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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미안 May 18. 2023

그런 사랑

영화 CODA를 보고

 이제 막 태어난 아기의 장애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아기의 청력이 정상이라는 의사의 말에 엄마의 마음은 철렁 내려앉는다.

세상에 그런 못된 엄마가 어딨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다. 세상엔 그런 세상도 있다. 그런 세상이 있으니 그런 사랑도 있다. 당신은 알 리 없고 나는 모를 수 없는 사랑. 영화 CODA를 보며 나는 그런 사랑이 대해  한참 생각했다.


 CODA는 Children of  Deaf Adult의 약자로, 청각장애인 부모를 둔 장애 없는 자녀를 지칭하는 말이다. 나는 운 좋게 잘 들을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듣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 들을 수 있는 사람의 삶을 상상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우선 부모와는 능숙히 수어로 대화할 것이다. 말보다 몸으로 대화하는 법을 먼저 배웠을 것이다. 어쩌면 말이 조금 늦었을지 모른다. 처음 얼마간은 다른 가족들처럼 청각 장애인 특유의 높은 톤과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했을 것이다.


 세상과의 소통은 어떨까. 오랫동안 세상과 가족을 연결해 주는 통역이었을 것이다. 통역은 대화에 속해 있으나 자신의 얘기는 하지 않는다. 주인공 ‘루비’ 역시, 자연스레 가족의 귀이자 입으로 살아간다. 새벽 일찍 일어나 어부인 아빠, 오빠와 함께 배에 올라 (생각보다 배 위에서도 ‘들어야 할 일’이 많다) 그들의 사업, 잡은 고기에 적당한 가격을 흥정해 파는 일을 돕는다. 학교라도 재미있으면 좋으련만, 새벽부터 시달린 루비에게 학교란 자러 가는 곳에 불과하다. 온몸에 생선 비린내를 입은 그녀를 괴롭히는 질 나쁜 동급생들이 괴롭다. 이래 저래 무겁고 외로운 삶이다.

 그러던 루비의 지치는 일상에 작은 활력이 찾아온다. 짝사랑하는 '마일스'를 따라 합창단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노래하는 기쁨과 숨겨진 재능을 알게 된다. 특별 활동 선생님치곤 드물게 열정적인 참 스승을 만난 덕분으로 버클리 음대 오디션의 기회까지 얻게 된다. 마일스와 듀엣을 부르며 싹트는 로맨스는 덤처럼 찾아온 행복이다.


 만약 여기까지가 영화의 전부였다면, 나는 실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청각장애인 부모와 그들의 삶을 대신 지탱해야 하는 비장애인 딸이 꿈을 위해 노래하는 이야기라니. 너무 착하고 뻔해서 하품이 날 지경이다.

 하지만 영화는 CODA의 삶, 그리고 장애를 바라보는 전형적 슬픔의 시선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난생처음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독립된 주체로서 루비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속에 엄마, 오빠, 아빠의 각기 다른 사랑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장애를 안고 사는 세상에서 발견 가능한 그런 사랑말이다


 먼저, 엄마의 사랑에 대해 말해볼까. 엄마의 사랑은 걱정과 두려움 위 단단한 확신이다. 그녀의 두려움은 딸을 완전히 사랑하지 못할 수 도 있다는 데서 기인한다. 루비가 버클리 음대 오디션 기회를 포기하고 가족들을 돕기로 결정한 그날 밤 침대에서, 엄마는 딸에게 제일 처음 그녀가 품었던 작은 두려움에 대해 털어놓는다. 장애가 있는 본인과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까 봐서, 나의 장애가 너를 실망시킬까 겁나서 몰래 너의 장애를 바랐었다고. 이 짧은 고백의 순간,철없게만 보이던 미인대회 출신의 엄마는 관객의 눈에 진짜 엄마로 다시 태어난다.

 평소, 엄마와 딸 사이에는 엄마와 아들 사이에선 발견하기 힘든 다른 종류의 특별함이 있다고 믿는 편이다.  좀 더 친구 같은 면이 강하다고 할까. 거기에 장애라는 특별함이 더해질 때, 일반적 상식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사랑이 탄생하기도 한다. 나는 엄마니까, 너의 장애가 내게 실망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내가 평생 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보다 차라리 나와 같은 장애를 가지는 것이 낫겠다는 확신, 그럼에도 여전히 너를 사랑할 수 있다는 그런 확신은, 너무 쉽게 미안해지고 마는 요즘의 사랑 앞에서 더욱 특별해진다. 어지간히 단단한 마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랑의 한 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오빠의 사랑은 어떨까. 내가 본 오빠의 사랑은 거침없는 믿음이다. 동생의 재능에 대한 믿음, 앞으로 펼쳐질 장밋빛 미래에 대한 믿음, 그리고 네가 없어도 우리 가족은 아무 문제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오빠의 그런 사랑을 정의한다.

 다짜고짜 화부터 내는 오빠의 사랑은 서툴다. 대게의 짜증 섞인 말이 그렇듯 오빠의 말 역시 주의 깊게 ‘보지 않는다면’ (오빠는 수어를 하므로) 서운하기 까지 하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도 우리는 잘 살았어’ 란 말이 특히 그렇다. 본인이 없으면 힘들어질 가족의 사업을 위해 꿈도 포기하기로 한 루비다. 매정한 오빠의 말에 평생의 헌신이 부정당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 맥락에선 섭섭한 그 말이 오히려 루비의 마음을 위로한다.

 어떤 사랑은 너의 존재로 완성되지만 너의 부재를 기꺼이 감당해 냄으로써 증명되는 사랑도 있다. 같은 이유로 ‘네가 없이도 우리는 잘 살았어 ‘는 ‘걱정 마 우린 무력하지 않아. 네가 없어도 우리는 괜찮을 거야. 그러니 너도 너의 삶을 살아’의 다른 표현이다. 루비에게 이보다 마음 편해지는 말이 또 있을까.

 사실, 감정 표현에 서툰 것이야 말로 모든 남매의 특징이자 특권이다. 이쯤 되면 그냥 너의 갈 길이나 가라고 매몰차게 뒤돌아서는 오빠의 마음을 루비도 어렴풋이 알아차렸을 것이다.


 마지막, 아빠의 사랑은 절절한 이해다. 나는 이 사랑을 딸을 이해하기 위해 온몸으로 애쓰는 마음이라 표현하고 싶다. 그런 아빠의 사랑은 기존 신파 영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울린다. 대놓고 슬프기보단 애처롭고 애절하다.

 사랑하면 모름지기 알고 싶어 진다. 그런데 수천번을 죽었다 깨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그가 사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다. 듣지 못하는 아빠에겐 딸의 노래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아빠는 가만히 앉아 슬퍼하는 대신 자신만의 방식으로 딸을 이해하길 멈추지 않는다. 이 애쓰는 마음이 너무 절절해 나는 어떤 한 장면에선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루비의 합창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날 밤, 아빠는 딸에게 들을 수 없는 노래를 다시 불러 달라 청한다. 별조차 숨죽인 듯 조용한 밤이다. 진심으로 노래를 부르는 딸과 그런 딸을 바라보는 아빠가 나란히 앉았다. 아빠는 딸의 입에 시선을 맞추고, 목에 손을 짚어 손 끝으로 노래를 느낀다. 이윽고 귀를 제외한 온몸을 통해 노래를 듣기 시작한다. 그는 아마 노래의 멜로디가 무엇인지 평생을 노력해도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분명 음악을 느끼는 사람의 얼굴이다. 성대의 울림이 손을 타고 귀가 아닌 가슴으로 전해지는 그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멜로디가 어떻든 뭐 그리 대수일까 싶다. 결과와 상관없이 애쓰는 마음은 그 자체로 사람을 울리니까. 포기하지 않는다는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 중 최선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그런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도 눈물지어지는 수밖에.


 장애, 그런 건 사랑 앞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영화는 말한다. 그렇게 볼 때, 사랑이란 본디 아무래도 괜찮은 마음 아닐까. 네가 어떤 사람이건 내 사랑엔 변함이 없다고,  너를 사랑하는 데엔 아무런 장애가 없다 말하는 이 영화가 나는 아름다워서 그리고 무해해서, 장애를 입에 담고도 한껏 자연스러워서 마음에 들었다.


 다 적고 보니, 사랑이면 다 같은 사랑이지 그런 사랑이라고 뭐 크게 다를 것 있나 싶기도 하다. 오늘 밤은 잠든 재이, 내 아들의 볼록 나온 배에 가만히 손을 대어 보아야겠다. 숨 쉴 때마다 자그맣게 부풀어 오르는 그 작은 곳에 손을 대면 아마도 옛날 생각이 날 것이다. 너를 눈앞에 두고도 한 껏 사랑만 주지 못했던 때가. 나는 그럼, 그 미안함 위로 다시 또 내 그런 사랑을 한 층 쌓아 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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