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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무빙 Aug 21. 2020

탠저린, 주목받지 못한 이들

01. 탠저린의 의미 

 ‘탠저린’, 주황색 열매를 의미하는 영화 제목은 영화의 내용과 동떨어져 보인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인생은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기엔 행복하지도 않고, 상큼하지도 않아 오렌지색으로 물들 수도 없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각자의 행복을 좇아가지만, 결국 그곳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그렇지만 감독은 이 영화에 탠저린이란 이름을 붙인다. 상큼한 과일의 이름을 붙여서 그들의 인생을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보이기 위함일까 혹은 달다고 상상했던 과일을 한입 물었을 때 오는 신맛의 씁쓸함일까. 이 영화는 그 후자에 가깝다. 미국, 할리우드 그저 동경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그곳을 감독은 더 이상 상큼함이 아닌 신맛, 씁쓸한 맛으로 그들에게 다가간다. 보이기에는 맛있게 익은 열매지만 먹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 그 공간이라는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 2개의 단어로 이뤄진 한 꿈이 삶을 갉아먹기도 한다.  


02. 그들이 사는 세상 

 영화 ‘탠저린’으로 단숨에 스타 감독이란 칭호를 받게 된다. 숀 베이커 감독, 사프디 형제 감독, 베리 젱킨스 감독 등을 보면 이제 영화계는 허구를 얼마나 실제처럼 묘사할 것인가에 주목하지 않고,  그동안 외면받은 이들을 마주한다. 허구로 악과 약자를 그리기에는 현실의 문제가 더욱더 크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다. 물론 이 또한 어느 정도 한계점이 있다. ‘여성’ 부분에 말하는 감독들은 점차 많지만, 그들의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칭해주는 이들이 없다. 좋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있지만, 이 정도 걸어왔음에 감탄하며 더 밝은 내일의 영화를 기대할 뿐이다. 만족이 아닌 기대로 관객이 화답하면, 영화계는 변화한다. 


 숀 베이커 감독은 그동안 안 보여줬던 세상을 다른 측면에서 마주한다. 아이폰으로 찍은 이 영화는(나도 아이폰인데, 반성한다.) 미국의 상징 도시를 다룬다. 이번 영화에서는 ‘할리우드’를 담아서 풀어낸다. 행복으로 가득 찼던, 부유로 가득 찼던 공간에서 소외당하는 이들의 일상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그동안 영화들이 알아야 하는, 소외당하는 이들을 어떤 식으로 배제하고서 영화를 제작하였는지를 주목하게 된다. 또한 이런 소수자를 주목하는 영화는 최근 해외 독립 영화에서 계속해서 주된 소재로 사용된다. 사프디 형제는 거대한 범죄 속에서 인간과 마주하지만 숀 베이커는 일상에서 인간과 마주한다. 하지만 그 일상은 사회적으로 옳지 않음이라고 형용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살아남을 방법을 주긴 하였는가.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같이 살고자 하나 사회는 그들에게 살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03. 영화 연출

 영화는 주된 인물이 3명 나온다. 이야기 전반을 이끌어 가는 신디, 신디에게 그녀의 남자친구가 바람피웠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알렉산드라, 마지막으로는 택시 운전사. 주인공들 각자는 일정한 상황에 놓여있다. 신디는 자신의 애인과 바람 피운 여성을 찾고, 알렉산드라는 공연을 한다. 택시 운전사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생활한다. 3명의 이야기로 따라갔던 영화였지만, 그 이후 바로 감독은 눈을 돌려 그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발언권을 부여한다. 영화 자체가 사회에서 소수라고 칭해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기에 영화 속에서도 결국 소수로 존재하는 이들이 없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영화 장면 중에서 신디는 잠시 길을 잃고서 한 벤치에 앉아 생각한다. 그녀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바로 지하철을 타러 떠난다. 그 장면에서 버스의 전광판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 그 전광판 사인에서는 절대 놓아주지 않을거 라면서 한 눈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 그녀의 얼굴 클로즈업(신디), 뒤에서 전광판과 그녀의 뒷모습을 교차해서 연출한다.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2달러 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가난인가 혹은 그저 정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떠나보낸 것에 대한 배신감인지 혹은 자신의 친구가 자신의 곁을 떠나 버린 것에 대한 씁쓸함의 감정인가. 혹은 이 모든 것을 통칭하는 모든 감정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것인가. 그녀는 영화의 엔딩에서 어느 정도 그 답을 내어주었다. 영화는 하루 종일 신디가 산체스와 바람피운 여성을 찾으러 떠나는 내용이다. 출소한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다. 그렇지만 추후 산체스와 알렉산드라가 만났다는 말에 그 순간 산체스를 포기하면서 알렉산드라를 포기한다. 그녀는 모든 관계를 끊어 버린다. 그녀에게 2달러라도 그녀의 손에 있었다면 다시 산체스와 알렉산드라의 머리를 잡았을 수도 있다. 그 이후 바로 자신의 일을 하러 가겠다는 신디는 그들의 머리를 잡기 위한 준비처럼 보인다. 결국 그녀를 절대 놓아주지 않는 것은 알렉산드라도 산체스도 아니다. 결구 일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무일푼의 가난함이다. 


04. 오물테러 사건 

 영화의 엔딩에서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생겨난다. 바로 오물 테러다. 그 순간에는 다시 알렉산드라와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발을 내어주는 알렉산드라에게 고맙다는 말이 아니라, ‘같이 벗고 있을까’라고 말하는 모습은 숀 베이커 감독의 ‘플로리다 프로젝트’엔딩과도 비슷하다. 최악의 사건을 만들어서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아닌 그저 피하는 것, 그저 그 순간에 사건의 본질과 벗어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감독은 주인공들에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주인공을 배치한다. 사건을 해결할 수 없을 바에는 그저 그 현실에서 잠시 떠나버리자. 

 영화의 중반 모두가 도넛 가게로 모인다. 서로를 도와줄 수 있는 한 번의 말이면 해결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도와주지 않는 식으로 문제를 풀어낸다. 뭉쳐버린 실은 풀려고 하는 것이 아닌 더 심하게 꼬아서 만들어 버린다. 사건은 해결되지 않고, 한 가정은 흩어지고, 커플은 헤어지고 일자리를 잃는다.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악으로만 남아있다. 그 상황을 더 악하게 만드는 것도 결국 자신만 죽을 수는 없다면서 발악하는 것처럼 보인다.


05. 크리스마스 이브 

  영화는 크리스마스 이브란 설정을 가지고 왔다. 누군가의 탄생을 축하하는 이 날은 그들에게는 말만 축복의 날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탄생을 축하하며 모두 행복한 날에 영화 속 인물들은 크리스마스와 동떨어져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결국 트렌스젠더라는 점이다. 기독교는 LGBTQ에 반대하기에 기독교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머문다.  아르메니아 출신인 택시는 크리스마스는 미국인들의 종교지 자신의 종교가 아니라면서 화를 낸다. 결국 기독교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받은 이들의 반항이자, 울분이 보이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그 누구도 크리스마스라면서 축하한다고 전하지 않는다. 택시 기사의 말처럼 그저 그들은 살아야 하는 하루일 뿐이다. 

 영화는 초반부터 ‘이건 막장 드라마야’라고 말한다. 도를 넘어서는 감정들의 조합들은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의 막장처럼 치부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를 직접 ‘막장’이라고 표현함으로 이 모든 것이 사실로서 존재하게 된다. 

 물론 아쉬움도 있다. 숀 베이커 사건에서 기승전결이 분명 있지만, 서사에서 부족한 측면이 많다. 갑작스러운 다른 택시 기사와의 이야기라든지 혹은 이야기에 중요하지 않은 택시 기사의 손님들의 이야기 등은 영화의 사건과 다소 떨어지고 영화의 텐션을 떨어지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만들려고 했던 리얼리즘이기에, 다른 시선으로 현실을 담아내기에 충분했다며 말을 마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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