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토실이에게 주고 싶었던 것
임신 4개월 만에 육아휴직을 냈을 때는 여러모로 불안한 점이 많았다. 당장에 불안해질 소득과 임신기간이 커리어에 미칠 영향 등 여러 모호한 상황들로 인해 걱정이 많았던 것 같다. 다행히도 지금은 걱정했던 것에 비해서는 잘 지내고 있다. 7개월에 접어들어서는 왔다 갔다 하던 컨디션도 비교적 안정되었다. 좋은 분들을 만난 덕분에 집에서나마 좋아하는 일도 꾸준히 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는 범님과 아이에게 어떤 것을 주면 좋을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가 둘에서 셋이 되는 모습은 낯설고 여전히 상상이 잘 되질 않는다. 이런 내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빼어난 외모나 명석한 두뇌를 물려주는 것은 이번생에는 무리일 것 같다. 그렇다고 빵빵한 경제력으로 뒷바라지를 해주는 것도 역시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범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아이에게 주고 싶은 두 가지가 떠오르긴 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 한 가지만 있어도 살아가는데 여러모로 유리한 점이 많아진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선 그만한 선택지가 내 손안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쥐고 있는 선택지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한창 걸음마에 재미 붙일 무렵에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던 기억, 아파트 단지 앞마당에서 동네 꼬마들과 벼룩시장을 열었던 기억, 알파벳도 모르면서 스타크래프트에서 show me the money를 손가락 위치로 기억하여 쳤던 기억, 여름이면 계곡에 텐트 치고 올갱이 잡고 어죽 끓여 먹던 기억, ios값이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첫 디지털카메라를 손에 넣었던 기억
과거의 기억들이 아마도 나에게 여러 선택지의 형태로 남아있는 것 같다. 그중에서도 9살짜리가 알파벳도 모르면서 스타크래프트를 하며 show me the money를 비롯한 무적, 맵보이기 등의 치트키를 줄줄이 키보드 자판 위치로 외웠던 일은 나에게는 아주 오래된 UX에 관한 경험 중 하나로 남아있다. 그래서 나도 주고 싶었다. 다양한 선택지.
우리는 토실이가 좋아하는 일을 어차피 스스로 찾을 것이라는 것에 동의했다. 그래서 무척 궁금하다. 토실이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활동에 흥미를 보이고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일에 열중하게 될지. 그리고 토실이가 좋아하는 일을 잘 찾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토실이가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두 번째로 내가 토실이에게 주고 싶은 것은 엄마의 건강하고 단단한 멘탈상태다. 다르게 말하면 아이가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고 싶다.
외부에서 받게 될 물리적인 위험으로부터 토실이를 보호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 같다. 24시간 토실이와 붙어있을 순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내가 토실이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안전 울타리는 엄마의 안정된 심리상태가 아닐까.
범님은 (적어도 나보다는) 멘탈이 단단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에 반해 나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공포에 가까운 반응을 한다. 이 감정은 성장의 동기부여가 되기도 하지만, 종종 나를 괴롭히고 뒷걸음질 치고 웅크리게 만든다. 심하면 자기 파괴적인 부분까지 보이는데, 이런 내가 엄마가 되어도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을 여전히 시도 때도 없이 하긴 한다.
그래서 주고 싶었다. 강하고 단단한 멘탈. 지금은 고작해야 육아/심리/철학 관련 서적들을 찾아보는 정도긴 하다. 사실 그 단단한 멘탈이라는 걸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다양한 사건을 겪고 변화무쌍한 환경을 거쳐오면서 단단해지는 게 멘탈이라고 생각하지만, 성장의 시점마다 수반되는 고통을 감당하는 일은 여간 괴로운 게 아니다. 그리고 분명히 토실이가 배 밖으로 나오게 되면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는 시험에 들게 될 것이 분명했다. 살짝 겁나기도 하는데 좀 기대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나의 멘탈을 단단하게 단련해 주었던 것은 힘든 연애와 힘든 직장이었다. 연애와 직장에서 얻은 것들과는 다른 것을 토실이가 줄 테니까, 걱정보다는 기대가 좀 더 큰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