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단체를 꾸려 2017년 한국 여성 연합에서 ‘올해의 여성운동상’도 받고. 22살에 BBC 선정 세상에 영감을 준 100명의 여성에도 선정되었다. 23살을 맞이하여 서울시에서 ‘제야의 종’을 쳤으니. 23살의 젊은 여성이 가지기에, 아니 누가 되었든 간에 엄청나게 독보적인 이력임이 분명하다. 나를 보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며 ‘성공’한 사람이라 여긴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부모님도 포함되어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사회에서 흔하게 보이는 한국 부모님을 둔 탓에, 여성으로 태어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좋은 대학, 좋은 학력을 가져야 결혼을 잘하고 결혼을 잘하면 성공한 인생이고 그래야 행복하다.’라는 공식 속을 귀에 딱지가 앉히게 듣고 살아야 했다. 그러니 ‘결혼=행복=성공’이다. 아마 다른 많은 사람들도 ‘성공’해야 행복하다는 생각 속에서 살 것이다. 모두 성공을 위해 치열하다.
근데 그놈의 ‘성공’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나의 행복이 저당 잡혀 있는 것 인가.
나는 그 ‘성공’이라는 놈에게 태어나기 전부터 크게 빚을 진 모양이다. 부모님! 당신들은 성공이라는 놈에게 무슨 짓을 했길래 딸을 팔아먹었습니까!
나는 지금 사실 돈을 잘 벌고 있지도 못하며, 빚에 허덕이는 데다가, 학력도 엉망이다. 남자를 만날 생각도 없고, 부모 돈을 받아 생존하고 있으며 딱히 직장에 들어갈 생각도 없다. 공부도 설렁설렁하고 있으며, 지금은 잘 먹고 잘 노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데다. 허구한 날 반찬 도둑질에 살림 도둑질이나 하고 있으니 안타깝게도 좋은 학교 보내 시집 잘 보내려고 했던 부모님의 계획은 대실패다.
그렇다면 내 저당 잡힌 행복은 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것 인가?
나는 곧바로 그들이 내민 ‘결혼=행복=성공’ 공식에서 ‘결혼’이라는 단어를 삭제했다.
결혼이 사라지고 나니 성공은 곧 행복이라는 공식이 남는다.
그러고 나니 조금은 우쭐해졌다. 어쩌면 부모님의 ‘실패작’인 나도 누군가에게는 '성공작'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바로 나를 ‘성공’한 또는 ‘성공’할 사람으로 바라봐 주는 사람들. 나는 어쩌먼 그곳에, 그들에게 나의 행복 있는 걸까? 사람들이 보내는 기대 또는 선망 어린 눈빛은, 나를 우쭐하게 만들었다. 난 바로 ‘아 바로 이것이 행복인가?’ 하고 그들의 기대에 맞춰 최선을 다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의 박자에 맞춰 아무리 열심히 움직여도 보고 들쳐도 보고 캐내어 봐도 행복이 굴러 나오질 않는다. 이상하게도 점점 지쳐갈 뿐이었다.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나는 기대와 선망이 마치 내가 가진 마지막 존재 가치인 것처럼 매달렸다. 나의 부모님의 ‘인정’에 매달렸던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결국 나를 가장 상처 입게 만들었다. 어쩌면 나는 또 다른 부모님 아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 경험은 나를 성공한 사람이라 봐주는 사람들의 눈동자에서 비치는 기대와 선망을 두려워하기 시작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나에게 기대 어린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에게서 행복을 찾아내고자 것은 그만둔 상태다.
그들 또한 나의 행복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게 분명하다.
참, 어딘가 숨어 있는 나의 행복을 찾는 일은 고되고 힘들다.
사실 찾지 못했던 게 당연하다, 애초에 행복은 그렇게 찾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행복은 밖에서 찾는 게 아니라 나의 안에서, 바로 내면에서 찾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행복’을 가지고 있음에도 몰랐다.
고통스러운 시간도, 괴로운 시간도 많았지만 나는 주변 사람들의 지지와 사랑으로 그 행복함으로 그러한 고난을 견디며 지내왔으며, 어쩌면 행복했던 그 순간에 가장 많은 것을 이루어 냈다. 고통스러울 때는 나는 고통스러운 것 밖에 기억해내지를 못했다. 행복한 시간은 상처로, 고통으로 덧씌워져 보이지 않는다. 사실 행복했기에 그만큼 더 아팠기에 나는 그 행복했던 순간들을 미워하게 되었던 것 일지도 모른다.
사실 이것은 전형적인 우울증 증상이며. 이는 감기처럼 오고 간다. 분명 과거에 행복은 부모님의, 타인의 바람에 숨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 곁을 떠났음에도, 나는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하고 만다. 어쩌면 제대로 몰랐을지도 모르지만.
단체는 건강상의 이유로 3월부터 9월까지 장기 휴직을 하고 있다, 트위터 유튜브 등 모든 활동을 중단한 상태인지라, 단체를 사랑해주시는 많은 사람들이 나의 경황에 대하여 이래저래 많은 걱정을 하는 것 같다. 나는 건강상에 휴직을 한 것이 맞다.
그때 당시의 나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몸도 마음도 엉망이었다. 섭식 장애가 심하게 와서 음식 냄새만 맡아도 구역이 올라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수면 장애 또한 극에 치닫아, 하루에 겨우 4시간을 잠들었다. 영양 문제와 수면 부족 위장 문제로 인한 두통과 복통을 오갔다. 약을 먹고 강제로 일을 해야만 했으며 일을 하면서도 급습하는 공황 증세에 고통스러워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차분한 모습을 보여야 하기 때문에 나의 온 신경을 갈아 넣어야 했다. 집에 가면 탈력감에 쓰러지거나 구역을 반복하고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감각과 생각이 무뎌져 내가 아프다는 생각도, 슬프다는 생각도, 고통스럽다는 생각도, 기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나 정도면 정말 안정적인 사람이라고 제법 괜찮은 상태라고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초라한 뒷모습을 보이기 싫어 괜찮아 보이고자 애를 썼었고, 나 스스로도 괜찮다고 착각했다.
마치 세상을 다 산 노인처럼 지친 표정으로 나의 자아는 현재 세상 밖에 있으며, 지금 도를 닦는 중입니다. 아, 나는 어느 때보다 평온합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말 그대로 이 세상 ‘세속’을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의 트위터를 보던 사람들도, 당시 취미 활동을 하겠다고 시작했던 유튜브 방송을 보던 사람들은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마 충분히 느껴졌을 것이다. 이를 악물고 발버둥 치는 모습을 말이다.
아마 나만 내가 아픈 걸 몰랐다. 사실 나는 처음 2주 간의 휴가를 받았을 때, 그 시간 동안 회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올해 1년 동안 또 바쁠 예정임으로 아침 밤낮 내가 다시 ‘일’을 하게 되면 못할 것 같은 것에 몰두했다. 바로 밥도 잠도 자지 않고 오로지 컴퓨터 게임만을 한 것이다. 사실 이런 적이 처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따금 나는 참을 수 없이 현실 도피를 하고 싶어질 때면 밥도 잠도 자지 않고 분이 풀릴 때까지 다른 행위에 몰두했다, 그중 하나가 게임이다.
그 기간은 아주 길면 1개월 짧으면 1주 정도가 되는데, 일전 단체에서 징계를 내려받아 2개월 간의 직무 해지와, 3개월 간의 대기명령, 즉 업무 정지 처분을 받았을 때 나는 게임을 하면서 온 시간을 보냈었다, 1개월 동안 나와 같이 배틀 그라운드를 하던 사람들은, 항시 대기로 접속해 있는 나를 보며 저 사람은 ‘48시간 게임을 한다’고 말했다. 게임을 할 때 특별히 목적은 없다, 다만 ‘다크소울’과 같은 아주 어렵고 어려운, 고도의 컨트롤과 정신력이 필요한 게임을 해서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그 안에서 숨겨진 미션을 다 클리어한다, 그렇게 게임을 하다 보면 뭔가 현실의 나가 제법 멀게 느껴진다 ‘아 나도 뭔가 이룰 수 있는 인간이구나’ ‘아 게임도 이렇게 어려운데 이 정도면 인생은 제법 쉬운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질릴 때까지 게임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일이 하고 싶어 지는 것이다.
그때를 목격했던 사람의 경험담에 따르자면 게임에 몰두한 나를 관찰하는 게 정말 신기했다고 한다. 일어나면 게임을 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보면 죽은 것처럼 방바닥에 쓰러져 있다가. 다시 일어나서 게임을 하다가, 딱히 무언가를 먹지도 않는다. 오로지 음료수만을 들이킨다.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일도 그렇게 하는 편이다. 나는 모든 행동을 조금 과도하게 한다, 하나를 잡으면 그 자리에서 끝장을 내야 성이 풀린다. 나는 휴식도 그렇게 끝장 내고 싶었다.
휴식을 끝장 보겠다니 정말 멍청한 생각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것은 휴식도 스트레스의 해소 방법이 아니다. 나는 그냥 무언가를 과도하게 하는 것을 멈출 줄 몰랐던 것이다. 무언가를 과도하게 하다가 소진되어 번아웃이 오고 다시 과도하게 질주하는 것을 반복한다.
사실 징계 때 단체 사람들은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잘 몰랐다. 사실 징계는 말 그대로 반성의 시간을 가지라고 한 것이고, 그들도 정신적으로 매우 피로한 상태였다. 딱히 나를 보고 있을 이유는 이유도 명분도 없다.
하지만, “휴가”를 준 단체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쉬라고 했더니 뭐 하는 거예요?” 나는 태연하게 묻는다. “그럼 뭐가 쉬는 건데요?” 농담이 아니고 진심이었다. 아니 집에서 게임하는 게, 쉬는 거지 그럼 도대체 뭐가 쉬는 건데? 진심으로 나는 정말 착실하게 잘 쉬고 있다고 생각했다.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당연하게도 나는 연행당하듯 장기 휴가를 받았다.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난 아직 괜찮아! 늘이랬어! 괜찮다고!”라는 나의 항변은 하나부터 열까지 처절히 반론당했다. 나는 싸움에 진 개 마냥 풀이 죽어 장기 휴직에 들어갔다.
그리고 2개월이 넘게 진정한 나의 상태와 ‘휴식’과 ‘치유’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뇌하여야 했다.
사실 고민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나는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철저하게 망가진 나 자신을 발견했다.
사실 발견은 오래전에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마치 타인의 일처럼 멀었던 그것을 드디어 나의 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드디어! 나는 내가 이전처럼, 취미를 즐길 수도, 먹을 수도, 웃을 수도 느낄 수도 없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맨 처음 감각이 돌아오고 느낀 것은 쇄약 해진 나의 몸과 아픔이었다.
삼일 밤을 새우고도 멀쩡했던 19살의 나와, 아침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아르바이트에 단체일을 겸했던 20살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랐다. 무얼 하든 간에 나는 금세 지치고,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했다. 나는 과거 친구와의 연락도 거의 두절된 상태였고, 오랜 피로와 스트레스로 예민하고 날카로워진 나에게는 새로운 친구를 만드는 것도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들어가는 것도 너무나도 어려웠다.
나는 그때서야 내가 갈망했던 것이, 그것이 무엇이었길래, 무엇이었길래 나를 이렇게 소진시켰으며 나약하게 만든 것 인가, 나를 상처 입히고 어찌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는가 하며 울분을 터뜨리고 말았다.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휴직기간 동안, 열심히, 천천히 나의 식이 능력을 복구하고 있으며,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니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자전거를 타고 옛 친구들을 만나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 만나고 웃고 떠들고 있다. 잊고 있었던 거지만 나는 주변 사람들과 금방 친해지고 금방 잘 지내는 편이다.
또다시 감사한다, 고통스러운 시간들 속에서, 나의 곁에 있어준 좋은 사람들 덕분에, 비로소 나의 행복을 느끼고 추억하고, 또 다른 추억을 만들기 위한 여정을 위한 휴식을 하고 있다. 그리고 행복함을 느낀다. 트위터에 작성된 수많은 응원의 댓글 또한 나에겐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행복함 이전에 우선, 우리는 왜 이렇게 까지 나의 젊음과 열정을 소진했어야 했을까, 어쩌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우리가 젊음을 바쳐서 이뤄내고 싶어 했던 것이 그것이 사람들이 그렇게 감탄을 터뜨리는 'BBC 백 우먼'과 '제야의 종'이었는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좀 긴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