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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즈 Dec 21. 2024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던 아이

나은이(가명)

* 2022년 12월 21일 교단일기를 기초로 수정한 글입니다.


1. 구순 포진 : 헤르페스 바이러스 감염

피로가 너무 많이 쌓이면 적색 경고등이 켜지는데 나에겐 구순포진으로 나타난다. 생활기록부 작성 마감일을 맞추려고 추운데 남아서 오들오들 떨면서 야근했더니 온몸이 쑤신다 생각했는데 아침에 바로 입술에 포진이 세 군데 생겼다. 면역력이 약해졌다고 경고등을 켜서 알려주니 다행인 건가?

생기부 마감일이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한 번 맞춰보자 생각하고 무리했더니 바로 이런 증상이 나타난다. 마감일 맞추는 걸 포기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슬슬 생기기 시작한다.


2. 떨어지는 낙엽을 잡은 행운

나은이가 떨어지는 낙엽을 잡았다면서 나에게 나뭇잎 하나를 갖다 줬다.


“선생님! 제가 떨어지는 낙엽을 잡았어요. 이거 진짜 행운이에요. 선생님 가지세요.”

“그 좋은 걸 네가 가져야지. “

“저도 하나 있어요. 이건 선생님 가지세요. “


순수한 모습이 재밌어서 모니터에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놨다. 생활기록부 작성하다가 그 나뭇잎을 보며 한 번씩 웃곤 했다.

3. ‘농부들’ 동아리 창립자

늘 밝은 에너지가 넘치는 녀석이다.

 나은이는 입학할 때부터 달랐다. 중학교 진로 체험 프로그램으로 고등학교에 혼자 와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알아보고 갔다.

그리고 고등학교 입학설명회에 엄마와 같이 와서 상담을 받았는데 엄마가 성적이 안 좋으니 내신 관리하기 쉬운 인근 학교에 가라고 하는데.


“대학 진학 때문에 제 고등학교 생활 3년을 버리고 싶지 않아요. ”


라고 말했던 녀석이다. 그 당찬 모습에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1학년 때 ‘선생님과 함께 책 읽기’ 프로그램에 내가 진행하는  ‘회복적 정의’ 책을 선택하여 참여했더랬다. 회복적 정의는 법학, 교육학, 경찰 관련 학생들이 관심을 갖는 분야인데 나은이가 선택했길래 신기해서 물었다.


“나은아, 왜 이 프로그램을 선택했어?”

“그냥요. 선생님이 한다고 해서요.”


입학설명회 때 상담받으면서 나은이의 소신발언을 지지해 주던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고 했다. 나은이 반에 수업 들어가지 않으니, 나와 함께 하고 싶어서 내가 진행하는 ‘선생님과 함께 책 읽기‘ 프로그램을 신청했다고 했다.


코로나 시절이라 줌으로 독서토론하는데 솔직하게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는 나은이는 활력소 같은 존재였다. 말괄량이 삐삐 같은 발랄 유쾌 단순함이 있었다.


그리고 2학년이 돼서는 농사짓는 것이 좋다며 ‘농부들‘ 동아리를 만들었다. 농사짓는 것이 왜 좋냐고 물어보니 날마다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재밌단다. 학교에 자전거 타고 등교하며 학교 오자마자 텃밭으로 달려갔다. 동아리 지원 인원이 적어 동아리 구성이 안될 뻔했는데 다른 동아리 떨어진 아이들을 모으고 모아 8명 최소 인원을 맞춰 구성했더랬다.


학교의 모든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재밌게 지냈다. 학교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 안 하는 게 없었다. 어딜 가든 나은이를 만날 수 있었다.

집 근처 공원에 산책하러 나갔는데 나은이를 또 만났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날 보고는 크게 외쳤다.


”선생니~~~ 임“


너무 부끄러웠다.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이 다들 쳐다봤다. 마스크에 모자까지 눌러썼는데 알아볼 줄이야. (연예인도 아니면서;;)

엄마와 같이 산책 중이던 나은이와 나은이 엄마와 한참 이야기했다.


”아이가 학교에 행복하게 다녀서 좋으시겠어요. “

나은이 엄마가 좋아할 거라 생각하며 말씀드렸는데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지 좋아하는 것만 하고 공부는 안 해요. 걱정이에요. 성적이 얼마나 안 좋은지 아세요? “


엄마의 말을 들어보니 나은이 성적이 예상보다 나쁘긴 했다. 엄마는 ‘선생님이 공부하라고 말 좀 해달라’ 고 하셨다. 산책길에 한참을 그렇게 서서 하하 호호 이야기를 나눴다.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아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아이.


그 아이는 학생부종합전형으로 국립대에 합격했다. 성적으로만 보면 가능하지 않았지만, 고등학교 생활을 즐기며 활동한 기록을 대학에서도 알아본 것이다.

수시전형은 가진 자들, 일부 특권층에 유리하다는 인식이 있다. 그러나 수시 전형은 공립학교에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하게 한다. 수능 문제풀이 위주의 교육을 벗어나게 하기도 한다.

5지선다 문제만 잘 풀어서 뭐에 쓰겠는가?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개척해 가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


떨어지는 낙엽을 잡은 나은이에게는 행운이 갔다. 나은이가 준 낙엽이 나에게는 어떤 행운을 가져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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