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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밍 Mar 01. 2024

[산티아고술례길] 샹그리아 먹느라 밤 9시에 도착한 날

산티아고 순례길 17일 차




가장 첫 번째 글 : #1 산티아고'술'례길의 시작  https://brunch.co.kr/@2smming/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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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17일 차
2018. 5. 30. 수요일
까리온(Carrion de los Condes) - 사하군(Sahagun)




빠른 포기

큰 목표를 세웠다. 오늘은 아주 멀리까지 걸어보는 것. 내일은 수지와 함께 걷기로 해서 대략 40km 정도 떨어진 사하군(Sahagun)까지 가기로 마음먹고 배낭도 미리 동키*를 신청하고 잠이 들었는데, 출발할 때 맵스미**로 거리를 찍어보니 40km가 아니라 45~46km 정도 되는 거리였다. 45km라니. 한 번도 이렇게 걸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전 마을에서 머물기에는 전 마을과 사하군과의 거리가 멀었다. 이미 배낭도 보낸 거 한 번 걸어보자 싶었다. 대신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 동키 : 순례길 짐 옮김 서비스

** 맵스미 : 오프라인 지도 앱, 구글맵보다 고도와 도보 거리가 정확해 자주 사용한다.



천천히 걷자는 말이 그런 말은 아니었는데

다소 긴 거리에 잔뜩 쫄아버린 수지와 나는 조금 이상한 방식으로 이 불안을 해소하고자 했다. 다리가 피곤할 수도 있으니까 바에 가서 좀 쉬고(그러면서 샹그리아도 마시고), 배가 고프면 안되니까 중간에 바에 또 들르는 방식으로다. 그렇게 우리는 사하군에 도착하기 전까지 아침과 점심을 포함해 총 4번의 바르(bar)를 들렀으며, 거의 2~3시간에 한 번씩 바에 들러 맥주와 샹그리아를 수혈했다. 지금까지 걷는 중에 가장 잦고, 많은 횟수다.


1차로 바에 간 건 날씨도 무덥고 끼니도 해결해야 해서였다. 마침 테라스에 사람들이 많이 앉아있는 맛집처럼 보이는 곳을 찾았다. 보려고 본 건 아닌데, 공교롭게도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맥주를 마시고 있는 게 아닌가! 때마침 가지고 갔던 물도 동이 나서 조갈이 나던 상태였다.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맥주 하라 사이즈로 주세요"


힘을 줘서 힘껏 들어야 하는 하라 사이즈(큰 사이즈)의 맥주가 나왔다. 묵직한 맥주를 잡아들고 꼴깍꼴깍 마시니 보리향이 코를 탁 치고 지나가면서도 목을 시원하게 긁었다. 더위를 한 번에 없애주는 맥주에 수지도 나도 캬- 소리가 절로 나왔다. 너무 맛있는 걸 먹으면 미간은 한껏 찌푸려지고 저절로 기쁨의 몸짓이 나오곤 한다. 수지와 나는 한동안 그렇게 난리 부르스를 치며 맥주의 위대함에 예의를 표했다.


mahou 생맥주는 순례길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맥주인데, 보고 또 보고 마시고 또 마셔도 질리지가 않았다. 누가 와인만 눈으로, 코로, 입으로 세 번 마신다고 했을까? 맥주도 무조건 껴줘야 한다. 투명하면서도 보리밭이 넘실거리는 것 같은 금빛의 색깔에 눈으로 한 번, 보리 알알이 느껴지는 것 같은 진한 향기에 코로 두 번, 마지막으로는 입에 잔뜩 머금으면서 세 번 마신다. 게다가 mahou는 막 나와서 시원한 상태도 맛있고 맥주가 식어도 맛있다. 순례길의 마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태까지 먹었던 생맥주 중에 가장 맛있는 것 같다. 정말로 한국에 가져가고 싶다.


옆 테이블은 오늘 여기서 끝을 볼 작정인지 테이블에 맥주잔이 가득 쌓여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오늘 여기까지만 걷고 맥주나 벌컥벌컥 마시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 딱 한 잔만 더 마시고 나가는 걸로!




2&3차_그렇게 시작된 샹그리아 파티

맥주를 마시고 난 후에 햇볕을 받으며 걷는 기분은 그야말로 째진다. 몸은 나른나른해지고 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그저 좋아진다. 마치 토치로 구워지는 크림 브륄레의 윗부분 설탕이 된 것 같다. 온몸이 햇빛에 녹아든다. 살짝 기분이 들뜬상태에서 마주치는 순례자들에게는 평소보다 높은 톤으로 경쾌한 인사를 건네게 된다. 오늘은 낮술을 피할 수 없는 날인게 확실한 건지 지나치는 사람들마다 얼굴이 불콰하게 물들어 있다.


갑자기 구름 떼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수지랑 나는 (비를 한 방울도 맞지 않았지만) 비가 온다는 옆에 보이는 바에 들어갔다. 메뉴판에서 샹그리아가 가장 눈에 띄어서 나도 수지도 한 잔씩 시켰는데 아니 이럴 수가. 여기는 술에 진심인 사장님이 계신 곳이었다. 와인에 소다를 섞어 샹그리아를 내주는 게 아니라 무려 마/티/니를 섞어주시는 곳이었다. 나는 한 번도 샹그리아에 마티니를 섞어먹어 본 적도, 상상을 해본 적도 없다. 이역만리에서 이렇게 가방끈이 긴 사장님을 만나 봰다. 배움에 가방끈이 너무 길어 걸려 넘어질 것만 같다.


사장님이 제대로인 건 하나 더 있다. 샹그리아 양이 한입거리 아니라 혜자라는 점이다. 매번 어디를 가서 샹그리아를 시키면 세 네 번 정도 마시면 없어지는 작은 컵에 나왔다. 언젠가는 샹그리아를 두 입만에 털어 넣고 입맛을 다신적도 있다. 그런데 여기는 입구가 넓은 잔에 샹그리아를 가득 담아준다. 맥주 500ml 잔과 비슷해 아주 넉넉하게 마실 수 있다.


양이 많다고 맛이 실속 없는 것도 아니다. 기본적인 샹그리아 맛을 충분히 구현하면서도 섞은 마티니가 전체적인 감칠맛과 알코올감을 잡아준다. 톡톡 튀는 과일의 향과 맛도 풍성하다. 잔에 나오는 샹그리아 자체에는 과일이 많이 담기지는 않았는데 만드는 과정에서 넉넉한 인심으로 과일을 넣은 게 느껴진다. 얼음은 일부러 덜 녹는 큰 바위 얼음을 사용해 오랜 시간 동안 먹을 때도 본연의 맛을 계속해서 느낄 수 있게 한다. 너무 달지도 않아 많은 양을 마셔도 질리지 않고 새로운 맛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맛있는 샹그리아를 하나만 먹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 한 잔씩 더 시켜 인당 1리터 정도를 각각 마시고서야 가게를 나왔다. 사실 더 시키고 싶었지만 그러다가는 영영 사하군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아 아쉬움을 무릅쓰고 길을 나섰다.




4차_딱 한 잔만 더

미처 못 마신 샹그리아가 아쉬웠던 건지, 샹그리아를 마시고 걷는 길은 날씨도, 기분도 꾸리꾸리했다. 한껏 재잘거리던 수지와 나는 말이 점점 없어지다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하면 좋을 창업 아이템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푸드트럭으로 미숫가루랑 식혜를 팔면 대박이 날 거다, 소맥을 섞은 술을 마을 없이 길만 쭉 있는 이런 곳에 열어 두면 문전성시를 이룰 거다, 국밥을 팔면 추운 날 잘 팔리지 않을까? 아니면 죽은 어떨까? 알베르게를 열어 조식으로 판다면 오트밀 같기도 해서 누구나 다 잘 먹을 거다, 레몬 맥주를 한국에 가져가서 팔아야 한다와 같은 이야기였다.


먹는 이야기를 자꾸 하다 보니 지금 먹고 싶은 것들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여행을 오래 떠난 적이 있어도 한국 음식이 그렇게 끌린 적이 없었는데 이 길은 뭔가 다르다. 우선 라면 같은 걸 자주 먹기도 하고 자꾸 한식이 먹고 싶다. 여기서는 구하기 어려운 아귀찜이나 불족발, 주꾸미, 비빔밥, 차돌된장찌개 같은 건 더 먹고 싶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부터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다행히 조금만 더 가면 마을과 식당이 있었다. 저녁밥을 먹기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아직 오늘의 목적지, 사하군까지 2-3시간은 걸어야 했다. 그리고 여긴 사하군에 도착하기 전까지의 거의 마지막 마을이었다.


드디어 마을에 도착하고 발견한 식당을 들어갔는데 저녁 장사를 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허한 마음에 동공에 초점을 잃은 내게, 수지가 샹그리아라도 먹지 않겠냐고 물어봤다. 그 말에 나갔던 정신이 다시 들어왔다. 암, 밥을 못 먹더라도 샹그리아는 먹고 걸어야지. 우리는 과일이 송송 썰어진 달콤상콤 샹그리아를 빠르게 마시고(정말 가게 마감을 하고 계셨다) 저녁을 먹을 장소를 찾아 다시 길을 떠났다.


그땐 몰랐다. 이게 마지막 식당이 될 줄은....





5차_피곤해도 와인은 포기할 수 없어


그 어떤 식당도 없었다. 구글 맵으로는 분명 마을이 존재했는데 큰 도로의 저 편에 있어서 도보로 넘어갈 수 없거나, 마을은 있는데 문 연 곳은 없는 곳들이었다. 저녁 6시, 7시, 8시... 시간이 점점 갈수록, 마을에 대한 기대와 실망을 번갈아 하면서 희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결국 사하군에 도착할 때까지 연 식당은 아무 곳도 없었고 사하군의 입구에 밤 20시 30분 도착, 사하군 알베르게 앞에 거의 9시가 다 되어서 도착했다.


배가 고픈 건 둘째치고 체력이 바닥났다. 2시간도 넘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었다. 등산화 안 어딘가에 자그마한 자갈이 굴러다니고 있었는데 대충 무시하고 걷다가 new 물집도 생긴 모양이었다. 물집이 생긴 곳도 아프고, 물집을 피해 이리저리 발 모양을 옮겨 걷느라 발목도, 발도 피로했다.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온 다리도 욱신거렸다. 걷는 법을 잊은 나는 한 발을 끌어서 앞에 두고, 또 다른 발을 끌어와서 앞에 두면서 기괴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너진 체력을 등산 스틱에 의지하며 걷기도 했는데 이제는 스틱을 쥔 손뿐만 아니라 전완근, 팔꿈치까지 아려오기 시작했다. 이번 길을 걸으며 등산 스틱을 사지 않으려 잠깐 마음먹었던, 걷기 전의 나를 생각했다. 그때는 등산 스틱이 큰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만약 오늘 등산 스틱 없이 걸었더라면 정말로 중간에 택시를 잡거나 지금쯤 길거리에 누워있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했다.



알베르게는 사하군 표지판보다도 한참을 들어가서 있는 곳이었다. 마을을 열심히 지나가고 있는데 편한 옷을 입은 어떤 남자와 여자가 저만치서 나랑 수지를 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은 밤 9시가 다 된 상황. 이 시간에 걷는 순례자는 없다. 나와 수지는 누가 봐도 등산스틱을 손에 쥐고 등산복을 입은 순례자였다. 저 사람들도 우리가 웃기거나 걱정되어 서있는 게 분명했다.


그 둘은 계속해서 우리를 보더니 자꾸 손가락질까지 했다.


'아니, 이 시간에 걷는 순례자 처음보나?'(아마 그럴 것이다)


힘든 마음에 짜증이 울컥 치밀었는데 자세히 보니 우철오빠와 S 언니였다. 다 같이 만난 우리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우철오빠와 S 언니는 누가 봐도 나와 수지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데 지금 이 시간에 걷는 게 말이 되지 않아서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고 했다. 맞다. 이 시간까지 걷는 건 미친 짓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는 그 짧은 시간에 가만히 서있는 것도 힘들어서 다리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반갑긴 반가운데 눈은 텅 비어 있고,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고 웃음도 지어지지 않는 우리를 본 오빠와 언니가 얼른 알베르게에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그렇게 삐그덕 삐그덕 도착한 산타크뤼즈 알베르게. 커다란 문을 두드리니 신부님이 나와 맞아주시면서 동시에 우리를 보며 경악했다. 초췌를 넘어선 우리의 영혼 나간 몰골에 한 번, 지금 이 시간에 들어왔다는 것에 또 한 번, 문을 열어주었지만 걷는 건지 기는 건지 모르겠는 흉측한 걸음걸이에 놀라셨다.


신부님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셨다.


"너희 저녁은 먹었니?"


대답할 힘도 없어 고개를 젓자 신부님은 지금 샤워를 하는 것보다 식당으로 바로 가서 저녁을 함께 하는 게 어떻겠냐고 우리를 안내했다.



사실 여기는 '순례자들과 다 함께 먹는 저녁식사' 프로그램 때문에 예약한 알베르게이기도 했다. 이미 저녁은 공쳤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식사 중인가 보다. 식당으로 걸어가는 데 멀리서부터 왁자지껄했다. 창문 사이로 삐져나온 빛은 따뜻했고 맛있는 음식의 냄새도 흘러들어왔다. 마침내 식당의 문을 열고 신부님이 우리를 소개하자 그렇게 화기애애하던 사람들의 말소리가 일순간 멈추고 우리를 뜨악스럽게 쳐다보았다.


배가 고프다 못해 등가죽에 들러붙은 우리는 최대한 힘을 끌어내 입꼬리를 올려 인사를 한 후 식탁에 앉았다. 순례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더니 음식을 가져와 우리에게 주었다. 가장 깨끗하고 맛있어 보이는 음식만 골라와 식탁에 놓아줘 금세 식탁이 가득 찼다. 물도, 와인도, 컵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주며 사람이 더 올지 몰랐다고 자신이 너무 많이 먹은 것 같다며 미안해하기도 했다. 정말 너무 고마운데 힘이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배가 고프면 머리도 멈추는지 영어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8시간 만에 본 음식을 귀한 마음으로 한 숟가락씩 뜨기 시작했다. 그제야 피가 돌고, 굽혔던 허리가 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몸에 에너지가 생겼을 즘 고개를 드니 순례자들이 저만치서 우리가 먹는 걸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이제 좀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던지 사람들이 다가와 우리에게 어디서부터 걸었는지, 얼마나 걸었는지를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옆에 놓인 와인을 건네주며 맛이 좋다는 말도 덧붙였다.



오늘은 더 이상 술을 마실 생각이 없었는데 예의상 한 모금을 머금어보니 눈알이 번쩍 뜨였다. 와인치고 작열감은 느껴지긴 하지만 풍미가 남달랐다. 와인만 단독으로 마셔도 맛이 깊고, 음식과 같이 마셔도 캐릭터가 절대 죽지 않는 느낌이었다. 술맛이 촘촘하게 짜여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졸레누보처럼 포도의 신선한 맛이 느껴지면서도 산미가 강하지 않고, 바디감이 상당하지만 탄닌감은 상대적으로 적은 맛이었다.


이 컨디션에 술을 많이 마시는 건 정말 한국에서도 절대 하지 않는 일이지만 이렇게 맛이 좋은 와인을 만난 게 너무 기뻐서 자꾸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꼴딱꼴딱 와인을 마시는 우리를 보고 사람들이 남은 와인을 챙겨서 우리 식탁에 놔주었다. 기대를 부응하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또 잔을 비우고 또 비웠다. 곁들인 하몽과 치즈도 너무 맛있고, 혀에 감기는 와인도 맛있고, 우리를 바라봐주는 사람들의 얼굴도 너무 다정하고. 피곤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지금이 꿈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도 술람찬 하루, 그리고 사실 여긴 #산티아고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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