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16일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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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16일 차
2018. 5. 29. 화요일
프로미스타(Fromista) - 까리온(Carrion de los Condes)
오늘은 20km 정도 걷는 오래간만에 적게 걷는 날. 아침에 알베르게에 사람들이 다 나갈 때까지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다가 숙소를 나왔다. 평소보다 몇 시간 더 누워있었다고 충전이 잘 된 건지 가방도, 발걸음도 가볍다. 날씨와 풍광은 또 어찌나 좋은지. 언덕을 하나 넘으면 분홍 꽃밭이, 또 하나의 언덕을 넘으면 빨갛고 하얀 꽃밭이 넘실거렸다.
낮고 높게 깔린 뭉실거리는 구름 사이사이에 바다빛을 닮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에 눈을 뗄 수가 없어 위만 보면서 걷다 자갈에 자꾸 발이 걸렸다. 욕조에 거품목욕 입욕제를 막 풀어놓은 것처럼 구름 떼가 보글보글 몰려왔다. 몰려온 구름이 하늘에 가득 넘치면 쨍한 햇빛이 금세 찾아와 구름에 구멍을 뿅뿅 뚫었다. 사이사이마다 파란 하늘이 모습을 보였다.
햇볕은 온통 부서지며 땅에 내리고 있었다. 나뭇잎에 내리며 초록을 덧씌웠고, 모래알갱이에 내리며 길을 반짝거리게 했다. 양옆으로 펼쳐진 넓은 들판도 금가루가 묻은 것처럼 빛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이 순간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파랗고 하얗고 빨갛고 노랗고 초록초록했다. 모든 광경이, 한 걸음씩이 귀했다. 한 걸음 옮기고 감탄하고, 한 걸음 옮기고 사진을 찍으며 바람이 보리밭을 흔드는 소리 속에 오래 머물고 있었다. 그렇게 천천히 오늘의 목적지, 까리온에 도착했다.
까리온의 알베르게 중 가장 유명한 알베르게는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산타마리아 알베르게다. 단순히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곳이라서 유명하지는 않고 그날 머무는 순례자들이 모두 모여 노래를 부르는 프로그램 때문에 유명해졌다.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노래하는 알베르게'라고 말하면 많이들 아는 곳이다. 나도 이 프로그램이 궁금해 이곳에 왔고 수지도 오늘 여기서 만나기로 했다.
시간이 되자 수녀님들은 환영하는 노래를 시작했다. 고운 목소리에 아직 모이지 않은 사람들이 홀린 듯 모였다. 어느새 거실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한국, 이탈리아, 호주, 미국, 프랑스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둥글게 모여 돌아가면서 간단한 자기소개와 이 길을 걷는 이유를 말했다. 나는 '삶을 단순하게 살고 싶어서'라고 했고, 누군가는 '도전하기 위해', 또 누군가는 '인생의 지향점을 찾기 위해'라고 했다. 모두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유로 길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는 돌아가면서 각자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했는데 그 나라에서 유명한 노래를 하는 식이었다. 자신 있게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부끄럼을 많이 타 시작에 시간이 걸리는 사람도 있었다. 순서가 가까워질수록 나도 애가 타기 시작했다. 어떤 노래를 해야 할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동안 이곳에 온 한국 사람들이 꽤나 같은 노래를 불렀던 건지 내 차례가 되자 기타를 들고 있는 수녀님이 자연스럽게 '아리랑'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는 한국인들은 익숙한 선율이 나오자 쭈뼛쭈뼛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수녀님들도 따라 불러주셔서 어렵지 않게 순서가 끝났다.
시간이 끝나고 원하는 사람은 미사를 볼 수 있다고 했다. 평소에는 성당을 아예 가지 않는 신자지만 오늘은 함께하고 싶어졌다. 순례자들의 안위를 바라면서도 응원을 담뿍 전해주는 미사였다. 신부님은 이마에 성호를 그으며 앞으로의 길을 축복해 주시며, '어떤 상황이 닥쳐와도 이 길은 나의 길'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별 거 아닌 것 같은 그 말이 따뜻하게 느껴져 하루 내내 자꾸 그 말을 되뇌었다.
요새는 도착점 자체에 신경을 많이 썼던 것 같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자주 표지판을 보면서 확인하고, 너무 멀게 느껴져서 아득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제야 그런 시간들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이 길의 과정을 즐기지 못한 아쉬움이었다. 삶에서 이 길만큼 내게 온전한 결정권이 주어지는 순간이 있을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이곳은 나의 길이다. 내가 선택하고 나아가면 되는 길. 딱히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길이며 그냥 최선을 다해 걸어내기만 하면 되는 곳이다. 그러니 이 순간을 즐기자. 도착보다는 순간에 집중하자. 나중에 후회 없게 하루하루를 필사적으로 근면하게 걷자.
* 다 같이 노래를 부르는 세션에서 핸드폰은 잠시 멀리하라는 말에 촬영을 하지 않았습니다.
산타마리아 알베르게에는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바로 저번에 종종 마주친 우철오빠. 분명 오빠의 걷는 속도로 보면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는데 어떻게 여기서 또 만났다. 유네스코에서 일한다는 아키코도 만났다. 마침 이곳에 사과주가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시드르(사과주)를 큰 병으로 2병 사놨었다. 아무래도 반가운 사람들과 술잔을 나누기 위해 있었나 보다.
여태까지 시드르(사과주)는 프랑스산만 마셔봤었는데, 이번에 먹었던 사과주는 도수는 잘 모르겠지만 알코올감이 강하지 않았다. 단맛도 좀 더 덜하고 조금 더 텁텁한 편이다. 내추럴 와인과 약간 비슷한 맛이라고 해야 할까? 캐릭터가 강한 프랑스의 시드르는 식전주로 먹기 좋다면 여기 사과주는 음식과 곁들여서 먹을 수 있는 라이트 한 맛처럼 느껴졌다.
사과주가 한 잔, 두 잔 들어가다 보니 주방에 있는 사람들은 많이들 들어가고 우리랑 몇몇만 남았다. 우리는 조금 말소리를 줄여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알코올의 힘인지 그냥 우철오빠가 웃긴 탓인지 자꾸 별 거 아닌 걸로 웃기 시작했다. 한 번 웃음이 터지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었다. 누가 한 마디만 해도 웃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술도 동나서 와인과 맥주를 몇 병 더 사왔다.
알코올이 들어가니 더 웃겼다. 큰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우리는 더 뒤집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작은 아키코였다. 아키코에게 우철오빠랑 우리가 만났을 때를 설명해 주면서, 저번에 만난 알베르게에서 호스피탈로가 우철오빠를 'bonito(귀엽고 아름다운 사람)*'라고 말했다고 하자 아키코가 입에 머금고 있던 뭔가를 뱉으면서 웃기 시작했다. 분사되는 술의 파편에 나, 수지, 우철오빠도 속절없이 차례로 입안에 있던 걸 뿜어냈다. 그게 시작이었다.
우리는 다들 자러 간 알베르게의 거실에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끅끅거리며 눈물이 고인 채로 여자 고등학생 애들처럼 몇 시간을 깔깔댔다. 그리고 이다음날부터 우철오빠와 함께 걷게 되었다.
*우철오빠는 키도 어깨도 건장한, 사윗감으로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