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 극복을 위한 운동일기
어렸을 때, 피아노 학원에 다닌 적이 있었다.
바이엘부터 시작해서 하농으로 손가락을 풀고 체르니를 배운다.
어느 정도 실력이 쌓이면 피아노곡을 하나 연습하게 되는데, 어린이들이 참가하는 대회에 나가 경험을 쌓기 위해서다.
대회는 늘 대학교의 소강당에서 이루어졌고 강단에는 어린이들 몸집보다 몇 배는 큰 그랜드 피아노만이 올려져 있었다.
그 피아노에 올릴 수 있는 것은 열 손가락과 두 발이 전부였다. 악보 대가 있었지만 악보를 올리는 어린이는 한 명도 없었다.
피아노 학원에서도 악보 없이 한 곡을 온전히 연주시키기 위해서 연습시키는데 어린이들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긴 곡을 악보 없이 완주한다.
나도 그런 어린이들 중 한 명이었다.
큰 무대 위에서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고요함 속에 내가 누르는 피아노음만이 공간을 울리는 경험은 10살도 안된 아이들에게는 무척이나 떨리는 일이다.
하지만 몇 주 혹은 몇 달간 연습한 음표들은 손가락에 녹아 움직인다.
머리로 다음 마디를 미리 염두에 두지 않아도 그저 손가락들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는 한 곡을 완주하고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있다.
이후 3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 성인이 된 내가 몸에 기억을 주입할 거라고 예상이나 했겠나.
나는 복싱장에서 첫 번째 기본 연결 동작을 배웠다.
힘겹게 외웠던 그것은 이랬다. 엄청 길고 어려웠다.
원 투 훅 오른쪽으로 위빙 훅 투/ 왼쪽 팔꿈치를 내려 갈비를 막고 어퍼컷 오른손으로 훅 왼손으로 투/ 오른손으로 얼굴 앞쪽을 막고 왼손으로 투 왼쪽으로 위빙 후 투 훅 투
다소 복잡해 보이지만 이 과정 중은 ‘/’를 기준으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 세 부분 중 어느 하나가 들어오면 그 이후의 동작이 바로 나와야 한다.
즉, 몸이 기억을 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코치님이 왼쪽 갈비를 공격해온다면, 나는 “왼쪽 팔꿈치를 내려 갈비를 막고 어퍼컷 오른손으로 훅 왼손으로 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어렵다. 글로 써 놓으니 더 어렵다.
이제는 왼쪽 갈비를 공격하든, 오른쪽 얼굴을 공격해오든, 나는 첫 번째 기본 동작들 안에서 연결 동작을 낼 수 있게 되었다.
머리로도 버벅거리며 기억하던 것을 몸이 기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다른 일을 하다가도 동작을 연속할 수 있는 지경이 되었으니, 세부적인 자세를 잡을 차례였다.
먼저 ‘원 투 훅’은 그동안 많이 연습했기에 큰 무리는 없었다. ‘위빙 훅 투’에서 위빙을 할 때, 얼굴 앞에 가드를 올리는 것을 종종 잊곤 한다.
이것은 내가 두 팔을 내리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이전 동작의 끝부분을 혹은 다음 동작의 앞부분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훅’ 동작을 연속하기 위해서, 오른 주먹이 밖으로 나가 있어 나의 오른쪽 얼굴이 자꾸만 비게 되는 것이다.
동작만 기억하는 것에 집중했더니 디테일을 잃었던 것이다.
코치님은 처음부터 디테일을 잡으며 알려주셨지만, 순서도 제대로 못 외우고 있는 스스로가 창피해 ‘얼른 외워야겠다’는 생각에 나온 결과였다.
나는 기본적인 ‘공격’과 ‘방어’ 그 두 가지 모두를 동반하지 못 한 채, 그저 허공과 샌드백에 팔만 휘두르고 있던 격이었다.
어린 시절 피아노 연주대회에서 내가 연주하는 곡의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여 완급을 조절하고 음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닌, 그저 ‘완곡’만을 목표로 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몸이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나의 인지영역 밖에서 수행할 수 있는 귀한 능력이다.
하지만 이것이 추구하는 목적과 존재 이유를 상실한 채 수반된다면 그만큼 껍데기인 것도 없는 것일 것이다.
피아노곡을 연주하는 것, 그리고 복싱을 하는 것.
나는 그 행위에 대한 목적과 이유를 먼저 살피고 인지하고 수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