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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번아웃)에 대비하는 일기 쓰기.

일기에 무엇을 쓸 것인가 2 - 해결중심접근

"지친 분들이 가장 많이 하는 것이 계속 안 좋았던 과거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화가 나면 옛날에 화났던 일, 서러우면 옛날에 서러웠던 일만 계속 생각하게 되죠. "내 인생은 정말 서러웠고 화만 났었구나"라며 과거만 생각하다 보면 또 우울해지고 더 불편해져서 악순환이 펼쳐집니다."

*출처 : 유튜브 <"오늘 하루 어땠는지 '반드시' 되돌아보세요" 소진증후군(번아웃) '현실적인' 대처 방법 총 정리 | 윤홍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빅퀘스천 1부>


지난 글을 쓰며 첫 직장에서 겪었던 소진증후군이 떠올랐다. 직장에서는 업무와 사회생활에 시달리고 집에서는 예민한 아기였던 첫째가 새벽에 우는 경우가 잦아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때 일기만 2,000쪽 가까이 된다. 많은 내용들이 괴로웠던 순간들에 대한 것이었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분명 중간중간 즐거웠던 순간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일기에 기록되어있지 않다. 고통만 가득한 일기장이 되어버렸다.


물론 그때그때 고통을 일기장에라도 토로했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쉽다. 즐겁고 문제없었던 순간들을 꾸준히 세세하게 기록해 왔다면 소진증후군을 극복하는데 한 몫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내 인생은 정말 서러웠고 화만 났었구나"이 오판임을 신속하게 인식했을 것이다. 일기장에 있어서는, 내 인생의 희로애락에서 희락의 측면들을 꽤 많이 놓쳐왔다는 점에서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대표적으로 첫째와 둘째 태어날 때의 일기가 그리 세세하지가 않다. 그때 일기장을 보니 두 경우 다 직장 일로 심신이 너무 지쳐있었던 때였다. 심지어 첫째 때는 출산일에도 직장에서 연락이 오고 이런 나를 보던 와이프가 병실에서 눈물을 보였던 기록도 있을 정도였다. 


해결중심 접근

심리상담 이론 중에 '해결중심 접근'이란 것이 있다. 원인분석에 매몰되는 것을 비판하면서 부상한 접근인데 대략 이런 식이다.


배가 고파서 식당에 왔는데 자꾸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그 음식을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 배고픔의 원인은 무엇인지 대해서 자꾸만 물어보는 요리사를 상상해 보라. 그냥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빨리 내주고 내 식욕의 문제를 해결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자꾸만 문제에 대해서, 문제의 원인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미래 해결책에 대해서 이야기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는 상담을 지양하자. 해결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 보자.


이런 방향성이 있는 접근이다 보니 '문제가 없었던 과거 또는 성공적인 과거'와 '문제가 해결된 성공적인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려보도록 자극하는 질문을 많이 한다('예외질문', '기적질문'이라고 부른다). 단순히 추억과 상상으로 도피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과거를, 그런 미래를 현재에 실현하기 위해 목표를 구체적으로 그리고 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원인분석도 물론 해결의 과정 하나이다. 하지만 문제의 정의와 원인 분석에만 갇혀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미래를 그리고 과거 성공적인 경험을 만들어낸 나의 강점으로 그 목표를 향해 다가간다'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문제가 해결된 미래'(기적질문)에 대한 상상은 언제든 시도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없었던 과거'는 그때그때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에서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이 지점에서 일기가 특히 힘을 발휘한다. 


'이상적인 미래를 그리고 과거 성공적인 경험을 만들어낸 나의 강점으로 그 목표를 향해 다가간다'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문제가 해결된 미래'(기적질문)에 대한 상상은 언제든 시도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없었던 과거'는 그때그때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에서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이 지점에서 일기가 특히 힘을 발휘한다. 


즐거운 경험을 세세한 기록으로

일기는 '문제가 없었던 과거, 성공적인 경험'에 대한 기억을 선명한 형태로 축적할 수 있다. 즉, 문제가 생겼을 때 일기를 쓰지 말고 평소에 써야 하는 것이다. 가끔 나의 과거 일기장을 다시 읽다 보면 고통스러운 경험을 굉장히 세세하고 긴 글로 기록해 둔 걸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왜 즐거운 순간들은 그만큼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는지 해결중심접근을 접한 뒤 돌이켜보니 의아하기도 했다.


특별한 즐거움의 순간들

구글캘린더 일기장

최근 자기 전에 초등학생인 두 아들에게 여행일기를 읽어주는데 반응이 좋다. 가족이 함께 경험한 즐거운 시간을 시간순서대로 세세하게 읽어주니 편안해하고 잠도 잘 잔다. 일종의 자장가가 되어버렸다. 나도 꽤 구체적으로 기록된 일기를 다시 읽다 보면 그때의 즐거운 기분이 더 생생하게 다시 떠오른다. 다음 여행 때는 이런저런 부분도 더 자세하게 기록해 봐야지 하며 자연스레 개선점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요즘에는 평소 무박으로 가는 주말 나들이도 여행으로 취급하고 세세하게 잘 기록해두고 있다. PDF 포맷으로 일기를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나들이'란 분류로 책갈피도 해둔다. 1박 이상하는 여행도 마찬가지다. 



일상 속 작은 성공들

일상 속 작은 성공의 경험도 꼭 기록하는 편이다. 최근 초등학교 4학년인 첫째와 1학년인 둘째가 부쩍 자주 다툰다. 가만히 옆에서 관찰해 보면 둘째가 형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형의 '다그치는 듯한 말투'에 곧장 소리 빽 지르는 반응을 보일 때가 있었다. 첫째가 알아듣도록 이 상황을 설명해 주고 조금 더 순한 말투로 동생에게 이야기하라고 말해줬고 둘째에게는 형이 하는 말에 무조건 화를 내지 말고 엄마 아빠에게 도움이 요청하라고 말해줬다. 다행히 더 이상 싸우지 않았고 그날을 평화롭게 마무리했던 성공적인 경험이었다.


직장생활 속 작은 성공들

이건 내가 첫 직장에서 제대로 못했던 기록이다. 돌이켜보면 일을 잘 해냈던 순간들에 대한 기억이 있는데 일기장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다. 힘들었던 것들에 대한 기록이 수북이 쌓여있다. 직장 3년 차쯤의 일기를 보면 이미 소진증후군이 나타나고 있었고 퇴사해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들도 꽤 보인다. 그런데도 그 후 3년을 더 있었다. 어쨌든 일을 해냈던 그런 순간들을 좀 더 세세하게 기록하고 책갈피 해뒀다면 어땠을까. 조명을 받는 대단한 성공이 아니더라도, 오늘 하루를 무탈하게 지나가게 해주는 작은 성공들도 기록했다면 어땠을까. 지금은 작은 성공이라도 웬만하면 기록하는 편이다. 


소진증후군이 오기 전에 이런 기록습관을 잡아두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소진이라는 어두컴컴한 터널로 들어와 버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분노와 슬픔의 자리

소진이 왔을 때 대처하는 방법 중 하나가 나의 고통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친한 친구, 가족 등 지인과 속앓이를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치유적이기까지 하다. 심리내적으로도 그렇고 필요하다면 얼른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가끔 뉴스에서 극심한 직장생활의 고충으로 안타까운 선택을 한 소식을 듣는다. 마음이 쓰리다. 마음이 지친 사람들은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생각해 내는 것조차도 어려울 것이다. 말하면 되려 나약하다며 비난받지 않을지 걱정도 될 것이다. 


이럴 때 일기는 일차적으로 응어리를 털어내놓기 아주 좋다. 누구에게 내놓으면 좋을지 모르겠는, 그런 분노와 슬픔을 털어놓기 좋다. 지쳐버린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놓기 좋다. 이후에 다시 읽어보며 누구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고민해 볼 수도 있다. 비난받을 위험 없이 말이다. 


첫 직장에서 소진증후군을 겪으며 긍정적인 사건들보다 부정적인 사건들을 더 많이 쓴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나는 잘했다고 생각한다. 이와 더불어 그 가운데서도 좋았던 순간들, 경험들을 세세하게 기록해 뒀다면 더 좋았을 테다.


일기를 쓰고 있는가? 희로애락 모두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자. 분노와 슬픔의 악순환은 끊어주고 기쁨과 즐거움을 더해줄 것이다. 그것이 역사기록의 힘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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