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려도 된다

by PYT

아무리 수백 년을 버텨온 단단한 기둥이라 해도, 무딘 도끼로 수만 번을 내려치면 결국 상처는 남는다.

하지만 그 상처에도 새살은 돋고, 시간이 지나면 아물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대의 코어는 무엇인가요?"


나를 지탱하는 힘, 내가 나일 수 있는 이유는 '진정성'이다.


그 진정성이란,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진심으로 대하고,

사람에게 다양한 면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적어도 마음과 행동 사이에 일관된 정직함을 지키는 것.

회피보다는 부당함에 맞서고, 약자를 돕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용기.

그런 태도에서 비롯된 신념이 바로 나의 코어다.


나는 스스로 기준이 명확한 사람이라 생각해왔다.

주관적인 생각이라기보다는 많은 이들이 내게 자주 해준 말이기도 하다. 명확한 기준은 나를 드러내고 표현하는 데 분명한 장점이지만, 때론 그것이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나는 나의 기준이 세상의 기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최근,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나와 그렇지 않은 타인 사이의 균형이 어긋나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고, 나의 코어에 대한 의문도 생겼다. 더 나아가 인간관계, 특히 연인 관계에 대해서도 어떤식으로 접근을 해야하는지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역시 내 기준에 부합하길 기대했다.

정확히는, 그들도 나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거라 믿었기에 그들을 선택했고 친해졌다.

"내가 알던 그 사람의 모습이 아니잖아"

내가 알던 모습과 조금이라도 달라질 때, 그 균열을 내가 아닌 ‘그들’이 메워주기를 바랐다.

나의 코어에 맞춰서.


때로는 좋아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누가 보아도 잘못된 상황에서는 ‘적어도 이 정도는 지켜야 하지 않나’ 하는

공동선과 최소한의 도리를 기대하기도 했다.

"어떻게 사람이 그래?" 하는 실망은 그런 기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에게 코어가 있듯, 그들에게도 각자의 코어가 있을 것이다.

A부터 Z까지 나와 다르더라도,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런 관계야말로 진정 오래 지속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고고하게 살고 싶은 것도 아니고

수도승처럼 흠 없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세운 기준이 낮지 않다 보니, 상대방보다 오히려 나 스스로를 더 힘들게 만들 때도 많았다.

그 코어는 지난 30년간 나를 형성해온 정체성이었지만, 정작 나를 정체하게 만들기도 했다.

지켜야 할 '가치'라기보다는,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던 나만의 '아집'일수도 있겠다.


나는 그 코어를 불변의 것으로 규정해버렸고,

결국 지키려던 코어가 나를 해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키지 못했을 때의 괴로움, 지킬 수 없는 상황에서 억지로 고수하다가 생긴 손해들.

그 작은 상자 안에 나를 가둔 채,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한때 나는 저 말을 보며 ‘줏대 없이 그렇게 바뀌어버리면 뭐가 남을까’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맞춰 살기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건 아닐까’라고.


하지만 어제오늘 만난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머리를 띵!맞은 것 같은 깊은 깨달음을 얻었고,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듯,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유연함이야말로 진짜 창의성이고,

생동감 있는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고. 코어가 바뀐다고해도 나라는 무너지는 게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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