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련의 한국 상업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폐허 속에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 필사적인 것 같다. 언제나 누군가(특히 아이)를 지키기 위해 뛰었던 조성희는 말할 것도 없고, 어느샌가 연상호 역시 마찬가지의 형태를 보이며, 윤성현 역시 사춘기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단순히 물리적 폐허뿐만 아니라 상징적 폐허 역시 마찬가지다. <소리도 없이>의 태인 역시 초희를 지키기 위해 마지막 순간 필사적으로 뛴다.
물론 지킨다는 것은 전통적인 플롯 구조 중 하나지만, 온 세계의 목적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느낌은 최근의 한국 상업 영화들이나 일본 애니메이션의 세카이계뿐이다. 특히 앞의 영화들은 지키기 위해서라면 영화의 만듦새조차 부차적인 느낌마저 든다.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 필사적으로 만드는 것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영화가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니 아무리 다양한 언어(침묵을 포함해서)와 성별이 나와도 ‘지키기 위해서’ 단번에 봉합된다. 그것의 형태가 미래 기술의 힘이든, 인물들의 관계든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자막이 붙어있는 세상이 아니다. 수많은 언어와 관계들이 유발하는 갈등과 긴장, 혐오와 상처를 직시한 채 우리는 달려야 한다. 지키기 위한 과정으로써의 갈등과 위기가 아니라 갈등과 위기 그 자체를 해소해야만 우리는 지킬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