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에게 (برای سماء,2019)
0.
<사마에게>를 ‘사적 다큐멘터리’라고 명명하기엔 조심스럽지만, 우리는 감독이 자신의 딸에게 보내는, 아직 전해지지 않은 편지를 읽는다는 점에서 아주 개인적 영역 안으로 소환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영화가 사실상 사마를 향한 편지가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서 시작되는 영화는, 정보의 운신 폭도 좁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에게>만으론 시리아 내전 상황을 알기엔 불가능하다. 나 역시 이 지면을 빌어 시리아의 상황을 시시콜콜 적고 싶지 않다. <사마에게>와 이 글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지금 당장 시리아의 상황을 직접 알아보는 것이다.
1.
정부군의 폭탄이 떨어지고, 와드 알 카팁(이하 와드)와 함자 부부는 상황 종료 후 자신의 집을 돌아본다. 파괴된 자신의 정원에서 함자는 죽은 식물들을 보고 아사드를 욕한다. 전쟁은 그들의 조그마한 정원조차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와의 통화에서 총성이 울리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 간의 사적인 대화는 총성이라는 물리적, 외적 존재에 의해서 위협받는다. 이렇듯 <사마에게>에서의 전쟁은 이따금씩 사적인 공간을 위협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런 장면들은 영화의 강약 리듬뿐만 아니라 ‘사적 세계’ 혹은 ‘사적 공간’을 창설한다. 화자이자 주인공인 와드는 포화 속에서 결혼과 출산, 육아와 같은 일상을 영위하려고 무던히 애를 쓴다. 그들은 전쟁에서 허용 불가능한 일들을 해내려고 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가장 안온한 순간에조차 불안이 그림자처럼 드리우고 있는 이 공간에서 아무리 개인의 세계나 희망을 만들어본들, 지속가능하다고 믿어지는 것은 아닐 테다. 그것은 애초에 감독 스스로도 지키지 못할 약속이다. 승합차를 타고 마침내 알레포를 떠나는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전장에서 일상은 지속 할 수 없다. 오직 죽음만이 다가올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드는 알레포의 현재 상태를 알려야한다는 마음으로 오롯이 존재한다. 기록은 결코 이야기에 의해서나 정치적 목적에 의해서 중단될 수 없다. 그러니 그녀는 자신의 주변부에서 벌어지는 모든 순간을 기록해야만 한다. 카메라는 이따금씩 초점이 맞지 않고 흔들리며, 시야가 아주 좁아지기도 하지만, 그녀의 카메라는 멈추지 않는다. 심지어 난리 통에 사마를 찾아야하는 순간에조차 카메라를 끄지 않는다. 물론 시리아에 존재하는 다른 카메라들 역시 마찬가지의 입장일 것이다. 그러나 <사마에게>에서의 카메라는 매일 감독 자신의 사적 세계가 무너지는 과정을 담담히 담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우리가 당연히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그 세계를, <사마에게>는 오히려 주목하여 보여준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지점은 <사마에게>를 지금의 포맷으로 만든 사람은 공동 감독 에드워드 와츠라는 사실이다. 그는 와드에게 어떤 촬영 지시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마를 발견하여 지금의 이야기 구조를 만들었다, 그러니 내러티브를 만들려는 의도와, 현장의 의도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히 영화에 제시되는 이미지들이 내러티브의 내용과 충돌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지 자체는 유려한 편집과 나레이션 덕분에 서사에 맞게 구축되어 있다. 영화를 만들려는 의도와 저널리즘을 의도했던 촬영의 충돌은 사적 세계가 다시 두 개의 차원으로 나뉜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가 편집의 구성으로 만들어내는 사후적 세계라면 다른 하나는 촬영 당시의 그 자체가 만들어내는 동시적 세계다. 즉, 우리는 카메라 앞의 사적 세계와 카메라 뒤의 사적 세계를 동시에 감각하는 것이다. 카메라 앞의 사적 세계는 내러티브에 복무한다. 그것은 전쟁 속에서 잠깐의 일상과 웃음과 희망을 구축한다. 카메라 뒤의 세계는 지극히 본능적이다. 죽음과 폭력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 움직이는 카메라. 그러니 카메라는 살아남으려 한다. 아니 살아남아야 한다.
2.
‘살아남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마에게>는 죽음과 삶의 이미지가 자주 교차된다. 이것이 절망/희망을 상징한다는 도식적 해석에 딴죽을 걸고 싶지 않다. 내가 집중하고 싶은 것은 이미지가 뜻하는 의미가 아니라 감독의 태도다. 그녀는 죽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삶을 찾으려 한다. 그것은 삶을 확인하려는 집착에 가깝다. 나와 함께 호흡하고 있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은, 살아있는 자신조차 무감각하게 만든다. 감정을 느낄 새가 없었다는 대사를 떠올려보라. 와드는 그 무뎌짐이 괴로워 필사적으로 삶을 찾는다. 사마가 태어났을 때 죽은 사람이 떠올랐다는 와드의 말은, 생을 바라봄으로써 오히려 죽음을 떠올리며 다시 자신이 살아있음을 감각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더욱 더 눈을 돌리려 하지 않는다. 강으로 흘러들어온 학살의 흔적부터, 폭격으로 죽은 아이들의 시체, 죽은 줄만 알았던 신생아를 살리는 순간들 모두 지켜보아야만 한다. 그것은 기적이나 비극을 ‘포착’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녀를 마주하고 있는 이들의 ‘살아있음’에 대한,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자, 자신이 무너지지 않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다. 이는 돌려 말하면 살고 싶다고 말하는 의지이기도 하다. 와드는 카메라를 빌어 살고자 한다. 그녀에게 카메라는 이제 기록이자 생존 수단이다. 그러나 삶을 찾아가며 살아남는 과정에서 <사마에게>는 우려의 지점을 남겨둔다.
그것에 앞서 개인적인 관람 체험을 말해야겠다. 상영관 내부의 반응은 내가 이 영화를 두고 벌어졌던 의심과 우려의 지점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사마에게>에서 많은 사람들이 언급했던, 죽은 줄 알았던 신생아가 의료진의 노력으로 삶을 되찾는 장면이었다. 아기가 다시 눈을 뜨는 순간에 터져 나왔던 안도의 한숨들 사이에서,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서스펜스마저 느꼈다. (이는 알레포 탈출 시퀀스에서 되풀이 된다) 안도하면서도 혼란스러운 감정과 함께 떠오르는 의문들. 생으로 귀환하고 있는 저 상황이, ‘기적’이나 ‘삶의 희망’, 혹은 서스펜스라는 단어나 감정으로 치환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우리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저 아이를 대상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비판에서 영화는 자유롭지 않다. 그것은 와드의 딸 사마에게도 일정부분 적용이 된다. 영화의 초반, 포격 때문에 흩어진 사마를 찾아가는 장면이나 알레포가 처한 상황과 사마의 대비가 불러일으키는 효과는 분명 기능적인 면모가 있기 때문이다. 작중에 등장하는 죽음의 선명한 이미지들 또한 마찬가지다. 현실을 고발한다는 미명 아래 이미지를 자행하면서도 의심과 우려를 보는 이로 하여금 죄책감으로 환원시켜 의문 부호를 부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앞의 질문들은 와드가 그들과 함께 고통 받았던 당사자나 투쟁을 함께한 내부자라는 사실만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걸 감독 자신도 알아서일까. 와드는 자신에 대한 당위성을 끊임없이 찾는다. 자신이 알레포에 남아 있어도 되는지,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낳아도 되는지, 어떤 부모로 기억될지, 여기서 기록을 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끊임없이 묻고, 묻는다. 그런 측면에서 정당화는 <사마에게>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정당화야말로 <사마에게>에 등장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존재이자 생의 양태를 집착하는 태도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고민들, 카메라 바로 앞에 놓이어진 시체를 두고 녹화 버튼 끄거나 카메라를 내동댕이치지 못하는 상황들을 두고 그녀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윤리적 질문들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마에게>가 보여주고 싶은 건 전쟁이 만들어낸 인간(와드를 포함해서)의 상태이지, 지시나 결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허용 불가능한 전쟁에서, 윤리 또한 허용이 불가능한 상황은 아닐까.
3.
중요한 건 와드는 이마저도 회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윤리적 고민들을 대의라는 명분으로 성급하게 회피하지 않고 자신이 직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고백한다. 어느 누가 여기에 남을 이유를 찾기 위해, 또한 자신의 악몽을 보상하기 위해 촬영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는 다시 말하면 카메라 뒤에 서있는 자신의 무기력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아들의 시체를 두고 촬영을 하는 카메라를 질책하는 어머니의 외침은 영화 초반 아이의 시체를 두고 까닭 모를 울음을 터뜨렸다는 와드의 말과 조응한다. 자신의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도(물론 그 자신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지만) 아무것도 못한 채 생의 모습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는 이기적인 자신에 대한 처연한 고백. 영화의 질문은 이곳에서 ‘살아있어도’ 되는지, 자신의 기록 행위가 전장에서 필요한지 되묻는다. <사마에게>는 아주 개인적인 질문으로 전쟁을 대한다. 생존이라는 본능적인 욕구마저도 질문을 던져야 하는 상황, 그것이 <사마에게>가 감각하고, 감각시키는 전쟁이다.
카메라 뒤의 사적 세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중대한 가치를 지닌다. 그동안의 다큐멘터리가 카메라의 위치에 대해서 논쟁했다면 <사마에게>의 카메라는 생존 그 자체에 대한 당위성을 찾는다. 그리고 당위성에 대한 고민을 결단코 놓지 않는다. 와드의 기록행위는 이 지점에서 중요하다. 그녀의 말마따나 <사마에게>는 역사로 기억되길 거부한다. 시리아는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현장(現場)’이기 때문이다. 현재 진행형의 공간에서 카메라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와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 확장된다. 그들은 카메라에 담기지 않은, 존재했고, 존재하고, 존재할 사람들이다. 와드는 떠났지만, 알레포에는 여전히 사람이 남아있다. 그들은 ‘미래의 와드와 함자, 사마’다. 지옥 속에서도 여전히 생존과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일상을 영위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 존재에 대한 당위성을 찾기 위해 ‘살아남음’으로 저항하는 사람들. <사마에게>는 와드 부부와 사마, 그리고 공동감독 에드워드 와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영화가 아니다.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전장 안에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영화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너무나 많이 언급되어서 이제는 극복해야할 대상처럼 여겨지는 세르주 다네의 글(<카포>의 트래블링)을 소환하는 것을 이해하길 바란다. <사마에게>는 다네의 논의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와드는 죽음 앞에서 ‘불안과 동요’를 느끼지만, 결코 ‘곁눈질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뜨거운 응시로 응수한다. 그것은 이 시대의 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물음이다. 응시는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에 대한 정의를 다시 묻기도 한다. 뜨겁지만 동정하지 않는 거리. 방관자의 카메라도, 통제자의 카메라도 아닌, 살아남아야하는 카메라. 눈에 보이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는, ‘지금’의 영화.
4.
그러나 내가 무엇보다 <사마에게>에서 주목하는 지점은 와드가 내레이션을 맡았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자신의 촬영물을 다시 마주 본다. 이는 단순히 그때의 감정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감독 자신의 트라우마와 다시 대면하는 것이기도 하다. 심지어 영화의 응시보다도 더욱 치열한 응시로 말이다. 그녀는 수많은 이미지들 속에 잠재한 부끄러움, 고민, 나약함, 끔찍한 상흔을 마주하며 그때의 자신을 다시 고백한다. 그럼에도 와드는 결코 말을 멈추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 말은 멈추지 않았던 카메라와 동일시된다. 그 순간, 충돌했던 사적 세계들이 합일한다. 그럼으로 기록은 영화가 되고 영화는 기록이 되어 스크린 안팎을 넘나든다. 영화는 자신의 모든 힘을 짜내어 오롯이 기록을 전달하는데 힘쓴다. 어떤 미학적 야심도 없는 카메라 앞에서 세속의 기준은 무화된다. 그 절실함을,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