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을 깜박 빼놓고 와서요
취업준비생이라는 신분이라 부를 수 없는 과도기적 위치에 있던 시기, 당시 다니던 대학교의 등쌀에 못이겨 취업설명회에 떠밀려간 적이 있었다. 당시 강사로 오신 분은 아직 몇 억 원이면 서울에 아파트 마련이 가능했던 시기에 이미 연봉 몇 억 원을 받고 계신 제약 영업사원이셨다. 강당을 채운 백여명의 대학생과 양복을 입고 마이크를 든 강사님의 모양새가 다소 부흥회나 다단계 느낌이 나기는 했지만, 그만큼 취업이 간절했던 시기이기도 했던 터라 그 날 강의의 정수를 빼먹고 올 심산이기도 했다. 그리고 곧 그 기대는 강사분의 첫 말씀부터 산산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저는 자존심은 집에 두고 출근합니다."
그 뒤로 "나는 이렇게 회사에 몇 십억을 벌어주고 몇 억을 받는 성공한 사람이 됐다"류의 성공신화와 비결이 이어졌지만, 자세히 쓸만큼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쉬는 날 카페에서 괜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판을 펴놓던 당시의 나로서는 자존심이란 토끼간처럼 깜박 빼놓고 갈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판, 카페 테이블에 무심하게 엎어두면 느낌이 산다. / 출처=민음사 도서 정보 페이지 캡처
젊은 날의 치기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 직업이란 고용주와 나 사이의 정당하고 공정한 계약 관계에 가까웠다. 월급을 받기 위해 업무나 나의 능력 밖 무언가를 기꺼이 제공하는 식의 관계는 부조리한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짧다고는 할 수 없는 취업준비 기간을 거쳐야 했다.
일반 기업에 다니며 적당히 둥글게 깎인 나는 '클라이언트'라는 이름의 갑들에게 굴종하는 법을 익혔고,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시크함'이라고 자위하던 덜떨어진 사회성을 키워냈다. 둥글둥글하게 깎이던 시간을 지나 결국 심성이 푹푹 패이는 시기가 되자 결국 나는 참아왔던 취업준비생 시절의 치기의 폭발을 막아내지 못하고 수년간의 커리어를 내팽겨치게 된 것이다.
내가 첫 번째로 가진 직장은 광고업계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