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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내놓을 이야기를 심는 비밀일기장

[일기에 진심인 편입니다-개정판] 5장

"일기를 에세이로" By ChatGPT4 Image Generator



삶을 견뎌낸 사람들은 누구나 할 이야기가 있다.

메리 카, <인생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



비밀일기는 견뎌내 온 삶을 오롯이 담을 수 있다. 누구에게 내놓을 수 없는 벌거벗은 듯한 수치심까지도 말이다.


그렇다고 세상에 읽혀지지 못하고 내 가슴속에만 묻혀 영영 사라질 이야기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흘러 사건이 마무리 되고 마음이 단단해지면 그 중 몇은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되기도 한다.


'세상'이 꼭 여기 브런치스토리나 서점의 매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이 '세상'이다. 내 경험이 머리와 마음속에서 정리되고 나면 지인에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비밀스런 마음의 방에서 세상 밖으로 마침내 나온 것이다. 


지인과 공유할 이야기 심어두기

말주변 없어 얼굴 붉혔던

나는 예전에 말을 참 못하는 사람이었다. 내향적인 점도 한몫했겠지만 할 이야기가 없을 때 그 침묵이 너무나 불편했다. 말주변이 없고 쉽게 얼굴이 붉어지는 그런 사람있지 않나. 그게 나였다. 

 

그러다 일기를 쓰면서 점점 바꼈다.


일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쓰다보니 대화가 끊겼을 때 꺼낼 수 있는 주제들이 늘어났다. 점점 대화를 할 때 '할 이야기가 없으면 어쩌지'하는 불안감이 없어졌고 안정감이 생겼다. 그 대화 자체도 일기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대화를 돌아보며 다음에는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시간도 추가로 가질 수 있었다. 대화를 기록하는 습관은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는데 말실수를 피하고 신중히 말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꼭 특이하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써두라는 말이 아니다. 기본기는 오늘 하루의 경험을 시간순서대로 쓰는 것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희안하게도 있는 그대로 쓰다보면 이야기하는 말주변이 는다. 돌이켜보면 일상대화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서로의 근황을 전하는 것 아닌가. 근황이란 말그대로 내게 있었던 일을 상대에게 알리는 일이고 이것이 곧 일기에 쓰는 이야기들이다. 


매일 근황을 내 일기에게 알려주니 말주변이 늘 수 밖에 없다. 


사실을 시간순서대로

초등학생 아들이 학교에서 가져온 알림장에 보면 일기에 '학교에 갔다. 공부했다. 밥을 먹었다. 집에 왔다. 게임을 했다.'는 식으로 사실만 나열하지 말라고 써져있다. 생각과 감정을 중심으로 자기표현을 하라고 되어있다. 정답이다. 하지만 '사실 있는 그대로 쓰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성인이 될 수록 더욱 그렇다. 시간이 갈수록 생각과 감정 뿐만 아니라 우리 말과 행동의 동선도 복잡해진다. 비밀일기에 경험을 있는 그대로, 핵심만 요약해서 쓰는 훈련을 하다보면 이런 복잡한 이야기의 구조가 점점 더 쉽고 빠르게 파악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초등학교 일기숙제 외에도 중등, 고등 또는 대학 일기쓰기 수업이 있으면 어떨까 싶다. 일기쓰기에 정해진 틀은 없다지만 관찰기록하기, 말과 행동 기록하기, 사실과 해석 구분하기, 상황 묘사와 요약하기 등 일기를 풍성하고 쓸모있게 만들어줄 수 있는 스킬들이 꽤 있는데 말이다.


평소에 내가 경험하는 이야기들 뿐만 아니라 관심있는 뉴스 또는 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비밀일기에 마음껏 써두자. 그렇게 쓰는 것만으로도 각인 효과가 있어서 다음 대화에서 자동적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물론 즉석에서 생각나는대로 말로 다 뱉어서는 안되겠지만 말이다.


대중과 공유할 이야기

브런치스토리 작가들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을 결심을 한 이들에게도 비밀일기는 요긴할 것이다. 


나는 여태 브런치스토리에서 자전적 에세이를 써본적은 없다. 이번 매거진을 준비하면서 접한 메리 카의 책 <인생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가 불을 지폈다. 그런 관심을 가지게 되니 일기장이 달리 보였다. 현재 내 일기장은 5,000쪽이 넘었고 가장 오래된 일기는 2001년도의 것이다. 참고자료로 쓰기에 훌륭한 양이다.


다만 이 중에 어떤 이야기를 써야할지 고민이 된다. 내용이 아주 개인적인 것이라 대중의 관심과 접점을 찾으려 고심하고 있다. 20년 전쯤 샌프란시스코에서 4년 정도 살았던 적이 있는데 해외생활이라는 특이점이 있으니 이것으로 시작해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다.


이후에도 공황장애 발병초기임에도 군생활을 안정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이야기, 첫직장에서 소진증후군을 겪은 이야기 등 몇가지 더 떠오른다. 최근에는 예민한 첫째 때문에 쉽지 않은 육아를 해온 이야기도 일기에 많이 쌓이고 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야생화 같은 이야기들을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꽃다발로 다듬어 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여태 비밀일기를 써오지 않았더라도 지금부터 바로 시작할 수 있다. 지금부터 쌓는 이야기도 후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고 비어있는 앞의 이야기들은 회상으로 간단히 써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기억은 흐릿해지니까 빨리 시작할 수록 좋다. 


일기는 일기로

세상에 내놓을 이야기를 심는다고 제목에서 표현했는데 애초에 일기에 쓸 때 부터 '나중에 책을 내야지'란 생각으로 일기를 쓰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되려 반대로 '공개하지 않을 것'이란 전제를 유지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즉, 일기는 일기로 남겨놓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꾸며야 하는 압박'에서 자유로운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다. 이태준 작가님에 따르면 일상에는 절실미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누군가의 눈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일기의 '절실미'를 죽이지 않을까 걱정 된다.


누구에게 있어서나 생활처럼 절실한 것은 없다. 절실한 생활이니까 생활에서 얻는 감상은 모두 절실하다. 공연히 꾸밀 필요가 없다. 돌을 다듬으면 오히려 돌의 무게가 없어 보이듯, 워낙 자체가 절실한 것을 수식하다가는 도리어 절실미(切實味)를 죽인다. 문득 깨닫고 느껴짐을 솔직히만 적을 것이다. (일기에 관한 장에서)

이태준, <문장강화>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없는 비밀일기는 일상의 절실함을 담기에 아주 적절하다. 


우리네 일상을 돌아보면 고독과 만남이 순환 될 때 마음과 관계가 건강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독에만 갖혀도 안되고 만남에만 취해서도 안된다. 만남 후에는 '혼자만의 방'에서 고독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이 순환을 통해 집단의 일부분으로서 녹아들이가는 안정감과 온전한 개인으로서 분리감이 양립한다. 


일기는 고독한 행위이지만 치유적일 수 있는 이유다. 


문자메세지, SNS나 블로그, 유튜브의 댓글로 언제든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 '기록 공유 기술'을 항상 손에 쥐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더욱 필요한 행위가 아닐까. 


비밀일기가 좋다는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이제 구체적으로 일기를 어떻게 쓰면 좋을지 살펴보고 싶다. 책으로 치자면 다음장부터는 하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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