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해고도 (절해고도, 2022)
제목이기도 한 ‘절해고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을 뜻한다. 과연 그 말대로 <절해고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의 멀리 떨어진 섬처럼 존재한다. 윤철(박종환)은 생계를 위해 작품을 하지 못하는 조각가인데, 그는 주변부 인물 몇 명을 제외하고는 교류를 이어 나가지 못한다. 그의 딸 지나(이연)는 그림에 재능 있지만 마음의 상처를 다룰 줄 몰라 윤철을 미워하며 타인을 밀어낸다. 윤철이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 영지(강경헌) 역시 홀연히 사라졌다 나타났다는 것을 반복한다. 이들은 만나고 서로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사이에 인력과 척력은 찾아볼 수 없다. 카메라는 그들의 삶에서 그 어떤 것도 관여하지 못하거나, 감정의 파고가 지나가 버린 후의 일상에 놓여있다. 그러니 <절해고도>에서는 사건이 벌어질 수 없다. 영화는 이미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 안에 켜켜이 쌓인 시간들, 감정의 흔적들을 그저 흐르는 대로 관찰할 뿐이다. 그 과정에서 <절해고도>는 ‘왜?’라는 물음이 삭제된다. 지나가 도맹(이연)으로 출가를 결심한 이유도, 윤철이 갑작스럽게 머리를 짧게 자른 이유도 우리는 알 수 없다. ‘왜?’라는 질문은 마음을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행위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 자신의 마음 안에 상대방을 끌어들이고 분석하려는 폭력적인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이유를 찾으려는 질문은 또한 인과 관계를 만들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절해고도>는 인과관계의 형성을 단호히 거부하는 영화다. 영화는 인물들의 관계를 ‘원’으로 만들고자 한다. 앞서 설명한, 지나가 도맹으로 변화하는 장면 그 앞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윤철은 호숫가에 차를 대놓는다. 그러다 문득 시간이 흐른 듯 차에는 낙엽이 쌓여있고, 행인이 발견한 후 윤철은 차 밖으로 쓰러진다. 마치 윤철의 죽음을 예비하는 듯하지만, 다음 컷에서 지나는 어느새 머리를 깎은 채로 도맹이 되어있으며, 윤철은 예의 그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더 이상 부녀 관계로 칭해지지 않는다. 그러고 조금 더 진행하면 이제 윤철마저도 예의 그 긴 머리를 자른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두 인물은 이후의 대화를 듣고 나서야 우리는 같은 인물로 상정하게 된다. 나는 여기서 다른 질문을 하고 싶다. 우리는 지금 지나와 윤철이 아니라 도맹과 다른 윤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 인물은 비슷하지만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그 심증을 뒷받침하는 요소는 하나 더 있다. 윤철의 내레이션은 선형적으로 그렇게 인식되는 ‘과거’와 ‘현재’를, ‘미래’의 시점에서 불쑥 들어온다. 그렇게 영화의 시간 축은 어질러진다. 이로써 <절해고도>는 직선적 형태를 거부하고 원형의 세계를 구축한다. 원형의 세계는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을 건드린다. 인과관계의 필요성이 무너진 세계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어야만 하는 영화의 물성에 대해 질문하고, 카메라가 인물이 선택하는 결정적 순간의 중계를 거부하면서 우리는 인물의 선택을 상상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그들의 세계를 무한히 뻗어나가 존재하게 만든다.
그러나 무엇보다 <절해고도>에서 중요한 건 인물들의 마음이다. 인과 관계와 시간이 삭제된 곳의 인물은 오직 그들이 지닌 마음과 스쳐 지나간 인연만 남게 된다. 그 마음은 타인을 자신의 의도대로 끌어당기지 않으려고 하는 귀중한 마음이다. 서로의 선택에 그 어떤 사족을 달지 않고 사려 깊게 지켜보는 마음. 그런 마음을 지닌 존재들이 <절해고도>에 서 있다. 저 멀리 홀로 떨어져 있는 섬이건만, 느슨하게 이어져 있는 서로의 실의 존재와 그 실이 언제든지 끊어질 수 있는 가능성조차 인정하는 것. 이보다 인물에게 따뜻한 애정을 보내는 시선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