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쓴 글을 오늘 새벽 깨자마자 죽죽 그었다. 원고지 같았으면 너덜너덜하다 못해 찢어질 정도로. 가장 거슬리는 건 부사를 남발하는 내 못된 글쓰기 버릇이다. '나, 슬퍼'와 '나, 너무너무 슬퍼'는 맛이 확 다른 걸 어쩌라고! 어쩌라고! 외치고 싶지만 도가 지나치게 부사를 사랑하는 걸 나는 안다. 쓸데없이 예민해서 슬픈 일이 있을 때면 '그냥' 슬프기만 한 적은 '결코' 없고, '너무너무' '매우 매우' 슬퍼서 부사를 '마구' 쓰고 싶어지는 게 내 성정일지라도 말이다.
언제부터인지 글을 쓰고 싶었다. 여고 졸업 때까지 문예반 근처엔 얼씬한 적도 없으니 그땐 아니었겠다. 운동장 조회 때 백일장에서 상을 받는 친구가 멋져 보이긴 했다. 특별한 걔네 세계이지 내 길은 아니라고 여겼다. 수학 책 밑에 <백경>과 <달과 6펜스>를 숨겨놓고 야금야금 아껴 읽는 짝꿍이 신기했지만, 나는 영단어 하나 더 외우는 쪽을 택했다.
언제부터인지 내 삶이 막막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고 싶은 말이 부글부글 괴어올랐다. 대학 4년 내내 공부는 뒷전인 채 고 3 담임선생님께 편지만 써댔다. 여자인 내가 봐도 반할 만큼 예쁘고 귀티 나는 부잣집 애들이 원어민 뺨치는 영어를 구사하는 게 무서워 죽겠다고, 휴학을 안 하면 곧 죽을 것 같다고.
누가 봐도 지방 사범대를 갔으면 좋았을 집안 형편이었다. 집에서 최대한 멀리 탈출하고 싶어 했던 사춘기가 주범이었다. 학교 실적을 올리기 위해 서울로 원서를 써 준 선생님은 종범이었다. 나와 공모한 죗값을 치르기 위해 기꺼이 샌드백이 되기로 결심했는지 선생님의 답장이 속속 도착했다. 실력은 없고 자존심은 하늘을 찌른 지방 소도시 촌년이 서울의 혹한을 네 차례나 버텨낸 이유였다.
출판사 공채에 합격한 건 그 '편지질' 덕분이었는지 모르겠다. 일기는커녕 노트 필기나 메모도 귀찮아했던 내가 그렇게 많은 글을 써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까. 광화문 뒷골목이 떠나가도록 술자리가 잦았던 수습기자 시절 사립학교 교원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함께 교직 이수를 했던 과 친구들은 냉큼 학교를 선택했다. 무슨 고민거리가 되기나 하냐는 듯.
그럴 거면 애초 사범대를 갔겠지, 외골수인 나는 한 줌 동요가 없었다. 빨간 사인펜으로 번역 원고를 슥슥 삭삭 윤색하는 일이 신나고 신기하기만 했다. 내 손 끝이 조금 더 윤나는 문장을 빚어낼수록 나는 나다워져 갔다. 해야만 하는 일 대신 하고 싶은 일에 몰입한 시간이었다. 연탄불을 땔 수 없는 초라한 자취방은 잊히고, 고르고 편안한 숨을 쉬며 나에게만 집중한 시간이었다.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적은 월급을 쪼개 등록금을 대준 큰오빠와 올케 언니를 향한 미안함은 잠시 내려놓은 채.
맞벌이가 대세는 아닌 시절이었다. 이력으로 내세우기도 어중간한 출판사 3년 근무를 끝으로 나는지방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글로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는 쪼그라들었다. 세 살 터울 남매가 내 손을 필요로 하는 게 더 시급했다. 글과 완전히 분리되고 싶지만은 않은 내 안의 은밀한 소망을 지그시 밟았다. 글은 특별한 사람이나 쓰는 거고, 나는 아니라고.
나를 죽이지 않고는 성립이 불가능한 결혼 생활이라는 것. 그런데도 생각 하나만큼은 끝내주게 많아 머릿속이 늘 어지러웠다. '다독'과 '다작'은 어림없지만'다상량' 만큼은 누구에게도 밀릴 것 같지 않을 것처럼.소심해서 미리 하지 않아도 될 걱정으로 잠을 설쳤고, 오해 받거나 미움 받지 않기 위해 상대를 설득하려면 매 순간 생각이라는 걸 안 할 수가 없었다.
글로 옮겨 쓰지는 않으면서 자나 깨나 마음 속에서 문장을 만들기 바빴다.누군가 애먼소리를 할 때 당하고만 있었던 장면을 복기하면, 상대를 때려눕힐 수 있는 말이 그제야 통쾌하게 떠올랐다. 생각 속에서만큼은 버벅거리지 않았고, 생각 속에서만큼은 지지 않았다. 무럭무럭 생각이 자라자, 문장을 만드는 속도도 빨라졌다. 더 이상 내 맘 깊은 곳에 문장을 쌓아둘 자리가 남아있지 않았다.
허섭쓰레기 같은 얘길 글로 방출해도 될까, 망설이던 중 조지 오웰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책 <왜 나는 쓰는가 WHY I WRITE >에서 그는 말한다. 어린 시절 그를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혼내주려고, 세상에 일러바치기 위해 글을 썼다고. 그렇다 하더라도 글쓰기 강좌 등록까진 자신 없었다.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한 것보다 더 용기가 필요한 일일 성싶었다.
내 손을 놓치면 무섭게 울어젖혔던 아이들이 더는 손을 잡지 않게 됐을 즈음이었다. 20여 년의 지방살이를 마치고 서울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2015년 어느 날, 강남 한 백화점에서 대학 동창이랑 문화센터 앞을 지난 게 화근이었다. 분기당 12 만원. 온전히 나 자신만을 위한 이런 돈을 써도 될까. 망설이고 있을 때 친구가 채근했다.
"너 글쓰기에 관심 있는 거 눈치채고 있었어. 한 달에 4만 원, 너한테 이 정도도 못 해줘? 너한테는 네가 그만큼인 거야?"
사는 동안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그때 그 순간 내 옆에 그가 없었더라면 참 아찔하다 싶어지는 은인 중 한 사람. 그 친구의 권유가 아니었으면 게으르고 겁 많은 내가 글쓰기 동네에 발을 들일 수 있었을까? 내 글에 융단 폭격을 퍼부어 준 문화센터 지도 교수님도 그러니까 친구 덕택에 만난 은인인 셈이었다.
중학교 국어책에도 글이 실릴 만큼 유명한 그분은 깐깐하고 소신이 강했다. 칭찬을 아꼈고, 수강생이 떨어져 나갈까 봐 대충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었다. 한 얘기를 또 해서 삼천포로 빠질 때를 제외하면, 지방에서 오래 사느라 그런 문화에 처음 젖어본 나는 원빈보다 소지섭보다 교수님이 좋았다. 이름 있는 소설가에게 배우다니, 그것만으로도 황홀해서 그림자도 안 밟고 멀찌감치 피해 다녔다. 수업 후 백화점 식당가에서 회식을 할 때면 한 마디라도 얻어 듣고 싶어 교수님 가까이 앉고 싶은 맘 굴뚝 같았지만.
등록한 지 두 달 동안은 관망만 했다. 그 사이 파악한 건 두어 가지였다. 재수강률이 높은 인기 강좌이긴 하나, 십 년 넘게 동창회 참석하듯 오시는 어르신들이 교수님께 서운함을 느낀다는 것. 한때는 문학 소녀였음직한 고운 할머니 선생님들은 칭찬이 고팠던 거다. 50 중반인 내가 햇병아리 축에 낄 정도로 연령층이 높다 보니 호칭은 자연스레 선생님으로 통일했다. 학교 선생 되는 일도 마다한 채 출판사 밥을 먹었던 나도 박 선생으로 불렸다.
호의적이지도 적대적이지도 않은 글 동네에서미루다 미루다 첫 작품을 낸 날, 퀭한 눈에 핏발이 선 채 강의실로 향했다. 합평이 시작됐고, 잠시 후 선생님들이 희끗희끗한 머리를 끄덕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떤 분은 나를 향해 V자를 그려 보이시기도 했다.'스테이크에 물릴 대로 물렸는데 짭조름한 냉이 된장뚝배기 같은 글이 '뜬금포'처럼 나타났군.' 그날 내 첫 글을 교수님이 칭찬해주신 건 아마도 그런 연유는 아니었을지.
그간 강의 시간 내내 교수님이 강조한 걸 유념하긴 했던 성싶다. 다 말하려고 하지 마라. 너만 아는 내용 너만 알게 쓰지 마라. 설명이 많으면 글이 늘어진다, 묘사를 늘려라. 짧게 끊어서 써라. 또 뭐였더라. 아, 반전! 그러고 보니 반전에 신경을 좀 썼던 것 같고, 교수님도 그 점을 특별히 인정해 주셨다. 처음부터 다 말하지 말고, 계속 궁금증을 일으키다 막판에 반전이 있게. 선생님이 하라시는 대로 시늉을 내다가 소 발에 쥐 잡은 격이었다.
얼굴이 홧홧해져 고개를 수그렸다. 속으론 칭찬을 원했으면서 막상 들으면 반납하고 싶어지는 건 무슨 조홧속인지. 여러 선생님들이 어떤 심산으로 그 수업에 나오는 줄 알기에 송구해서 더 그랬을 터였다. 화제의 중심에 있는 걸 불편해하고 칭찬을 맘껏 누리지 못하는 못난이 기질이 그날 또 발동한 건.
그후 나는 어르신들 눈에 날까 봐 더 조심하며 문화센터를 들락거렸다. 삼십 년 넘도록 많은 책을 쓴 소설가에게 칭찬 받았다는 수줍은 기쁨은 잠시, 얼마 안 가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날 줄도 모른 채. 하지만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죽을힘을 다해 썼다. 글을 빨리, 잘, 못 쓰니까 남들보다 품을 더 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봤던 모습 그대로, 밤늦게 귀가할 때까지도 노트북 앞에 붙박혀 있는 나를 보면 딸아이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엄마 그러다 죽을라."
"그러게. 니 엄마 죽겠다. 이렇게 공부했으면, 학력고사 전국 수석 했을라."
A4 두 장짜리 에세이 한 편 쓰는 데 어림잡아 100 시간은 들이지 않았을까. 입속말로 읽어보고, 소리내어 읽어보고, 일부러 술을 마시면서 읽어보고, 종이에 출력한 상태로 읽어보고. 독자가 뭐얏? 하며 글을 집어던지는 일만은 없도록 고치고 또 고치고…, 그러다 급기야 글을 읽어줄 후배를 찾아냈다. 조선시대 간서치 이덕무는 저리 가라, 할 만큼 책을 많이 읽는 애였다.
"세 번쯤 읽으니까 겨우 이해가 가네요."
후배의 말이 못내 섭섭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찍소리 않고 따랐던 건, 걔가 지적해 준 부분을 고치면 글이 한결 좋아지더라는 것. 내가 미처 못 본 걸 후배가 짚어주었으니 밥을 사줘도 몇 번은 사줄 일이었다.
매주 금요일. 교수님께 제출할 때면 원고를 다 외울 지경이었다. 내 딴엔 죽을힘을 다해도 교수님이 칭찬을 해준 적은 그닥 없었지만, 나는 비로소 온몸에 피가 돌고 숨이 쉬어지는 느낌이었다. 퇴고를 할수록, 쓰레기 같은 초고의땟국물이 빠질수록, 못난 나도 조금씩 사랑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내 글에 그 정도 공을 들이지 않곤 글도 나도 사랑한다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첫 합평 때 들었던 짧은 칭찬이 혹 꿈결은 아니었던가 싶게 그후 교수님은 내 글에 별로 언급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박 선생, 측간에 단청하지 마세요!"
무슨 소린가 싶었다. 네? 라고 되묻기도 조심스러워 다음 말을 기다렸더니 목덜미까지 벌게진 그분, 내 원고 위에 지휘봉을 탁탁 쳐대면서 잔인하게 보탰다.
"박 선생님! 수식어 다 빼라고요. 특히 부사! 변소 간에 분칠 한다고 변소가 변소 아닌 게 됩니까!"
다 쓴 글을 반 이상 버린 오늘 새벽 같은 날엔, 4년 전 그곳을 떠나올 때 마지막으로 뵈었던 교수님 모습이 떠오른다. 혼비백산, 눈물이 쏙 빠질 뻔했던 그날, 꾸지람 뒤에 숨겨 놓은 보석 같은 가르침을 내 몫으로 만들지 말지는 나에게 달린 일이었다.
원빈보다 소지섭보다 좋아서 그림자도 밟고 싶지 않았던 그분께 배운 대로 나는 한 문장에 몇 개씩 박힌 부사를 덜어낸다. 퍽, 아주, 정말, 너무나, 무척, 도무지, 그토록, 당최… 아, 못 말릴 나의 부사 사랑이여. 다 덜어내기 아까우니 몇 개쯤은 남겨 둘까. 교수님 애제자 될 욕심까진 없으니 '아무래도' '몰래' '살짝' '조금' '더' 부사를 쓸까 보다. 수식어를 덜어낼수록 글이 정갈하고 쫀쫀해진다는 건 이제야 나도 깨닫게 되었지만. 그 말씀이 진리인 건 알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