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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돌 May 06. 2020

도깨비 같은 길 같으니라고 2

[트레킹 이야기] 강릉 바우길 12구간 '주문진 가는 길' 


주문진읍에 들어선다. 도깨비 촬영지 방사제에는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줄을 섰다. 시간을 보니 11시 40분. 사천해변에서 출발한 지 3시간 30분이나 지났다. 안내책자에는 바우길 12구간 소요시간이 4~5시간으로 되어 있었는데, 30분 뒤면 완주할 수도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출발지 사천해변과 보헤미안 카페에서 이미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게다가 아직 점심도 먹지 않았다.



눈 앞에 주문진항이 보이기 시작한다.  에잇, 모르겠다. 핫플레이스인데 지나치면 후회할지도 모르잖아. 시간 까먹는 걸 각오하고 해변으로 내려와 다른 관광객처럼 줄을 섰다가 사진을 찍어본다. 뭔가 좀 많이 아쉽다. 폰 갤러리 속, 찬란한 신 도깨비는 없고 촌스러운 인간 트레커가 서있을 뿐이다. 의상이 문제다. 다시 올 테다. 샤랄라~~ 라랄랄라~  저 밀려드는 파도 포말과 같이 부서지는 하이얀 원피스를 입고 말이다. 지금 좀 촌스러우면 어떤가 싶다. 대신 도깨비처럼 쓸쓸하지는 않다. 걷는 이 순간만은 허전했던 마음이 한껏 채워지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허전했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고, 무엇으로 한껏 채워졌는지 또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때마침 물고기 중 가장 지혜롭다는 바다 돌고래의 이미지 형상이 있는 신리하교를 건넌다. 이제 주문진항에 곧 발을 딛게 된다.



"곰치국 먹어볼까?"


해변을 걸어오는 동안 보였던 많은 식당들 간판에 곰치국이라고 쓰여 있는 걸 본 까닭이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던 걸 먹어본다는 기대감을 갖고 몇몇 식당을 기웃기웃한다. 호객행위를 지나치게 하는 곳은 들어가기가 꺼려진다. 그래서 선택한 한 식당. 호객 행위를 원래 하지 않는지 아니면 잠시 급한 다른 일을 하느라 호객 행위를 잠시 멈추었던 중인지는 알 수 없다. 이미 한 커플이 식사를 하고 있다. 선풍기를 더 틀어주고 에어컨 옆에 앉으라고 안내해준다.


"김치 들어간 게 강원도식이에요. 뭘 먹을래요? 지리는 그냥 시원하고 깔끔한 맛이고."

"여기 맛집이에요. KTX 타고 왔어요?"


음식에 대한 자신감과 손님에 대한 배려 때문에 한 시간 머무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진다. 곰치는 홍게를 먹는다, 껍질이 몸에 좋으니까 꼭 먹어라, 젓갈은 직접 담가서 맛이 좋다... 반찬 하나하나까지 모두 설명한다. 잠시 출타하면서는 "반찬 모자라면 더 달라고 해요."라고 말하며 마지막까지 손님 챙기는 걸 잊지 않는다. 곰치는 사장님 말씀대로 씹을 것도 없었다. 후루룩 두부 먹는다고 생각하고 먹으라고 하신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그 식감이라는 게 내가 영 좋아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런데 사장님의 상세하고 친절한 설명이 떠올라 사장님이 자리를 떴는데도 곰치국을 남기면 안 될 것 같아서 쉬이 숟가락을 내려놓을 수가 없는 거다.  힘든데 많이 먹으라며 흐느적거리며 국자 밖으로 자꾸 탈출하려는 곰치를 꾸역꾸역 내 앞접시로 옮겨주는 그 사람이 야속할 지경이다.


'넌 안 힘들어? 너도 많이 먹어 좀, 제발.'



점심을 먹고 나니 한 시간이 훌쩍. 이제 좀 본격적으로 걸어보자고. 앞으로 앞으로 직진 직진하다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안내책자에는 주문진 등대를 들르라고 되어있는데,  왠지 등대를 지나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역시나. 안내책자를 보니 여물 쇠 식당 뒤 등대마을 언덕길로 진입하라고 되어있는데 언덕길을 지나친 것이다. 그냥 계속 앞으로 걸을 것인가? 주문진등대에 들를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서 갈팡질팡한다.


"이제 겨우 세 번째 길인데, 그래도 코스대로 가보는 게 낫겠지?"


점심을 금방 먹고 난 후여서 몸에 에너지가 가득 차서였을까? 그도 선뜻 그러자고 한다. 한 발 한 발 계단을 오르다 보니 괜히 가자고 했다며 후회하는 마음이 밀려든다. 몇 시나 되었나 보려고 휴대폰을 꺼내는데 전화가 온다. 정옥이였다.


"나 지금 주문진이야. 바우길이라는 길을 걷고 있어. 근데 너무 덥다."

"애들은 어쩌고?"

"엄마가 봐주고 계셔."

"그래? 더운데 고생이다. 고단 옛날 분교 근처에서 할머니들이 메밀국죽 파는데 그거 맛 괜찮더라. 엄마 모시고 꼭 가봐."


얼마 후면 내 생일. 같이 밥이나 먹자고 전화를 한 것이다. 정옥이는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친구. 1학년 2반 반장을 하던 똘똘한 친구다. 그 시절엔 남자애는 반장, 여자애는 부반장을 정해놓고 했었는데, 왜 내 기억 속에는 정옥이가 반장인지 모르겠다.


"어여 돌아와. 돌아오면 같이 밥 먹자."



통화 종료. 등대에 오르기로 마음먹은 걸 후회했던 게 바로 얼마 전이었는데 전화통화를 하면서 올라왔더니 벌써 등대 정상이다. 등대에 올라 주문진 바다를 내려본다.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순수한 마음으로 주변 사람을 챙기고 돌보는 마음을 나에게도 기꺼이 내어주니 말이다. 폰을 다시 꺼낸다. 푸르른 바다와 바다 옆을 끼고도는 도로, 주황빛 파랑 빛 지붕을 한 집들, 그리고 옥상 위에 널린 고추들까지 빠지지 않게 프레임 안에 꽉꽉 집어넣어 셔터를 눌러본다. 그리고 전송. 2분 뒤 정옥이의 한 마디가 전송되어 왔다.

  

"좋다 좋아"

 

주문진등대는 1918년 강원도에서는 첫 번째로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동해 일출의 장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라는 정보를 +1. 친구의 고마움을 느끼며 우정을 +1. 이런 게 마트에서나 보던 1+2인가? 고맙다 등대야. 올라오길 잘했구나.




다시 전진. 30여분 정도 걷자 소돌항에 도착한다. 이제 12구간의 도착지인 주문진해변 주차장이 얼마 안 남았는데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아니 있...다. 뭐 이제 거의 다 왔잖아. 전망대 데크에 털썩 주저앉는다. 가방도 벗어 옆에 던져둔다. 모자도 벗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라 있다. 그만큼 햇살이 뜨거운 날이다. 벌게진 얼굴과 목에 꼼꼼하게 선크림을 바른다. 그는 선크림을 바르면서도 카약을 타는 사람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아빠와 어린 딸이었다.

 

"애들 데리고 와야겠다."


그가 혼잣말처럼 내뱉는다.



소돌항에서 주문진 해변으로 가는 길. 서두르지는 않는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걸은 탓에 오랜 시간을 걸었지만 해는 아직 충분히 남아있고 주문진에서 강릉 시내로 나가는 버스도 줄줄이 있다. 여름 바다 분위기를 한껏 느끼기로 한다. 해수욕장이 폐장되어 안전에 유의하라는 현수막이 보인다. 뜨거운 여름의 절정의 순간은 비록 지나갔지만 아직도 주문진해변에는 그 열기가 남아 있는 모양이다. 빨강, 노랑, 초록, 보라 저마다의 색을 자랑하기 바쁜 파라솔, 해변 한 켠 줄 서 있는 노란색 보드들, 서핑을 배우기 위해 강사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모래밭의 젊은이들. 그리고 세계적인 가수로 우뚝 선 방탄소년단 BTS의 뮤직비디오 촬영 장소인 버스정류장으로 몰려드는 팬들. 주문진에는 여전히 여름의 흔적과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 오후 3시 40분이다. 사천진리 해변공원에서 출발한 시각은 오전 8시 10분. 7시간 30분이나 걸려 도착했다. 주문진 가는 길에는 진짜 도깨비가 있나 보다. 자꾸만 발길을 붙잡고 엉덩이를 붙이게 만드는 마력의 장소들이 길 곳곳에 포진해있다.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300-1번 버스를 타고 서둘러 도깨비 도시를 떠난다.

 

"어이~ 도깨비, 내일 다시 만나자고. 오늘은 이만 여기서 헤어지세나. 내가 좀 피곤해서 말이야."



ABOUT 바우길 12구간 '주문진 가는 길' (바우길 홈페이지 www.baugil.org에서 발췌)

사천진리 해변에서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주문진 항구까지 해변가의 모래 밭길과 송림을 따라 걷는 길입니다. 커피 마니아들 사이에 한국의 커피 성지라 불리는 영진 <보헤미안>을 지나 주문진등대와 동해바다가 살아 펄떡이는 주문진시장을 지납니다. 주문진등대는 역사도 깊고 사연도 많아 누구라도 이곳에 오면 스스로 바다를 지키는 배들의 앞길을 환히 밝혀주는 등대지기가 되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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