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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탄소포인트 Jan 02. 2023

저 너머로

모어 (모어, 2021)

0.


주디스 버틀러1)는 기존의 젠더이원론 체계를 뒤흔들며 섹슈얼리티조차 규범화 되어있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생물학적인 성’이라고 인식하는 섹스(Sex) 역시 젠더이원론 규범체계 때문에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마치 (적어도 생물학적으로는) 남성과 여성, 두 개의 순수한 성을 가진 육체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실제로는 그 어떤 과학이나 이론으로도 ‘순수한 몸’을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완벽한 남성의 신체’도, ‘완벽한 여성의 신체’도 인류는 합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젠더규범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이며 우리는 그 젠더규범을 수행한다. 그러나 규범에서 완벽히 벗어나지 못할지언정 다른 가능성을 품고 변화할 수 있는 것 역시 인간이다. 퀴어는 바로 그 젠더수행성에 대한 도전이자 공모와 전복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규범에 저항하는, 실천적 존재라는 것이 버틀러 이론의 주요 골자다. <모어>(2022)를 말하기 전에 버틀러의 이론을 길게 설명한 것은 <모어>의 주인공 ‘모지민’(이하 모어, 그러나 때에 따라서 두 이름을 혼용할 예정이다.)이 규범을 넘어 버틀러가 말하는 ‘실천’조차 공모하면서도 전복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모어/모지민은 애쓰고 있다는 점2)이 중요하겠다. 그리고 그것을 담아내는 이일하의 카메라는 그만큼이나 중요할 것이다.



1.


먼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나는 지금 모지민이라는 인물을 버틀러 이론에 들어맞는 존재라거나 퀴어의 어떤 존재로 한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외려 버틀러의 주장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지민 스스로도 <모어>라는 영화를 그런 방식으로 인식하지 않는 데3) 있다. 그4)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존재이며, 자신의 신체를 규범이나 정의에 종속하지 않으려는, 그저 모지민이기도 하고 모어(털 난 물고기)이기도 하거나 아니면 둘 모두인 존재일 뿐이다. 이는 어느 범주에서도 규정되지 않고자 하는 젠더퀴어 그 자체를 실현하고자 하는 몸짓 같기도 하다. 앞에서 인용한 인터뷰는 그런 측면에서 의미심장하다. 단순히 <모어>를 두고 흔히들 생각해내는 범주인 ‘퀴어 영화’를 주인공 스스로 부정하는 것에서도(물론 말 그대로의 부정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모지민이 카메라가 필연적으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의미 작용을 피사체로서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카메라와의 관계를 주목하게 만든다. 모지민 혹은 모어는 어떤 방식으로 카메라 앞에 서고자 하길 원하는가. 그리고 카메라 뒤의 이일하는 어떤 태도로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가. 그것을 밝히는 일이 <모어>의 핵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모어>는 사실 모지민이라는 인물을 카메라 앞에다 세울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부분이 설명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카메라 뒤의 존재와 어떤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지, 그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 어떤 위치와 존재로 여겨지고 있는지 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모어>에서의 모지민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이일하는 오롯이 모어라는 존재가 가진 그런 특질들을 보여주려 부단히 ‘애쓴다.’ 심지어 모지민은 얼마간 이를 이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우리가 흔히들 트랜스젠더 혹은 드랙들에게 갖는 편견을 한껏 보여주면서도, 그런 지점을 완전히 반박하는 장면들을 어느샌가 툭 던져 넣어버린다. 이를테면 모지민이 소변보는 장면 같은 것 말이다. 그나마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고 하는 사회에서도 모지민에 대해서, 또 드랙쇼에 대해서 떠올리는 건 ‘트랜스젠더’ 일 것이다. 그러나 <모어>의 카메라는 대담하게도 모지민이 ‘남성처럼’ 소변보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단순히 육체의 성기유무에 기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힘주어 말한다. (후에 한미니와의 인터뷰 장면에서 이에 대한 맥락이 나온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모어>를 퀴어의 축으로만 놓고 보면 곤란하다. 모지민의 말대로 <모어>는 영화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적 퍼포먼스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가 영화 내내 방방 뛰어다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는 결코 멈춰있지 않으려 한다. 예술이든 정체성이든. 그리고 이일하는 이에 호응하며 모어(이는 모지민이기도 하고 영화 <모어>이기도 하다)와 혼연일체가 된다.



혼연일체가 된 편집과 촬영의 힘은 오프닝 시퀀스부터 두드러진다.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자 <More>의 영어 제목이기도 한)인 ‘I am More'의 흥겨운 리듬과 함께 카메라가 지하의 공연장으로(지하라는 점 또한 상징적이다) 내려간다. 마치 그곳의 지배자처럼 등장하는 모어는 화려한 드랙쇼를 펼치는 모습과 함께 이리저리 클럽을 휘젓다 문득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고는 말한다. “팁이나 많이 내놔, 썅 것들아”.5) 그러고 내뱉는 애증의 감정과 함께 이윽고 “양년들”이 팁을 적게 준다고 타박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단적으로 모지민이라는 인물과 영화 <모어>를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숏이 있을까. 그에게 예술을 펼칠 수 있는 무대는 고단한 노동의 현장이기도 하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솔직한 욕망을 드러낼 뿐이다. 영화는 모지민이란 인물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어>가 가진 ‘뒤섞임’의 상태를 만들어 낸다. 무대에서 즐거운 듯 뛰어다니지만 드랙쇼에 대한 애증을 드러내는 장면이나, 드랙 분장을 한 채 한국 일상의 장소들을 보란 듯이 돌아다니는 것, 뮤직 비디오 장면들에서 립싱크(드랙 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같은 것은 가장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뒤섞임’ 일 것이다. 그러나 이 ‘뒤섞임’은 영화의 형태로까지 확장한다. 오프닝 시퀀스 말미로 돌아가 보자. 지하철에서 모지민은 잠이 든 것처럼 보이고, 마치 꿈처럼 제시되는 회전목마 신은 분명 재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일하는 이를 재현처럼 대하지 않는다. 엔딩 크레딧 어디를 보아도 회전목마 신에 등장하는 (모지민으로 추정되는) 아역이 누군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같이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뒤섞는 형태는 중간중간 삽입되는 모지민의 퍼포먼스 같은 짧은 숏들에게도 비슷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왜 <모어>는 다른 다큐멘터리와 다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가에 대한 실마리는 여기에 있을 것이 다. ‘뒤섞임’의 상태는 한 가지 더 있다. 모지민은 카메라와 둘만 있는 공간에서 감독을 향해 이런저런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지점은 그 자체로는 그렇게 특별하진 않지만, 모지민의 내레이션이나 뮤직 비디오 신과 맞물려 뒤섞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모지민이 젠더 퀴어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처럼, 이일하의 카메라는 모지민을 빌어 영화가 지닌 규칙과 경계를 넘나 든다. 이러한 태도는 영화 전반으로 유지되고, 모지민과 이일하는 <모어>를 통해 뒤섞이게 된다. 이일하는 <모어 >라는 영화 자체를 ‘모지민화’하면서 자신의 카메라 또한 변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2.



그런데 여기서 의문을 제기하고 싶은 지점이 있다. 정말로 <모어>는 ‘모지민화’만 된 영화일까? <모어>를 관장하는 이 ‘뒤섞임’은 어쩌면 둘 간의 교류 끝에 탄생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이일하의 과거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밖에 없다. 공교롭게도 그가 영화의 소재로 택하는 것은 경계에 걸쳐져 있는 사람들이다. <울보 권투부>(2014)는 일본에도 한국에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다’고 여겨지는 재일조선인들의 청춘을, <카운터스>(2017)는 야쿠자 출신으로서 혐오와 폭력을 폭력으로 대하는, 폭력과 평화의 중간 지점에 있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앞의 작품들이 <모어>와 같은 방식이라거나,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뜻이 아니다. 방식이 다르고 영화가 자아내는 감정의 양상이 다를지언정 이일하는 언제나 경계선의 사람들에게 반응해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어쩌면 그는 동물적 감각으로 영화를 찍는지도 모른다. <모어>를 처음 찍게 된 계기 역시 <카운터스>의 사진가 로디가 찍은 모지민의 사진을 보고 시작되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종합해볼 때 <모어>는 모지민이라는 인물이 어느 날 툭 튀어나와 탄생했다던가, 아니면 모지민이라는 인물 하나가 지탱하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할 순 없다. 누구 하나의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도약하는, 예술을 실현하기 위한 치열한 장에 가까울 정도다.



그러니 모지민이 영화를 두고 ‘변방에서 애쓰는 예술가의 영화’라고 지칭할 만하다. 그에게 놓인 세상은 남들보다 혹독하게 치열한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단 그나 타인의 증언으로 드러나는 혐오나 폭력, 고통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순간, 혹은 퍼포먼스 와중에도 문득문득 드러나는 요소들 역시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지시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모지민이 고향을 가 가족이나 지인을 만나는 시퀀스다. 비교적 우호적으로 보이는 가족 관계나 선생님이 말하는 교우 관계가 관객들로 하여금 안도감을 주는가? 모지민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가족들이나 선생님은 증언하지만 우리는 모지민의 표정을 보며 모종의 불안감을 느낀다. 심지어 일부러 차별받았다는 증언이 나오지 않게끔 피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 직후 나오는 모지민의 내레이션은 이와 대비되어 나의 심증을 굳게 만든다. 그렇다. 그에게는 드러나지 않는 폭력이 곳곳에 산재해있는 것이다. <모어>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아, 대한민국> 시퀀스 역시 마찬가지다. (비교적 분명하게 지시되긴 하지만) 배경처럼 깔리는 태극기 부대나 혐오세력들은 모지민이 살아온 세월 속 켜켜이 쌓여있던 혐오와 차별을 가늠하게 만든다. 이는 모지민 만이 아니라, 모지민과 오랜 시간 살아왔던 파트너 제냐에게까지 확장된다. 외국인이자 성소수자로서 한국에서 겪는 어려움들, 사람보다 게임 속 몬스터들에게 더 신뢰를 보내는 모습은 기록되지 않은 채 켜켜이 쌓인 상처를 방증한다.



그러니 <모어>의 카메라와 모지민은 서로 치열할 수밖에 없다. 비록 영화 속 모지민은 카메라를 향해 우호적인 자세를 취하지만 서로가 자신의 예술을 펼치려고 할 때 벌어지는 화학작용이 언제나 호의적일 순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선 모지민 역시 우회적으로 언급6)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일하는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도리어 모지민의 언어와 몸짓을 통해 암시한다는 점에서 <모어>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그리고 결국 합일의 순간마저 이루어낸다. 이랑의 노래 <신의 놀이>와 함께 모지민의 퍼포먼스가 담긴 뮤직 비디오 시퀀스가 바로 그것이다. 감독이 모지민을 보며 품은 고민을 대변하는 듯한 가사는, 다른 예술가인 이랑의 목소리와 모지민의 퍼포먼스와 겹쳐지며 <모어> 전반에 걸친 ‘뒤섞임’의 상태를 완성한다. 그야말로 혼연일체의 순간들은 그래서 더욱 찬란하게 빛난다.



3.


이처럼 <모어>는 흔치 않은 방식으로 다큐멘터리 저 너머를 꿈꾸고 있다. 모지민이 자신의 예명 ‘모어’를 설명할 때 ‘MOre’ Zimin 이라고 하듯, 이일하 역시 <모어>에 ‘더욱더’ 무언가를 붙이려 시도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를 단순히 증식의 방식으로만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지민이 카메라 앞에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피사체로서의 규정을 거부하듯, 이일하의 카메라 역시 영화의 질서나 규칙에 공모와 전복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확장해 나간다. 모지민이 세상을 향해 존재를 선언함으로써 싸워나갈 때, 이일하는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여기 카메라가 있음을 선언한다. 그것은 기록의 카메라이기보단 언제든지 뒤섞이고 변모할 수 있는, 움직이는 카메라에 가깝다. 그리고 움직이는 카메라가 비추는 저 너머에는 그야말로 ‘퀴어링’한 세계가, 움직이고 있다.



1) 이와 관련해선, 주디스 버틀러의 저서 「젠더 트러블」과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Bodies that matter)를 참조.​


2) 이 표현은 모지민의 인터뷰('모어'는 퀴어영화 아닌 변방서 애쓰는 인간 모지민의 성장기,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220616171500005, 2022.06.17)에서 따왔다.

3) 위의 인터뷰 참조.​


4) 모지민/모어를 지칭하는 데 있어 이 표현 역시 조심스럽다. 개인적으로 그/그녀의 뒤섞은 듯한 모양인 ‘겨’라는 단어를 제안하고 싶지만, 글의 가독성을 위하여 성별 중립적 의미에서 ‘그’라는 표현을 쓴다는 점 양해 바란다.​


5) 영화에 나오는 욕설이나 비속어는 <모어>를 나타내는 데 있어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원대사 표기 그대로 싣는다.

6) “[인터뷰] 모지민 "요즘은 행복으로 두들겨 맞고 있는 기분”, https://www.etoday.co.kr/news/view/2152354, 이투데이, 2022.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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