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여자들은 누가 만들었나
<아이들은 슬픈 여자들이 키운다>에 덧붙임
오래도록 생각해왔던 글쓰기 주제였다. 여러 베이비시터들을 경험하면서, 그 전엔 보이지 않았던 사회의 단면들이 보였고, 나름의 해석을 해보고 싶었다.
베이비시터와 관련해서는 말하고 싶은 주제가 몇 개 더 있지만, 우선 <아이들은 슬픈 여자들이 키운다>(https://brunch.co.kr/@rhabaak/22)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짧게나마 정리하고 넘어가야 다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라는 흔한 말. '한 아이를 키우는 데에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문장. 하지만 실제로 아이를 키우는 문제에 봉착해보면, 사회의 미래라는 아이를 키우는 일은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경우 아이 엄마 '개인'의 문제로 전락되고 강요된다.
현재 50-60대에 이른 윗세대의 많은 '엄마'들은 당연한 듯 '자신'을 버리고, '엄마'와 '아내'로서의 삶을 살았다. 사회는 그들을 '위대한 모성'을 가졌다고 칭찬했다.
내가 만난 베이비시터 이모들이 그에 속한다. 한 가정의 아내와 어머니로 '당연하다고 하는' 삶을 담담히 살아냈던, 하지만 자식들의 독립 후에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끼는 이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직접 찾아 나서서 케어하며 스스로의 삶의 보람, 일말의 자기 효능감을 다시금 느끼고자 하는 사람들.
그녀들을 '슬프다'라고 표현한 것은 그녀들의 삶이 가부장제라는 사회적 제도에 의해 쓰임을 당하고 버려졌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중년 여성을 대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해당 글에 달린 여러 댓글은 '슬픈 여성'과 '글쓴이'를 대치시키고 있다. '글쓴이'가 베이비시터를 동정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더러 있는 듯했다. 거기엔 내가 교수 노동자임을, 워킹맘임을 이곳에서 밝힌 것이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들을 이렇게 개인과 개인의 문제로 몰아가는 과정에서 이 사회의 '여성' 문제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전락할 뿐이다. 난 그들을 동정하지 않는다. 가부장제가 낳은 사회의 슬픈 단면들을 목격했을 뿐이다.
슬픈 그녀들은 우리 곁에 분명 존재하고 있다. 독립한 아이들에게 전화 한 통 오기를 기다리는. 넘치는 시간을 어떻게 주체해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는. 남편의 늦은 귀가를 소파에 앉아 기다리는. 행여나 낮에 친구들을 만나 카페에서 수다를 떨기라도 하면 "한가한 아줌마" 소리를 들어야 하는 이들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그들을 슬프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한때 그토록 어머니로, 아내로 살아주길 강권하던 사회다.
여러 댓글들을 읽으며, 그녀들의 '슬픔'을 외면하는, 또는 아름다움으로 포장하고자 하는 움직임의 잔인함에 놀랐다. "글쓴이와 글쓴이의 아이가 불쌍하다"는 댓글도 보았다. 아마도 글쓴이의 아이를 엄마가 전담해 키우지 않아 불쌍하다는 뜻일 것이다. 아직 우리 사회는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다는 것을 그렇게 확인한다. 그리고 이것이 듣기에 불편하고 씁쓸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이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해나가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의도된 대로 읽히지 않았음에는 내 글의 부족함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부 댓글 속의 무례함을 이해하는 근원이 되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의를 읽고자 노력해주신 분들께 이 글을 통해서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