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 (정순,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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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명의 여성 노동자가 문 프레임 안에 걸린 채 비좁은 세탁실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공장의 상황과 그만둔 직원에 대한 뒷말들. 이어지는 장면. 근무 투입을 하기 전 살균을 위해 사람들이 들어온다. 먼저 들어와 있는 두 사람과, 뒤에 들어오는 앞 장면의 세 사람.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차곡차곡 들어와 마치 장막처럼 한 여성을 앞뒤로 막는다. 거기엔 알 듯 모를 듯 표정을 짓는 중년의 여성, 김정순(김금순)이 있다. 비좁은 공간에 켜켜이 갇혀있는 여성들. 그녀들은 흔하디 흔한 이름에 흔하디 흔한 표정을 짓는다. <정순>(2022)은 말하지 못하는 공간과 표정으로 한국 사회의 은폐된 단면을 말하려고 하는 영화다. 그 중심에는 장막의 세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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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정순>의 공간을 살펴보자.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건 단연 좁은 공간이다. 세탁실, 탈의실, 살균 처리실, 공장, 휴게실 등 하나 같이 좁은 공간에 여성들이 움직인다. 정순이 속해있는 사회는 바로 그런 곳이며 공간은 그녀를 둘러싸고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다. 일하는 공간만 그런가. 정순의 집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 역시 그렇다. 모처럼 쉬는 날인 정순은 직장 동료를 제외하고 사적으로 관계 맺는 유일한 인물인 딸 유진(윤금선아)에게 전화를 걸지만, 그녀는 일이 바빠 전화를 받을 수 없다. 정순이 홀로 앉아있는데, 카메라는 이때의 집을 조금 이상하게 제시한다. 비교적 넓은 공간인 거실이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부엌이 화면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다. 마치 그녀의 인생의 3분의 1을 부엌이 차지하고 있다는 듯 말이다. 과연 그 말대로 정순은 공장에서만 일하지 않는다. 애인인 영수(조현우)와 연애를 하면서도 그녀는 딸 유진과 예비 사위의 반찬을 걱정한다. 그녀는 공식적인 노동 현장인 공장에서도, 사적인 공간인 집에서도 끊임없이 일을 해야만 한다. <정순>에서 공간은 그 자체로 특별하다기보다 그 공간과 함께 있는 인물을 어떻게 제시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정순이 나오는 장면 대부분은 무엇인가 걸쳐져 화면을 차지한다. 평범한 대화 장면만큼은 쇼트-역 쇼트가 나올법한데도 누군가가 걸쳐서 나오거나 아니면 인물들을 일직선으로 세운 채 바라본다.(특히 정순과 영수는 연인 관계임에도 마주 서서 보는 신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정순>에서 정순은 그 제목과는 다르게 오롯이 등장할 수 없다. 카메라는 그녀의 영역을 계속해서 제한한다. 그녀가 홀로 피해를 감수해야 할 때나 온전히 나올 수 있게 된다. 좁은 공간에 갇힌 정순은 움직임마저 제한당한 채 가해의 장력을 고스란히 받는다. <정순>은 여성들이 살아가는 공간의 속성에 대하여 냉정하게 폭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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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서 공간이 인물들과 함께 어떻게 제시되는지가 중요하다고 썼다. 공간이 자아내는 성질에 반응하는 원초적인 존재는 바로 인물의 표정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정순의 표정은 다른 구석이 있다. 영화 초반, 도윤의 호통에 정순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자 더욱 혼이 난다. 상황에 맞지 않은 웃음은 이상하면서도 익숙하다. 그녀는 심각한 분위기에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는 것 같다.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정순의 얼굴은 그동안 그녀에게 쌓인 시간을 표상한다. 또한 그녀는 격한 감정이 낯설다는 걸 알려주기도 한다. 정순의 표정은 시종일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보통의 영화는 주로 표정의 풍부함으로 감정적 합일을 이루어내지만 <정순>은 오히려 감정적인 순간에 표정을 숨기거나 멀리서 바라본다. 가해자들을 용서할 수 없음에도 자신을 위해 합의를 해줄 수밖에 없는 딜레마를 겪을 때도 정순은 싱크대를 붙잡고 얼굴을 숨긴 채 운다. 정순을 떠올려보자, 예의 그 어색한 웃음이나 가끔 진심을 담은 웃음, 무미건조한 표정을 제외하고 기억에 남는 표정이 있는가? <정순>은 인물의 표정에서 공감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부러 공감을 피하려고 하는 것만 같다. 결코 단일한 경험이 될 수 없는 피해의 경험을 함부로 동일시하게 놔두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순의 얼굴은 다른 이와 비슷한 무엇이 아니라 정순 그녀만의 얼굴이 된다. 흔하디 흔한 이름을 가지고 흔하디 흔한 표정을 짓는 줄 알았던 여성들은 그때 서야 각기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정순을 연기한 김금순은 탁월한 연기와 얼굴을 선보인다. 김금순은 평범한 표정을 지을 때도 강렬한 인상을 남길 줄 안다. 분명 똑같은 표정이건만, 다른 감정이 서려 있음을 우리는 직감적으로 눈치챌 수 있게 된다. 마지막 장면, 정순의 표정은 그래서 더욱 강렬하다. 피해영상물 속에서의 자신을 공장 사람들이 보란 듯이 재연하는 그녀. 정순이 날리는 세상을 향한 일갈은 예의 그 웃음과 분노의 중간 어디쯤 있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정순의 얼굴을 통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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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의 얼굴과 그녀가 놓인 공간을 보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보이지 않는 무엇을 감각하게 된다. 영화는 그 존재를 명시적으로 제시하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정순이 곧 사위가 될 성호(고은렬)와 저녁을 먹은 후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자동문을 사이에 두고 카메라는 마치 식당 안에 있는 것처럼 서 있는데, 별안간 자동문이 열린다. 이상한 건 누구도 나가는 사람이 없음에도 문이 열렸단 사실이다. 둘은 한참 대화하다 유진이 등장하기 직전에 컷이 바뀐다. 카메라는 앞의 앵글로 돌아가는데, 이때는 거꾸로 자동문이 닫혀 버린다. 마치 카메라의 필터처럼 기능하는 문은 인물들을 왜곡하고 가로막는 존재를 암시한다. 마치 장막 안의 살아가는 인물들처럼 카메라는 서 있다. 장막을 극명하게 감각할 수 있는 공간인 공장을 살펴보자. 이곳의 노동자들은 일종의 유기체 세포처럼 모두 똑같은 옷을 입으며 각자의 역할을 나눠 움직인다. 일견 평등해 보이지만, 그중에도 위계질서는 분명히 나뉜다. 단순히 도윤이 대표하는 계급이나 성별 권력뿐만 아니라 같은 위치의 노동자여도 세대와 같이 아주 다른 장막들이 그들 사이를 가른다. 앞선 세탁실 장면에서 지희(정인혜)는 차라리 정규직 떨어지고 그만두고 싶다고 말할 수 있지만, 두 중년 여성들은 그럴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는 주인공인 정순의 장막에만 치중하지 않는다. 유진에게도, 단역에 불과한 외국인 노동자나 공장의 다른 노동자에게도, 심지어 가해자인 영수에게도 존재한다. 수많은 장막 중에 정순 다음으로 언급하고 싶은 인물은 유진이다. 유진에게 놓인 장막은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여성성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두드러진다. 그녀는 현장 일을 충분히 할 수 있음에도 여성이기에 사무실에 앉아있어야 하며, 화장했다는 이유로 칭찬 ‘받는다’. 심각한 건 그들이 악의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처럼 <정순>은 악의를 가진 가해자뿐만 아니라 무심코 지나치는 말 한마디에 담긴 차별의 감각을 놓치지 않는다. 주의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차별의 장막들. 영화를 보며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다른 장막을 감각하게 되는 것도 <정순>을 다르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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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장막은 누군가를 진실로 보지 않게 만든다. 그리고 <정순>은 장막으로 인해 왜곡되고 오해받는 존재를 강조하는 영화다. 그런 의미에서 <정순>에서 가장 무서운 건 공장의 윗사람들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정순>에 등장하는 그 어떤 가해에도 관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공장의 위계질서를 만들었던 이는 다름 아닌 그들이다. 거기에 맞물려 돌아가는 것은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여성의 성을 착취하게 만드는 남성문화다. 이런 구조 안에서 가해의 화살은 모든 여성에게 날아든다. 정순은 지극히 현실에 순응하고 있는 여성임에도 가해자들은 오히려 그런 그녀를 이용한다. 그들은 정순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평범한 얼굴의 사람들은 장막의 구조를 은폐하는데 일조하고 은폐된 구조는 그 안에 사는 모두를 공범으로 만든다. 하지만 <정순>은 더 나아가 눈길을 가해자의 악행만을 바라보지 않는다. 영화를 다면적으로 만들어주는 건 정순조차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과 유진이 피해를 당한 정순을 대하는 방식에서 피해자에 대한 또 다른 편견이 폭로될 때다. 가해자들을 단죄할 수 있음에도 정순은 그들을 놓아준다. 그런 그녀를 힐난하는 유진에게 정순은 울음을 터뜨리며 ‘이건 내 일’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정순은 다분히 복합적인 감정을 지닌 듯하다. 그녀는 체념하고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바로 세우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 즉 가해자를 응징하여 정의를 구현하기 직전에 멈춰 세운다. 그러고는 정순을 통해 무엇이 더 중요한지 질문한다. 처음 유포되었다는 걸 알았을 당시를 떠올려보자. 경찰에 신고한 것도, 이후 대응하는 것도 정순이 결정한 바는 무엇도 없었다. 그저 유진의 판단에 따라 사건이 진행되었을 뿐이다. 그때야 우리는 피해자가 당연히 취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대응이 어떤 이에게 상처를 남길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정순은 무기력하고 고통에 빠져있는, 우리가 흔히 피해자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결코 ‘쉽게’ 가해자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말할 필요 없이 지쳤음에도, 그녀는 일어서려고 애쓰기 위해 가해자들을 놓아준다. 그건 용서의 감정보다 주체로서의 각성에 가깝다. 이 모든 것을 응축한 장면이 바로 마지막 장면이다. 정순의 노동 현장이었던 공장에서, 그녀 특유의 표정을 지닌 다음, 세상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향해 보란 듯이 춤춘다. 그 순간, 잠시나마 이 모든 장막의 질서는 무너진다. 정순의 춤은 가해자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영화를 보며 가해자에게 분노하고 있을 우리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과연 우리도 장막의 세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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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끝에 가닿는 건 우리는 결국 누구에게 집중해야 하느냐다. 그러니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정순 그 자체이자 그녀를 살펴보는 일이다. 정순은 타인을 위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다. 타지에서 온 영수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자신을 거부함에도 노숙자(이은희)의 상태를 걱정하는 건 오직 그녀만이 하는 일이다. 그것이 때론 지나쳐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기도 하고, 타인이 자신보다 우선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그녀는 이제 자신을 챙기기로 한다. 자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 가해자들을 용서하고, 다시 공장으로 나가 가해자들을 당당히 대면하기도 한다. 모든 것이 끝난 후, 그녀는 여전히 좁은 공간에 있다. 바뀐 것이 있다면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차 안에서, 전에 없이 환한 웃음소리를 내며 오롯이 그녀만 등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도 정순의 미래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자신이 ‘정순’으로 있어도 괜찮음을 알고 있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그녀가 ‘정순’이라는 이정표를 세운 그 순간, 장막에 갇힌 한 여성은 비로소 장막 밖으로 손을 내밀 수 있게 된다. 그녀는 더 이상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넘어가는 ‘이모’나 ‘아줌마’가 아닌, ‘정순’으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