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의 장편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뒤늦게 읽었다. 고양이의 눈에 비친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인간들을 풍자적이고 비판적으로 기술한 작품이었다.
일부에선 소세키의 표절을 문제삼기도 하는데, 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적지 않은 분량이라 읽는데 시간이 걸렸다. 어쩌면 그건 양의 문제는 아니었다. 인간들의 대화 내용이 너저분할 정도로 중요하지 않았고 언어의 교란은 가벼웠다. 별로 중요하지도 감동을 주지도 않았던 인간들의 대화는 여기에 나오는 고양이 또한 나와 같은 느낌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란 참으로 혐오와 시기를 갖기에 충분한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간은 문명의 개척과 성장을 통해 위대한 발전과 성과를 이루었다고 자처하지만 이 소설에서 인간은 고양이만도 못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의 작품성과 질을 논하기에는 나의 능력이 미치질 않는다. 다만, 확실한 건 인간은 생각보다 영리하지 못하고 무수한 철학을 양산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천적인 문제에 있어서 이렇다 할 인간다움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세련된 폼을 위해 겉으로 노력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외면일 뿐이고 내부구조는 부실하기 짝이 없다. 인간을 혐오하는 가장 큰 적은 인간임에 틀림없다. 세상이 주는 환경과 분위기로 인간의 일상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부패하게 만들고 끝내 자멸하게 만드는 인간 최대의 적은 다름 아닌 인간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결국,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대상은 이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 자신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 소설의 결말에서 고양이는 끝내 영원함 안식을 향해 간다. 물독에 빠져 죽는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고양이의 어처구니없는 그런 죽음은 인간의 죽음을 닮았다. 매일 살아가고 내일도 그렇게 살아갈 것 같은 인간의 삶이 어느 한순간 황당하게 마침표를 찍는 경우를 종종 볼 수가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은 고양이는 죽음 앞에서 의연하고 침착하다. 여기에서 본문의 문장을 인용해 본다.
“나는 죽는다. 죽어 이 태평함을 얻는다. 죽지 않으면 태평함을 얻을 수 없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고맙고도 고마운지고, (617쪽)”
고양이의 눈은 곧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눈이다. 다만, 그런 인간이 이 소설에서 고양이로 둔갑하고 위장할 뿐이다. 즉, 고양이는 단순한 고양이로서가 아닌 인간을 바라보는 인간의 이면인 것이다.
나 역시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현재도 만나고 있다. 앞으로도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새 계명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묻는다. 과연, 나는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