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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일기(업무일지x)는 꼭 쓰세요

일기에 무엇을 쓸 것인가 1

첫 직장에서 업무일지 는 매일 하는 일 중 하나였다. 솔직히 귀찮았다. 실적 파일이 따로 있는데 업무일지에 쓴 실적과 일치해야 해서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쓰다 보면 빠뜨리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업무일기는 적극적으로 썼다. 업무일지가 일에 대한 공개기록이라면 업무일기는 일에 대한 비공개기록, 즉 나만 보는 기록이다. 직장일기란 이름을 써도 무방하겠다. 전자에서는 '내방상담 3건, 방문상담 2건' 등으로 기록된다면 후자에서는 그 상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가감 없이 기록된다. 


22년 간 쓴 내 일기장은 A4 사이즈를 기준으로 이제 대략 5,000쪽이 넘는다. 그런데 거의 2,000쪽에 가까운 일기가 첫 직장 6년 간 쓴 일기다. 물론 그 안에는 일상에 대한 기록도 섞여있지만 직장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내용이 더 많다. 어마어마한 양이다. 즉, 업무일지 쓰기는 귀찮았어도 업무일기 쓰기는 그만큼 자발적이었단 의미다.


업무일지와 업무일기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업무일지에 아래 이야기를 쓸 수 있을지 생각해 보면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첫 직장에서 내 서류는 저것보다 더 많아 쌓였었다. 책상 아래 내 발 앞에. by ChatGPT4, Image Generator


생존을 위해 쓴 기록

직장일기를 왜 그렇게도 써댔을까? 번아웃으로 첫 직장을 퇴사하기까지 날 버티게 해 준 것 중 하나가 일기이기 때문이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분노와 짜증, 나 자신의 실수와 부족함에 대한 수치심과 후회 같은 감정이 민낯 그대로 쏟아져 있는 곳이 일기다. 즉, 감정이 소용돌이쳐 견딜 수 없을 때 직장 복도든 화장실이든 가서 곧바로 일기메모에 쏟아낸 기록들인 것이다. 그것이 날 버티게 해 줬다.


처음에는 열받아서 쓰지만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자기 성찰로 나아가기도 했다. 상대가 나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다는 순간의 판단에 휘둘려 감정이 솟구쳤구나 후회하게 됐던 적도 꽤 있다. 물론 진짜 악의로 그랬구나 싶어 착잡했던 적도 있고. 일기를 쓰다 보면 그걸 차분히 구분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서 좋았다.


할 말 / 안 할 말 가리게 해준다

["84살 되어서야 깨달았습니다.." 나이 들수록 말하면 무조건 후회하는 '3가지' (이보규 교수 1부)"] 란 유튜브 영상에서는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숨겨야 할 것 3가지를 언급한다. 자신의 약점, 사생활 그리고 험담(뒷담화)이라고 한다. 특히 직장생활에 딱 맞는 조언이란 생각이 들었다. 입이 근질근질할 때 옆사람한테 말하지 말고 먼저 일기에 쏟아놓는 게 낫다고 나는 믿는다. 일단 글로 써두면 이걸 누구한테 말하면 무슨 일이 터질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나의 약점, 사생활 그리고 험담 같은 것은 일기에 먼저 써보자.


친하다고 생각하는 직장동료라도 아무 말이나 다 쏟아놔선 안된다는 걸 나는 등이 찔린 후에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다행인 것은 당시에도 일기를 쭉 써왔기에 그에게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함부로 한 적은 없었다. 누군가에 대해 화가 나면 일단 일기에 먼저 썼다.


만약에라도 험담을 했다면 그가 나에게 등을 돌렸을 때 약점 잡히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너만 알고 있어'란 말로 시작하는 험담과 비밀이야기는 당장에는 그와 나의 은밀한 결속력을 다져주는 듯 하지만, 그것이 나중에 언제 어느 때에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코걸이로 변할지는 모를 일인 것이다.


바쁘면 서로 까먹으니까

직장이란 곳이 영어 단어 Business처럼 정말 바쁜 곳이다. 그리고 사람이 바쁘면 자기가 했던 말도 까먹는다. 자신이 기록하지 않아도 잘 기억하고 꼼꼼하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간헐적인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 쉽지 않아 진다는 걸 직장생활을 하며 깨달았다. 직장에서는 자신이 잘하는 것이 무엇이든 무기가 된다. 평소 자신만만히 무기를 휘둘렀기에 더욱 자신의 기억력이 틀리면 안 되는 상황으로 몰린다. 하지만 직장생활의 바쁨은 인간능력의 한계까지 밀어붙이게 되고 기억력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므로 서로 기록해야 한다. 기록이 무흠 한 것은 아닐지라도 서로의 기억에만 맡기는 것보단 낫다. 예를 들면 꼭 공적으로 내려진 업무가 아니더라도 사무실 내에 오가는 이야기 속에서 업무분담의 이유가 형성되기도 한다. 당연히 공적 문서에 기록될 수 없는 것들이다. 서로의 기억에만 남기는 이야기들인데 이걸 명확하게 기록을 해두면 나중에 '왜 이렇게 된 거야!'란 물음에 곧바로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게 된다. 보안을 잘해둔 나만의 업무일기, 직장일기에는 '커튼 뒤편의' 모든 이야기까지 다 담을 수 있다.


일잘러가 된다

내가 해낸 일들을 세세히 뜯어보며 기록하다보면 일을 더 잘할 수 있게 된다. 지금은 일과 일상을 모두 통합해서 한곳에 쓰지만 당시에는 '워크로그'라고 이름 붙인 디지털 메모장에 따로 기록했었다. 매일 하던 일에 대한 기록은 통찰력을 더 해줬고 불규칙하게 때로 수행해야하는 직무들은 작업순서를 기록해뒀더니 정말 편리했다. 정기적으로 반복 수행하는 직무들은 캘린더 앱에 등록해서 '반복기능'을 설정해뒀다. 일기의 내용들이 플래너에 자연스레 반영된 것이다.


나중에 에세이가 될지도

첫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에세이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지 꽤 되었다. 일단 자료는 정말 많다(일기 2,000쪽이니까). 하지만 꺼려지는 점이 있다. 혹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 대해 나 자신만의 치우친 입장만이 글에 드러나게 될까 걱정이 된다. 만약 그들이 논란의 여지없이 부당한 처우를 일관되게 해댔다면 되려 쓰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과 나 자신의 잘못과 부족이 적당히 섞여있으면서도 내 생각에는 그들이 좀 더 부당했다고 판단한다면 어떤가. 모호하다. 그렇다면 나는 나 자신의 편을 들 것이 뻔하다.


있는 그대로 그리고 공정하게 글로 쓴다면 문제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뻔한 부당함보다는 모호한 부당함이 에세이로 써내기 더 어렵게 느껴진다. 어차피 실명 거론도 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그들이 읽을 것이란 전제하에 글을 쓰고 싶다. 그러려면 마음과 글을 다듬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렇게 업무, 직장일기를 꾸준히 써두면 언젠가는 세상에 내놓을 이야기를 쓰는데 요긴한 참고자료를 만들어놓을 수 있다.


업무일기를 써보라고 권하고 싶다. 당장에도, 나중에도 의미 있는 기록이 될 것이다.  



[펜메모덕후의 타임테이블 일기 쓰기]

https://brunch.co.kr/@penmemodukku/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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