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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렛 이터 Dec 13. 2021

처음, 링 위에 서보다!

우울 극복을 위한 운동일기 - 복싱

이제는 복싱장에 들어서면서부터의 루틴이 생겼다.

가장 먼저 운동화를 갈아 신는다. 뒷굽을 꺾어 신고 탈의실에 두꺼운 외투를 벗어두고 사물함에서 장비를 챙겨 나온다.

의자 한편에 장비를 두고 링 옆의 케틀벨과 아령 옆에 있는 나무공 하나를 집는다.

거울 앞에 서서 나무공으로 발바닥을 충분히 풀어주고 나서야 운동화를 제대로 착용한다.

상하체 근육을 충분히 풀어준다. 지난 밤동안 뭉친 다리 근육부터 스트레칭하고 목과 팔도 꼼꼼히 늘려준다.

스트레칭이 끝나면 의자에 얇은 외투를 벗어두고 줄넘기를 가져온다.

다시 거울 앞에 서서 빠른 속도로 양발을 번갈아가며 줄을 넘는다.

워밍업이 충분히 되면, 다시 의자로 돌아간다.

붕대로 엄지손가락부터 손등의 뼈와 손목, 손가락 하나하나를 감싸준다.

다시 거울 앞에 서서 쉐도우 복싱을 시작한다.

기존에 배웠던 동작을 익히고 자세를 바르게 고쳐 잡으며 몸을 풀어준다.

20분간 연습하며 동작이 어느 정도 몸에 배면, 새로운 동작을 배우거나 코치님에게 자세를 좀 더 교정받는다.

이 과정이 끝나면 의자로 돌아가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을 치며 동작을 연습한다.


이번엔 글러브를 끼러 가기 전, 코치님이 나와 다른 회원을 불러 세웠다.

붕대를 감은 우리 손에는 1kg 아령이 들렸다. 가벼웠다.

우리는 쉐도우 복싱을 3분씩 3라운드, 9분 동안 진행했다.

다른 회원은 링 위에서, 나는 링 아래에서 연습했고 실제로 상대방이 있다고 생각하고 쉐도우를 진행하라는 지령이 내려졌다.


나는 처음으로 거울 앞이 아닌 곳에서 허공에 대고 주먹을 날렸다. 1kg의 아령과 함께.

나는 멀리 눈높이에 있는 사물에 상대방을 상상하며 주먹을 날렸다. 상대는 샌드백처럼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자리를 옮기며 다른 사물에 초점을 맞추며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조금씩 각도를 트니, 더 이상 사물이 없는 벽이 나타나기도 했다.

거울 속의 내가 아닌 아무것도 없는 곳에 주먹을 휘두르려니 여간 멋쩍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3분이 흐르고 1라운드가 끝났다. 나와 링 위의 회원에겐 30초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아령을 내려놓고 몸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며 팔에 들어간 힘을 주욱 뺐다.


다시 2라운드, 3분 카운트가 시작됐다. 다시 아령을 들고 주먹을 내질렀다.

펀치를 하던 팔뚝에 점점 힘이 실리게 되고 근육이 단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나 상대는 움직일 것이라 생각하며 조금씩 각도를 틀었고, 저 멀리 거울에 비친 다른 회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무례할지 모르지만, 내 앞에 저 상대가 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싶었다. 순간, 내가 이 복싱장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거울 앞이 아닌, 허공에서 주먹을 날리던 회원이 생각났다.

그분은 나와 조금 멀리 있었지만 꼭 나를 겨냥해 주먹을 날리는 것 같았다.

나는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찝찝한 그때의 기분을 꽤나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의 그 회원도 지금의 나처럼 멀리에 있지만 겨냥할 무언가가 필요했고, 염치없지만 나의 상을 빌려 그렇게 연습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었다.

나는 약간의 죄책감을 가지고 저 멀리 거울에 비친 다른 회원들을 과녁 삼아 펀치를 날리기 시작했다.

허공에 대고 상상한 상대보다는 주먹을 날리기에 수월해졌다.

뻐근하지만 버틸만했던 3분이 끝나고 30초의 휴식시간이 시작됐다.


링 위에 있던 회원이 내려오며 나에게 올라가서 연습해 보라 권했다.


나는 링 위에 올라가 본 적이 없었기에 약간의 부끄러움과 뿌듯함을 느끼며, TV에서 본 ‘선수 입장’처럼 줄 하나를 내리며 다리를 넣고 상체를 들이밀며 그렇게 링 위에 올라섰다.



링 위에 오르니 무척 고요했다.

분명 같은 공간인데도 불구하고 링 안은 그랬다. 링의 바닥은 조금 푹신했고 까맸는데 한없이 꺼질 것 같은 기분이 살짝 들었다.

30초의 짧은 쉬는 시간이었지만 무한히 확장하는 그런 기분이 잠시 들었다.

링 위에 올라서니, 나와 눈높이가 맞는 대상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어디에 대고 펀치를 날려야 할지 정하지 못한 채, 3라운드를 시작했다.


공이 울리고 본능적으로 나는 잽부터 날렸다.

몸은 가만히 있고 내 팔을 팔방으로 향했다. 바람개비 돌듯, 뒷발을 고정한 채로 여기저기로 스텝을 밟았다.  

잠시 스스로가 우스꽝스러웠다.

높은 곳에 있어서 더 그랬다.

하지만 나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나 혼자 링 위에 있을 뿐이었다.

링 위에서는 내가 온전히 상대를 상상해야 했다. 나를 공격하는 상대여야 했다. 내가 뻗을 주먹을 예측하고 피하며, 내 빈틈을 공격할 상대.


링 위에서는 다른 회원들에게 상대를 빌려올 수 없었다. 오롯이 홀로 상대를 만들어 상대해야 했다.


나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상대를 상상해냈다.

언젠가 TV에서 본, 웃통을 벗고 기어를 쓰고 빨간색 글러브를 낀 얼굴 없는 다부진 몸의 선수.

실제 경기라면 한 번에 나가떨어질 테지만, 지금 그는 내가 입문자라는 것을 알고 슬쩍슬쩍 빈틈을 내주기도 하고 나의 공격을 막고 피하며 나를 공격하기도 한다.

나는 열심히 그의 빈틈을 파고든다. 순간, 뻐근한 팔뚝이 떠오르며 쉐도우 스파링을 잠시 멈추자고 마음속으로 외친다.

하지만 상상의 선수는 나에게 조금만 더 버텨보라고 독려한다.

마지막 라운드가 30초도 채 남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얼마 남지 않았다’는 7글자를 머리에 되뇌며 펀치를 날렸다.


그렇게 3라운드가 끝이 나고 1kg 아령을 내려놓았다.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 앞에 섰을 때, 놀라움을 경험했다.

예상할 수 있듯, 뻐근하고 무거웠던 펀치가 놀랍게도 가벼웠다.

그 1kg가 뭐라고, 이리도 내 주먹이 가벼워지는지, 새삼스러웠다.


링 위에서 만난 상상의 선수는 그 뒤로 나타난 적이 없다.

혹시라도 내가 ‘권’ 태기가 온다면, 나를 다시 독려해 줄 수 있도록 마음속 가까운 곳에 그 선수를 위한 방을 하나 마련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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