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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못 할 응어리를 풀어놓는 비밀일기장 2

[일기에 진심인 편입니다-개정판] 1장 2부

"오래된 일기" by ChatGPT4 Image Generator


(1부에서 이어짐)


고통이 일깨운 나의 일기습관

나의 첫 일기는 반성문이자 기도문이었다. 일기보다는 신앙메모에 가까운 형태였다. 하지만 중간중간 당시의 일상이 담겨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때부터 일기를 썼다고 생각하고 있다. 


20살 때였는데 반년 정도는 매일 같이 썼다. 그러다 뚝 끊겼다. 해외로 공부하러 가게 되었던 것이다. 영어를 배우고 그곳 문화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다시 쓰게 된 것은 몇 년 뒤다.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나고 학업이 중단되었으며 공황장애를 겪게 된 후였다. 


당시 공황장애는 지금만큼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 또한 무지했고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사람은 불가해한 것에 대해 불안해한다. 온갖 추측이 오가는 중에도 어떻게든 유학생활을 유지하려 했지만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나는 그곳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대학에 휴학을 결정하고 황망한 마음으로 교수님들께 갑자기 떠나야 했던 사정을 알리던 내가 떠오른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던 것이 일기다. 지금 쓰는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피는 일기는 아니었고 그저 이 이해하지 못할 고통을 토로하고 또 심적 생존을 위해 긍정적인 것, 감사한 것을 찾아보려는 발버둥이었다. 비록 유학은 실패했지만 지난 4년간 감사했던 것 10가지를 쓴 일기가 아직 남아있다. 


아직도 이걸 쓸 때의 마음이 기억난다. 감사의 마음이 차올라 쓴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부정적인 마음에 점령당하지 않기 위해 짜내듯 찾아내고 쓴 것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감사한 것을 찾으려 애썼는데 지금 봐도 감사해야 할 만한 일들이란 생각은 든다. 다만 그때 내 마음과 감정은 붕괴되어 있었고 좋은 감정들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상태였다. 


이 이후로 나는 평생 일기를 곁에 끼고 살아가게 된다. 


고통의 암초를 통과한 나만의 항해일지

인생을 항해로 비유한다면 내 일기장은 항해일지일 것이다. 내 항해일지는 올해로 22년째를 맞았고 5,000쪽을 훌쩍 넘었다. 왠지 두툼한 장편 이야기를 하나 쓴 것 같은 뿌듯한 느낌도 든다. 


20대 중반의 경제적, 심리적 붕괴를 겪은 지도 벌써 20년이 다되어간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다. 그 사이에 일어난 에피소드들을 일기장에서 다시 읽다 보면 여전히 목밑에서 쓰라린 맛이 올라온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감사하다. 삶의 많은 측면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공황장애와는 오랜 시간 싸웠다. 지금은 그것을 극복했다고 해야 할지, 적응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끔 불편할 때도 있지만 이제는 평안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처음의 고통이 너무도 컸기에 이로부터 회복한 것이 더욱 크게 감사한 일로 느껴진다. 하지만 인생이란 다측면적인 것이다. 나에게 경제적, 심리적 측면의 시련만 내리지 않는다. 첫 직장에서는 소진증후군이라는 새로운 암초에 직면했으며 결혼하고 두 아들을 양육하는 사회적 측면의 도전도 마주했다. 


시련과 도전은 지금도 계속되는 중이고 내 일기장도 여전히 쓰이고 있는 중이다. 


일기가 답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경험을 쭉 써 내려가는 일기가 언제나, 자동적으로 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수학문제를 풀 때 풀이과정을 쓰지 않는가. 복잡한 문제일수록 암산으로 모든 것을 하려는 것은 어리석다. 그리고 인생문제라고 할만한 것들은 당연히 복잡한 편이다. 


즉, 일기는 인생문제의 풀이과정을 쓰는 노트인 것이다. 


차분히 내가 겪은 상황을 글로 풀어나가다 보면 그 자체로 답을 얻기도 한다. 상황을 제대로 이해 못 해서 일어나는 문제도 있으니까 말이다. 스스로 답을 얻을 수 없다면 다른 누군가에게 답을 구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일기를 쓰다 보면 정확히 상황 설명할 수 있는 준비가 된다. 


이제는 인생문제를 일기에 기록하지 않고 기억에만 맡기는 것이 마치 암산으로 다 풀어보려는 시도로 느껴진다. 오랜 시간 일기 쓰기에 워낙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쓴 이 인생문제 풀이과정은 때로 이제 초등학생인 두 아들에게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도 된다. 아직 아이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주제는 빼고 쉽고 즐거운 이야기들을 선별해서 자기 전에 읽어준다. 아무래도 여행 일기를 가장 좋아한다. 여행지에서 생겼던 즐거운 일과 더불어 크고 작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등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비밀일기장이다보니 당연히 내용을 있는 그대로 다 읽어줄 수는 없고 읽으면서 자체 편집을 한다. 


이 두툼한 항해일지가 나 자신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에게, 가까운 지인들에게, 그리고 또 어쩌면 대중에게도 가치 있는 것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요즘에 더욱 하게 되었다. 편집을 거친다면 말이다. 요즘에는 내 일기장을 토대로 에세이 써보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일기는 이렇게 누군가 즐길 수 있는 이야기로 발전할 잠재력도 품고 있다. 


기쁨의 기록도 세세하게

거리에 나가 여러 사람에게 소리쳐 자랑하고 싶게 타오르는 정열, 그러나 자랑하자면 말은 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기쁨이 있는 반면에 또 그런 슬픔도 없지 않은 것이다.

이태준, <문장강화>


희로애락의 인생에서 슬픔과 고통만 강조한 것 같다. 하지만 기쁨도 고통만큼이나 기록을 부른다. 여행 가면 사진 밖에 남지 않는다고들 하지 않는가. 사진과 영상은 신속하고 간편한 기록이다. 즐거운 일이 있으면 우리는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또 찍은 것을 온라인에 공유한다. 사실 현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수많은 기록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다만 다수와 공유하는 공개기록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점점 더 누군가 '좋아요' 누를만한 것들만 포착하고 기록으로 남기게 되기 쉬운 시대다. 

구글캘린더 일기장. 2024년 제주여행 1일 차.

그래서인지 글로 남기는 기록이나 공유하지 않는 비밀일기는 비교적 매력이 떨어져 보인다. 아무래도 글이 사진이나 영상보다는 품이 좀 더 들어가기 때문이고 사진이나 영상처럼 한눈에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좋아요'란 보상도 없다. 좋아요의 숫자가 힘이 되는 세상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은 힘을 잃는다. 


하지만 그렇게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는 빙산의 일각도 수면 아래의 거대한 빙산이 있어야 흔들리지 않고 수면 위를 거닐 수 있다. 비밀일기는 수면 아래 나의 거대한 일상을 담아낼 수 있고 또 그 일상을 살피는 기록이 되어준다. 


글로 된 기록은 사진 및 영상과 마찬가지로 그만의 장점이 있다. 글은 속마음과 생각을 명확히 표현하기에 좋다. 사진과 영상에 비해 용량도 덜 나가고 종이에 인쇄하기도 편리하다. 펜(아날로그), 스마트폰 및 키보드(디지털) 등으로 어디서든 곧바로 기록할 수 있다. 즉, 기록, 관리 그리고 다시 읽기가 용이하다. 물론 사진, 영상 그리고 글을 잘 조합해서 남기는 기록이 가장 이상적이다. 


나의 예전 일기를 읽다 보면 인생풍파에 대해 아주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야 왜 인생의 순풍도 그만큼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을까 후회를 했다. 지금은 의식적으로 좋은 일들에 대해 자세히 쓰려고 한다. 예를 들면 여행일기를 더 세세하게 쓰기로 했다. 올해 초에 제주도에 가족여행을 다녀왔는데 특별히 신경 써서 세세하게 일기를 써봤다(그림참고). 다른 장에서 '타임테이블 일기 쓰기'로 소개해드릴 방법이다. 


현장에서 시간과 장소를 곧바로 메모하는데 캘린더 앱 만한 것이 없어서 일정과 함께 일기를 쓰고 있다. 자기 전에 아이들에게 읽어주기도 하는데 반응이 아주 좋다. 벌써 두세 번 다시 읽어줬다. 아이들이 유심히 듣다가 자신들이 기억하는 또 다른 장면들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듣다 보면 교육적으로도 이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일기를 꼭 썼으면 하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다. 


아이들의 인생항해에도 항해일지가 한 자리를 꼭 차지하기를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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