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콜렛 이터 Nov 30. 2021

예의를 갖추는 거리, 쉐도우 스파링

우울 극복을 위한 운동일기 - 복싱

개별 운동이 끝나고 다 같이 마무리 운동을 할 차례였다.

오늘은 글러브와 붕대를 정리하지 말고 모여달라는 코치님의 말이 있었다.


월요일이어서 그런가 회원들은 많이 오지 않아 나를 포함해서 총 3명이었다.

코치님은 본인의 글러브를 끼면서 오늘은 스파링 연습을 할 거라고 했다.


그렇게 20대 남성 코치님, 40대 남성 회원님, 40대 여성회원님, 나 이렇게 총 네 명이 둘로 나뉘어 쉐도우 스파링(정확한 명칭인지는 모르겠지만)을 하게 되었다.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스파링을 하는데 대신 상대를 정말로 때리지 않고 주먹만 상대를 향해서 휘두르며 연습하는 초급자를 위한 훈련방법이었다.


현역 선수인 코치님을 제외한 모두가 복싱을 시작한 지 일 년이 안 된 초급자였다.

나는 40대 여성회원님과 먼저 짝을 이루게 되었는데, 나보다 키가 한참 작으셨다.

우리는 서로에게 멀리 떨어져서 상대방의 빈틈을 노려 주먹을 날렸다.

대신, 상대방의 몸 앞에 오도록 주먹을 휘두르는 방식을 사용한 것이다.

우리는 궤도를 돌듯 움직이며 피하고 공격하고 방어했다.

3분간의 한 라운드가 종료되고 상대를 바꾸어 조를 이뤘다.


이번엔 20대 남성 코치님과 한 조가 되었다.

코치님은 나와 키가 비슷했고 나보다 덩치는 조금 컸다.

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멀찍이서 주먹을 휘두르며 빈틈을 노렸고 코치님은 나의 얼굴을 향해 몇 번이고 주먹을 날렸다. 물론 눈앞에서 주먹이 멈췄고 나는 '이게 진짜 스파링이었다면 몇 번이고 녹다운했겠다'싶었다.


코치님은 자신은 (훈련된 사람이기에) 괜찮으니, 팔뚝이나 글러브를 쳐도 괜찮다며 주먹을 더 뻗으라고 했다.

나는 코치님이 든 미트-손바닥에 두툼한 쿠션이 있어서 정확한 위치에 타격을 연습하도록 하는 도구-를 칠 때에도 힘을 약하게 조절해서 치기에, 팔뚝이나 글러브를 치더라도 힘을 조절해서 타격했다.

코치님이 보이는 빈틈을 찾아서 주먹을 뻗는 것이 더 어려웠기에, 힘을 싣는 것이 더 어려웠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또 3분이 흘렀고, 라운드가 올라가며 한 번 더 상대를 교체했다.


이번에는 40대 남성 회원님과 한 조가 되었다.

이 회원님은 늘 주먹에 온 힘을 실어 샌드백을 치던 분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 같이 근력운동을 할 때에도 열외로 타격 연습을 했기에, 다른 회원님들과 같이 무게를 들며 이 남성 회원님이 치던 샌드백 소리를 듣곤 했다.  

이 40대 남성 회원님은 나보다 키도 덩치도 훨씬 컸다. 스파링을 시작할 때 인사의 의미로 서로의 글러브를 치는 글러브 터치를 하는데, 나를 보며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내가 본인보다 체구가 작아서였을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는 얼굴은 잊고 스파링 연습을 시작했다.

서로 멀리 떨어져서 스텝을 밟는데, 그가 갑자기 앞으로 훅 들어오며 나의 글러브를 세게 때렸다.

툭 치는 것이 아닌, 내 주먹을 날리려는 듯 꽤나 힘이 실린 펀치였다.

순간, 거리 조절을 잘못하셨나? 싶었다.

나는 상대 회원의 빈틈을 찾아 그 앞에 주먹을 날려 꽂았다. 물론, 내 주먹은 허공에 꽂혔고 곧바로 거두어졌다. 그렇게 여러 차례 그의 몸통과 팔뚝의 빈틈 그 앞에 주먹을 휘둘렀다.

나는 이것으로 그에게 충분한 설명이 되었을 거라 믿었지만, 오산이었다.

그 회원은 주먹을 더 세게 날려 내 글러브를 때렸다.

나는 '이거 글러브 때려도 되는 건가요?'라고 말했고, 그는 어물쩍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고 코치를 향해 다시 물었지만 복싱장에 울리는 음악소리 아래서 40대 여성회원을 지도하고 있던 탓에 내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그리고 40대 남성 회원은 돌렸던 고개를 거두고 다시 내 글러브를 강하게 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매너'를 지키기 위해 거리를 더 넓히고 그의 '빈틈 앞 허공'에 펀치를 날렸다.

내가 펀치를 거두고 가드를 올린 순간, 그는 다가와 주먹을 날렸고 내 가드에 그친 것이 아닌, 내 얼굴까지 타격했다. 힘 조절이 안된 것인지, 글러브까지는 때려도 괜찮다고 인지한 것인지, 글러브를 치되 글러브가 받은 힘으로 내 얼굴이 맞을 것은 생각조차 못한 것인지.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들이 스쳤다.

그 40대 남성 회원도 나도 복싱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초급자였기에, 그리고 같은 복싱장을 매일 나오는 사람이기에 '불편해지기 싫다'는 이유로 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미안한 기색을 보이기도 전이었다.


같은 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기에, 서로의 운동과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의미로 일정 거리를 둔다.

이것은 나와 상대의 안전을 위한 것인 동시에 배려이기도 하다.

모두가 초급자이기에 그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40대 남성 회원에게서는 그러한 매너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예의를 갖출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누군가에게는 예의도 기본도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 아차 싶었다.


운동을 할 때는, 특히 함께 공간과 기구를 사용하거나 타인과 함께하는 스포츠의 경우에는 배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안전을 위한 일이기도 하며 그 스포츠를 계속해서 하기 위한 매너기 때문이다.


이 날 복싱장에서 운동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40대 여성회원님이 나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오늘 운동이 힘들었죠?',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일도 봬요'.

 그녀는 특별한 말을 하지는 않았다. 특히 그 40대 남성 회원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내가 코치님과 한 조가 되었을 때, 그녀도 그 40대 남성 회원과 한 조가 되었으리라.


그 이후로 그 40대 여성회원은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넨다. 우리는 그날 모종의 동질감을 얻었던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피하고 공격하고’의 공식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