1350년 이전에 사악한 행위로 재판을 받은 당사자의 70퍼센트가 남성이었다면, 여성은 30퍼센트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14세기 후반에 남녀 비율이 역전되어 16~17세기에 이르러 여성이 80%를 넘게 차지했다. 그리고 16세기 마녀사냥은 절정에 달했다. 


 이는 ‘마녀의 관련된 종교적 서적’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언급된다. “여성이 혼자 생각할 때에는 사악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마귀는 대게 타락한 신앙인이나 신심이 약한 사람을 찾아다닌다 그 때문에 마귀는 여성을 더 선호하며 찾아다닌다.” 이러한 ‘여성 혐오’가 담긴 서적은 수천 부가 인쇄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마녀사냥의 법규에 따라 대게 ‘보호할 남성’이 없는 ‘미혼 여성’과 ‘과부, 힘없는 노인’ 등이 수없이 많이 처형되었다. 

실비아 페데리치의 책 “캘리번과 마녀” 에서는 이러한 “마녀사냥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이루어졌다고 서술한다. 마녀사냥은 여성들이 출산을 통제하는 데에 써왔던 모든 방법(피임)을 악마적 방법이라고 몰아붙였고. 여성의 신체에 대한 통제를 제도화했다. 그리고 여성의 신체를 사적 영역의 대한 노동으로 밀어 넣은 뒤 여성의 노동을 무급화 시켰다. 


“산파나 모성을 거부한 여성, 혹은 이웃집에서 땔감이나 버터를 훔쳐서 생계를 이어가던 거지들만 마녀에 속했던 것이 아니다.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문란한 여성들(창녀나 간통한 여성,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결혼과 출산의 구속 밖에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행사한 여성들) 또한 마녀였다. 그렇기 때문에 마녀재판에서 "평판이 나쁜" 것은 유죄의 증가였다. 말대답을 하거나, 논쟁을 하고 욕을 하거나, 고문을 받으면서도 울부짖지 않는 방한적인 여성들도 마녀에 속했다. 여기서 "반항적"이라는 것은 반드시 여성들이 연루된 특정한 전복적 행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캘리번의 마녀 중에서 


2000년도부터 ‘디지털’ 매체를 통해 빠르게 번져나갔던 디지털 성폭력도 비슷한 맥락에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사회적으로 뭇매를 맞아야 했던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이 결혼과 출산에서 자신의 색슈얼 리티”를 행사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그러한 이유 단 하나만으로 사회적으로 공공연하게 ‘걸레’라는 이름으로 손가락질받는 대상이 되었어야 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사법부’와 ‘언론’또한 가해자의 손을 들어 적극적으로 그녀들을 가해했다. 영상에 등장한 그녀가 ‘성적으로 주체적이거나 적극적인’ 모습을 보일수록 그녀들을 지탄하는 폭력의 수위는 높았다. 사람들은 그녀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영상 촬영의 대한 피해자의 흉흉한 소문은 심심치 않게 돌았다. 


살아남은 여성들은 ‘디지털 성폭력’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즉 ‘걸레’가 되지 않기 위해 무의미한 발버둥을 쳐야 했다. 즉 ‘성적으로 무지’ 하며 ‘수동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디지털 성폭력이 데이트 성폭력에서 ‘협박’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는 것 또한 눈여겨봐야 하는 현상이다. 


이는 디지털 세상으로서 배운 가부장적인 폭력을 이용해 여성을 자신에게 ‘종속’시키고자 하는 행위다. 


 2000년대를 대표하는 디지털 폭력에 있어 지목되는 ‘개똥녀’ ‘루저녀’ ‘패륜녀’와 같은 사건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욕설과 막말’을 했던 이유로 무자비한 신상털이와 공개적 테러 및 괴롭힘 등을 당했다 2010년 해당 사건을 풀이한 기사에의 인용에서 “디지털 사회가 만들어낸 판옵티콘” “자신의 행동이 언제든 비추어지는 유리의 성” 등으로 비유한다. 하지만 어째서 그들이 사냥하는 것이 항상 “여성”이었는지는 묻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엄격한 도덕적 잣대’가 여성에게만 향하는 것에 의문을 가한 언론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그것이‘여성 혐오’라 알지 못했다. 


 여초 사이트 대한 ‘도덕적 억압’ 또한 마찬가지다. 여태까지 일반적인 커뮤니티에서 ‘몰카’ 라던지 성폭력에 대한 조장 글이 올라와도. ‘일부’의 일이라고 말하던 그들은 여초 사이트에 대해선 태도를 달리 했다. 집단에서도 여성은 ‘개인’이 아닌 ‘여성’으로 존재해야 했다. 


 우리는 이쯤 물어야 한다. 2000년대 우리 사회에 눈부신 발전을 가져다준 디지털 문명은 여성에게도 친절했는가? 


우리는 스스로를 억압하는 사회와 문화에 의해 폭력을 폭력이라고 느낄 자유마저 삭제당한 채, 디지털 성폭력 사건을 통해 응당 누려야 할 권리와 자유를 빼앗겼으며 ‘여성’으로서의 자아 그 자체가 억압되고 통제당했다. 이것은 단순히 한 개인에게 가한 피해가 아닌 언론과 검경이 보여준 여성 전체의 대한 폭력, 그 극단이었다. 디지털이 ‘남성’의 가부장적 권력을 공고히 하는 도구로서 재이용된 것이다. 


‘디지털 성폭력’은 한국의 마녀사냥이라 보아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그들은 근대 초의 ‘마녀 사냥꾼’과 그들은 닮아있다. 그들에게 마녀사냥이란 일종의 유흥이자 가부장제를 공고히 하는 공포의 확산이었다. 디지털 성폭력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의 유흥이자 공포의 확산이었다. 


그리고 10년이 넘는 지금, 침묵 속에서 분노를 참아왔던 그녀들의 목소리가 2015년 일종의 ‘과격한’ 형태로 세상에 튀어나오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나는 그것을 과격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고민한다. 소라넷에는 하루 평균 2개의 강간 인증 글이 올라왔다. 2001년도 만들어진 ‘훔쳐보기 게시판’은 2010년부터 하루에 수십 개의 ‘불법 촬영’ 사진이 올라왔다. 업로드된 한국 영상은 모두 ‘불법 촬영’으로 만들어진 영상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2015년 소라넷을 ‘야동’ 사이트가 아닌 ‘성폭력’ 사이트라 칭했다. 


두려움에 떨며 살 바에는 마녀가 될 것이다. 불태워지는 마녀가 아닌 그들이 혐오해 마지않는 마녀가 될 것이다. 2015년 ‘소라넷 폐지’ 운동을 바라보던 수많은 사람들은 불가능할 것이라며 혀를 찼다. 소라넷이 사라져도 어차피 디지털 성폭력은 존재할 거라고, 더 심해질지도 모른다고. 


소라넷이 사라진 지금 혀를 차던 그들의 말처럼 디지털 성폭력이 더욱 증가했는지, 혹은 줄었는지 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단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이 있다 


그들은 이제 ‘디지털 성폭력’을 야동이라 부르지 못할 것이다. 




#디지털 성폭력


2018년 여세에 기고했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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