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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돌 Apr 27. 2020

둑방길이라고 무시하지 말라고

[트레킹 이야기] 강릉 바우길 4구간 '사천 둑방길'

"이 길 말이야, 산 너머 마을에 놀러 가는 것 같지 않아?"


4구간의 출발지인 명주군왕릉 주차장에서 발을 뗀 지 이제 고작 10분 정도 지난 것 같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짜로 놀러 가는 걸음이라면 이렇게 발이 무겁지는 않을 것이다. 바로 어제 1구간 선자령 풍차길 12km를 걸은 후유증이었을까? 평소 숨쉬기 운동밖에 하지 않다가 갑자기 10km를 넘게 걸었으니 온 몸의 근육들이 놀라 아우성을 친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 새벽 발바닥이 방바닥을 내디뎠을 때 별다른 통증이 없었고,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남대천 징검다리를 총총총 건널 때도 찍소리 하나 내지 않았었다. '하... 이 녀석들, 쓸만하네. 동맹 파업이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했더니...' 그러나 이런 여유로운 기분을 만끽한 시간은 잠깐 뿐이었다. 파업할 기미를 1도 보이지 않던 근육들이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본격적으로 걸어볼까 마음먹은 순간 발목에 철근을 묶은 듯 근육들이 아우성이다. 어쩌랴... 살살 달래 가며 걸어가 볼 수밖에......



바우길 17개 구간을 걸으려고 했을 때 가급적이면 순서대로 걷고 싶었다. 왜냐고? 물음이 필요한가? 순서, 차례는 원래 그런 거니깐. 아... 단순한 인간 같으니... 그런데 겨우 두 번째부터 꼬였다. 2구간 대관령 옛길은 출발지가 1구간과 동일한 대관령 신재생에너지전시관인데,  1구간과는 달리 도착지가 다른 곳이었다. 1구간은 대관령 신재생에너지전시관에서 출발해, 다시 같은 장소로 돌아오는 코스였기에 자차로 이동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2구간은 출발지와 도착지가 다른 곳이기에 출발지인 대관령 신재생에너지전시관에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버스 노선을 확인해보니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강릉 시내에서 대관령 정상에 올라가는 버스가 운행한다. 오늘은 화요일. 그래서 2구간은 패스.


그런데 왜 오늘 3구간을 걷지 않냐고? 2구간을 못 가게 되었다면 그 다음인 3구간 '어명을 받은 소나무길' 차례일 텐데 말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어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엇을 믿고 소나무길 3구간을 허하겠느냐? 이제 고작 한 개의 길을 걸었을 뿐인데... " 임금님은 나의 생각을 꿰뚫어 보시는 게 틀림없다. 나의 생각이 무엇이냐고? 바우길 안내지에 적힌 이 문장  '산길을 약 1시간 오르면'을 읽었기 때문에 3구간을 절대 갈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절대 나는 못 오를 것이다. 그냥 걷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나... 오르라잖아. 임금님도 트레킹 초보자에게 그 고귀한 길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걸 알기에 과감히 3구간도 패스.



결국 오늘 4구간을 걷고 있는 거다. 발이 좀 무겁긴 해도 둑방길 정도야 아무 문제없지 싶었다. 이런 나의 생각을 명주군왕께서 간파하셨는지 시련을 주시기 시작했다. 임도를 걷는 내내 손에 잡히지도 않는 자그마한 날벌레들이 계속 눈 앞을 정주행 하는 거다. 분노에 찬 손바닥이 목숨을 위협하는 순간 기가 막히게 역주행을 하는 묘기를 보여주신다.


하여간 잡히지는 않는 기묘한 놈들... 1시간 30분간 임도를 걸으면서 하는 일이라는 게 이렇다. 나무 작대기 위로 휘두르기, 왼쪽으로 휘두르기, 오른쪽으로 휘두르기. 나무 작대기를 잡고 있지 않은 손 역시 허공을 휘적대느라 바쁘긴 매한가지다. 어제 개에 위협을 느껴 바우길 초입에서 급하게 마련한 자연친화적 스틱은 오늘 이렇게나 유용하게 쓰이고 있는 중이다.


허공을 휘적대는 사이 반팔 소매와 토시 사이의 빈 틈을 공략하는 아주 머리 좋은 녀석도 있다. 좀 전에 그놈은 겨드랑이를 통해 가슴팍 쪽으로 진격했다. 소름 끼치는 느낌에 비명이 절로 나왔다.

 

"으... 악, 벌레... 벌레... 여기..."


양팔을 벌리고 허우적대며 허리춤에 잡아넣은 티셔츠를 빛의 속도로 꺼낸다. 앞에서 걷기에만 열중하고 있던 그가 돌아본다. 저 눈빛은 뭐지? 딱하다는 눈빛이 틀림없다. 나는 생사를 오갈 수도 있는 위태로운 상황인데 저 태평한 눈빛은 도대체 뭐지? 마음에 안 든다. 말도 안 되는 눈빛을 원망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그의 몸은 나를 향해 있다. 그의 손은 벌레가 나갈 수 있도록 티셔츠를 잡아당겨 붙잡고 있다.


"갔어. 메뚜기네."

"말도 안 돼. 메뚜기 아니야. 벌 같이 보였어."

"아니야. 메뚜기 맞아."


몸통이 통통한 벌레였는데, 분명 벌 같았다. 메뚜기가 걷고 있는 사람 어깨 높이로 날아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여러 근거를 대며 메뚜기가 아니라고 해도 그 사람은 메뚜기가 맞단다. 자기가 봤다고. 메뚜기를 제외한 어떤 벌레라도 나의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을 거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메뚜기가 맞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그 사람과 메뚜기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나의 언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저 멀리 산불감시초소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건너 마을 놀러 가는 길이 왜 이리 험난한 것인지...

 


도로를 건너 조금 더 걸어가자 해살이마을 안내판이 나온다. 마을 이름 '해살이'는 요즘에는 보기 드문 창포를 이 마을에서는 볼 수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창포는 햇볕만 들어도 잘 자란다고 하여 '해살이 풀'이라고도 하는데 여러 증상에 도움을 주는 약초로 아픈 것의 해답이 된다 하여 '해답이 풀'이라 불리기도 한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디지털 강릉문화대전 출처) 예쁜 이름처럼 옹기종기 아기자기 꼭 들어서야 할 자리에 들어앉아 있는 집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벌레들의 공격을 뚫고 굽이굽이 먼 길을 걸어온 보람이 있다 싶다. 저 앞에 길 전부를 세라도 낸 듯 걸어가던 그가 갑자기 밭가에 바짝 붙는다. 그러더니 오른팔을 뻗어 허리 높이의 키가 큰 식물 이파리를 살살 건드리며 걸어간다.


 

"우와, 깻잎 향 장난 아니다."


뒤쳐져 오던 나는 그 말을 듣고 얼른 겅중겅중 뛰어가 본다. 밭에 다다르지도 않았는데 깻잎 향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다. 향기만으로 깨밭의 넓이를 상상해본다. 이 정도 향이라면 털어서 기름을 짤 요량으로 키우고 있을 것이다. 가까이 가보니 역시 그렇다. 길가나 밭둑에 심은 것들을 주로 보았었는데 여기에는 넓은 한밭 가득 깨가 그득하게 심어져 있다. 존재감을 한껏 뽐내고  있는 듯하여 괜스레 내가 다 뿌듯한 마음이 든다. 조그맣기만 한 깨알이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은 기름을 짤 수 있는 식물이기만 해서는 아니리라! 무언가에 홀리듯 깻잎을 만졌던 손을 다시 코 끝으로 가져온다. 이제 곧 본격적으로 둑방길을 걸을 것이다. 깻잎 향으로 앤도르핀 충전까지 마쳤다. 다시 다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사실 해살이마을은 개두릅축제로 알려진 동네이다. 개두릅과 축제는 언뜻 어울리는 느낌은 아닌 것 같지만, 올봄에 벌써 20회 축제를 열었다. 산지가 대부분인 강원도답게 강원도에는 산나물을 테마로 한 축제가 많은 편이다. 양구 곰취축제, 정선 곤드레 산나물 축제, 인제 진동계곡 산나물 축제, 홍천 한우 산나물 축제, 평창 진부 오대산 천산 나물 장터축제, 춘천 강원 산나물 한마당 축제 등 생각보다 많은 축제들이 열리고 있다. 해살이마을 개두릅축제에서는 새순 따기 체험을 할 수 있고 개두릅나물밥, 개두릅전 등 쌉싸름한 맛이 일품인 개두릅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고 하니 이 또한 별천지 구경이 아닐까 싶다.

  

나는 개두릅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을 한 명 알고 있다. 그 사람은 한 글쓰기 대회에서 개두릅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다. 수상의 영광은 비록 누리지 못했지만, 그 글을 읽어본 나로서는 그 사람의 글을 매우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글의 제목은 '두릅과 장모님'. 그 글의 작자는 바로 저 앞에 걸어가고 있는 분 되시겠다. 봄철마다 참두릅과 개두릅을 택배로 보내주시는 장모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담아 사위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써 내려간 애정이 가득한 글이었다. 이 마을 개두릅 축제에서 글쓰기 대회가 열렸다면 수상하고도 남았을 수작이 분명한데 참으로 안타깝다. 개두릅 축제이니만큼 글 제목은 '개두릅과 장모님'으로 바꿔야 했겠지만 말이다.



10시 50분. 드디어 둑방길로 진입했다.


"우와~..."


둑방길엔 모름지기 꽃이 있어야 하는 법. 사천천 둑방길이 선택한 꽃은 바로 '배롱나무꽃'. 둑방길을 따라 늘어선 배롱나무의 단정함과 배롱나무꽃의 화려함에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배롱나무는 백일 동안 꽃을 피운다고 하여 목백일홍이라고도 불리는데, 지금이 꽃이 한창 예쁘게 피어있는 시기인 것이다.


특별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배롱나무도 있는데 다름 아닌 오죽헌에 있는 600년이 넘은 배롱나무가 그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수령이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의 나무이기도 하거니와 신사임당과 율곡 선생님이 그 옛날에 어루만지기도 하던 나무이니 충분히 그럴만하다. 걷던 중 한 배롱나무 몸통에 슬그머니 손을 대본다. 지금 이 순간 최고(最高)의 배롱나무는 그저 그 옆을 걸어갈 뿐인 보잘것없는 사람의 손길을 허락해준 바로 이 나무.


'너와 나, 우리 둘 다 유명세도 없고 잘나지도 않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넌 나에게 특별한 존재란다.'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게 견딜 수 없을 때도 있다. 아니 많다. 특별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어서 왜 살아야만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때 또한 많았다. 존재만으로도 특별할 수 있다는 말. 그건 거짓이라고 100퍼센트 확신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의 손길을 받아준 저 배롱나무처럼, 나도 누군가를 특별하게 여기는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기적과 다름없었다. 그제야 비로소 존재만으로 특별할 수 있다는 그 말이 100퍼센트 거짓이라는 확신이 깨지기 시작했다. 내가 누군가를 특별하게 여기듯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도 있겠다는 그런 가능성을 열어두기 시작한 것이다.


재능과 외모, 지성과 인품, 돈과 관계에 대한 갈증이 완전히 사그라진 건 아니다. 여전하다. 어떨 때는 나의 부족함이 부끄럽고, 어떨 때는 나의 부채가 짜증 난다. 그래서 마음먹었다. 가끔은 특별하게 살아 보기로. 특별한 게 별거나 싶었다. 주저앉아 있기보다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누군가에겐 걷는 일도 평범한 일이겠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인생이 그렇지 아니한가? 나에게 별 것 아닌 것이 누군가에겐 별 것이 된다. 나에게 절실한 것이 누군가에겐 무심한 것이 된다.


 남들과의 비교는 의미가 없다. 멍청한 짓이다. 주로 보잘것없는 나에게 아주 가끔 특별한 느낌을 스스로 선물하고 싶을 뿐. 모두 다 나를 위한 것이다. 결국 내가 나에게 특별해지는 일! 그게 의미 있다. 그 지난한 마음 작업은 현재 진행형. 오늘도 그 작업을 하느라 걷고 또 걷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와~...'

 

사천교에 이르러 뒤를 돌아본다.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배롱나무꽃 하나에 의지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둑방길을 걸어왔다. 배롱나무의 단정함은 뒤로 봐도 한결같았다. 단, 그 화려함은 나의 안쓰러움의 감정이 묻은 까닭인지 둑방길을 바라보기만 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같은 감탄사, 다른 느낌. 명상이라도 한 듯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는다.


사천교를 건너 지하도를 통과한다. 다시 둑방길. 하지만 이 길엔 더 이상 배롱나무가 없다. 대신 길가에 '코스모스 심엇어요'라고 쓰여있는 나무 판때기가 꽂혀있다. 맞춤법은 맞지 않지만 진지하기 이를 데 없다. 강아지풀 사이로 때 이른 코스모스도 몇 송이 피어있다. 이제 이 더운 여름도 훌쩍 가버리고 가을이 곧 오겠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든다. 코스모스가 만발해지면 배롱나무꽃은 떨어지겠구나. 아, 그 잠깐 사이에 정이 많이 들었나? 정신 차리자, 정신. 이제 도착지점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4구간 사천 둑방길은 18.2km. 바우길 17개 구간 중 가장 긴 구간이다. 그에 걸맞게 해살이마을까지 오는 산길도 끝날 듯 끝날 듯 끝나지 않더니, 둑방길도 끝날 듯 끝날 듯 끝나지 않았다. 그 길었던 길의 끄트머리를 지금 걸어가고 있다. 그 사람의 배낭을 대신 메고 걸어본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가방을 다시 빼앗아 메고 가는 그 사람. 그의 어깨가 한없이 아래로 처지고 있다. 그도 이 길이 녹록지 않았나 보다. 바다에 가까워지고 있다. 점점이 보이던 시멘트 건물들이 제 모습을 거대하게 뽐낸다. 더위에 지친 탓인지 눈이 시리다. 그래도 저 너머에 바다가 있다는 기대감으로 계속 걸어본다. 어느덧 사천항. 조금 더 걸어 사천진리 해변공원에 도착하니 오후 2시. 명주군왕릉에서 출발한 지 딱 5시간 40분이 지난 시간이었다.

 





 ABOUT 바우길 4구간 '사천 둑방길' (출처:강릉 바우길 홈페이지 www.baugil.org)

코스길이 18.2km (소요시간 6시간) 코스 난이도 중급 등산화, 도시락, 간식, 물 준비


백두대간의 줄기에서 푸른 동해바다까지 나아가는 길입니다. 이름도 예쁜 해살이 마을의 개두릅 밭을 지나 작은 강물의 둑방을 따라 바다로 나갑니다. 봄이면 둑방에 온갖 꽃이 피고,  여름이면 들풀이 자라고, 가을이면 이 냇물로 연어가 올라오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누구든 가을에 이 길을 걸으면 연어를 만날 수 있고, 교산 허균이 태어난 애일당 마을의 꼬부랑 논둑길을 따라 걷는 재미도 각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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