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랑선생 Dec 01. 2024

가난한 사람이 가난을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

가난한 이의 머릿속 계산기와 대차대조표

 대학 4학년 방학, 임용 시험공부를 할 때의 일이다. 새벽 7시부터 밤 11시까지 책과 씨름하던 시기였다. 거주 지역의 도서관이 내 공부 장소였다. (거주 지역이라고 하지만 버스로 15~20분은 이동해야 하는 곳이었다) 도서관 문을 닫을 때쯤 열람실 바깥으로 발을 내딛으면, 차갑고 달콤한 밤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고단한  하루 공부를 끝냈단 뿌듯함이 찾아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할 쯤부터 뿌듯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몇 백 미터 걸어가면 마을 버스정류장이 있었으니까. 한결같이 그 지점에서 고민의 늪에 빠지곤 했다. 집까지 걸어갈까, 마을버스를 타고 갈까. 마을버스비가 250원인가 300원쯤 하던 때였다.     




  스물셋, 당시 내게 인생 최대의 관심사는 임용 시험이었다. 최대한 빨리 합격을 거머쥐는 게 삶의 우선 과제였다. 그러나 관심사와 별도로 머릿속엔 늘 계산기와 대차대조표를 이고 살았다. 용돈 없이 겨울을 나며 공부하던 때였다. 전년도 아르바이트로 번 수입 몇십만 원, 통장에 있는 그 금액이 내 수중의 돈 전부였다. 당시 집의 경제적 상황이 별로라 집에는 손 벌리기 머쓱한 시기였다. 엄마가 많이 힘들어. 생활비가 부족한 수준이라니까. 너 얼른 시험 붙어야겠어. 언니가 정보 제공인지 조언인지 알 수 없는 말을 건넸다.


 다행히 학기 중엔 기숙사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으나, 방학 때가 문제였다. 특히 도서관에서 공부하려면 낮에는 점심을 바깥에서 해결해야 해서 고민거리였다. 대다수는 무조건 도서관의 자판기 라면이나 집에서 싸간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3500원짜리 백반 메뉴는 쳐다보지 않았다. 그걸 택한다는 건 며칠 동안의 금전적 여유를 포기하는 거였다. 학기 중엔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언니에게 엉엉 울며 문자를 보낸 적도 있다. '과자 먹고 싶은데 돈 10만 원만 보내줄 수 없냐'는 질문이 담긴 문자였다. 공부하며 이런저런 군것질로 스트레스를 풀고 싶었는데, 과자 사 먹을 돈이 충분치 않았다.  


 당시엔 내 상황을 특별히 초라하거나 비참하게 느끼진 않았다. 지금처럼 물가나 생활비가 높을 때가 아니었다. 공부가 최대 인생 과제였으니, 복잡한 감정을 곱씹을 시간도 없었다.


 

 다만 머릿속 계산기와 저울을 바지런히 움직이긴 해야 했다. 빈틈없는 시뮬레이션도 필수였다. 자, 만약 친구 한 번 만나 커피 마시고 밥 먹는다고 생각해 봐. 3일은 생활비를 이것저것 아껴 써야 하는 거야. 근데 만 원짜리 티셔츠 하나 사는 건 괜찮지 않을까? 아냐. 그러면 며칠 동안 점심은 도시락으로 해결해야 해. 식의 생각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잔고를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11월 임용고시까지 버티는 게 당시 내 목표였다.     


 친구와의 만남이야 줄이면 되고 쇼핑이야 안 하면 됐지만,  마을버스 타기는 일상의 문제였다. 마을버스의 기회비용은 당시 350원쯤 하던 딸기 우유였다. 버스를 타는 편의를 누린다면, 다음 날 좋아하는 딸기우유를 사 먹지 못할 터였다. 딸기우유를 택한다면, 밤 11시에 어두운 길을 30분 이상 혼자 걸어야 했다. 머릿속 저울을 한참 움직여보다 그날그날 다른 결정을 내리곤 했다. 어떤 날은 마을버스를 선택했고 어떤 날은 내일의 딸기우유를 잠정적으로 택한 채 30분 정도의 거리를 걸었다.


  물론 마을버스나 딸기우유와 달리 아예 계산 대상에 두지 못한 것도 있었다. 이를테면 내 적성에 맞는 진로인생의 플랜 B 같은 것이 그랬다. 당시의 나는 국립 사범대 졸업 예정자였다. 대학 4학년이 되어 다른 공부를 시작하거나 다른 진로를 택하려면 시간이나 비용이 필요했다. 머릿속 계산기나 저울 위에 올려두기엔, 기회비용이 지나치게 큰 것들이었다.


 


   

  젊은 시절 만들어진 머릿속 대차대조표는 꽤나 튼튼하고 질겼다. 도무지 흐물흐물해지거나 찢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도, 20대 후반까지도 계산기와 이 종이를 24시간 머리에 이고 다녔다. 나중엔 집안 사정이 꽤 나아졌는데도 불구하고.


 명확한 이점도 있었다. 습관처럼 머릿속에 펄럭이는 이 종이 덕분인지,  좋은 운 덕분인지 임용 시험을 한 번에 붙었고 (운 덕분이 크긴 하다), 스물네 살에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특별히 비장하거나 치열하게 산 건 아니나, 그럭저럭 성실하게는 살았다. 불필요한 지출은 하지 않았고, 가계부도 꽤 오랫동안 열심히 썼다. 숫자에 약한 인간이지만 계산 실력도 꽤나 늘었고.


 그리고 지금의 나는 운 좋게도 편의점에서 딸기 우유뿐 아니라, 2500원에서 3000원쯤 하는 스타벅스 라떼 병커피나 바리스타롤스 컵커피도 서슴없이 집어들 수 있는 부자가 됐다. - 당연하게도 농담이다. 부자라기보다 '옛 시절에 비하면 경제적 여유가 많이 생겼다'라고 말하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이겠지. - 아무튼 머릿속에 24시간 펄럭이던 대차대조표를 이제 잠깐만 소환할 수 있는 인간이 됐다.  


 그럼에도 20대의 내가 생각나, 마음이 저릿할 때가 한 번씩 온다. 수개월 전 강지나 작가의 책,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읽을 때 그랬다. 빈곤에서 성장한 여덟 명의 학생들을 10여 년을 돌아본 이 인터뷰집에서, 가난한 청년의 고백에 한참 머물러 있었다.


 생각은 항상 뭔가에 쫓겼어요. 넉넉히 쓴다는 느낌은 없고, 뭔가 쓸 데 되게 엄청난 고민을 해요. 교통비를 쓰더라도 되게 심각하게 계산적이었어요. 나는 한 달간 이 돈으로 살아야 돼. 그럼 나는 이렇게 써야 하고, 거기서 만 원이라도 생각을 안 하고 쓰면 어떻게 되지? (...) 친구들 만날 때도, 오늘 돈을 이만큼밖에 못 쓰는데, 그럼 얘를 만나면 안 되겠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점점 안 만나게 되는 거예요. 돈이 계속 나가니까. 그래서 심각할 때는 친구를 한 명도 안 만났어요.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속 한 청년의 인터뷰 中에서  


 계산기와 대차대조표를 끊임없이 머리에 이고 다니는 누군가가, 여전히 있었다.      

 




누군가는 가난한 이들에게 의문을 품는다. 왜 빈곤한 이들은 가난에서 벗어나려 더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을까? 더 계획성 있고 착실하게 삶의 단계를 밟아 나가지 않는 걸까? 근시안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시야를 넓히는 게 좋지 않나?

 

 이 질문에 색다른 답을 건넬 개념이 있다. '결핍의 덫'이란 이론이다. 하버드 대학교의 경제학과 센딜 멀레이너선((Sendhil Mullainathan)과 엘다 샤퍼(Eldar Shafir)가 저서 『결핍의 경제학』에서 제시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결핍이란 당면 과제에  점령된 뇌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거나 건설적인 행동을 하기 어렵다. 터널 비전(tunnel vision)에 갇히기 때문이다. 터널 비전은 말 그대로 터널에 갇힌 듯 하나에 집중해서, 터널 바깥의 것을 볼 수 없는 상황을 말한다. 결핍에 빠지면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눈앞의 문제에 몰입하게 된다. 이 때문에 다른 것에 마음의 여유를 둘 수 없다.


 가난한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시야의 터널에 갇히기 쉽다. 가령 머릿속으로 갚아야 할 대출금이나 집세, 연체 청구서, 다가오는 카드 결제일 등을 머릿속으로 늘 계산해야 한다. 다른 것을 생각하거나 유연하게 사고할 정신의 정보처리능력(책에서는 이를 대역폭 bandwidth이라 표현한다)의 여유가 사라진다.


 집을 제대로 치우고 정리하거나 인생의 장기계획을 세우거나 건강식이나 영양제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 건 사치가 될 수 있다. 끊임없는 과제로 머릿속이 꽉 차니, 융통성을 발휘하거나 시야를 넓히거나 자기 계발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자녀의 교육이나 건실한 생각에 보낼 시간도 줄어든다. 결핍이 심해지면 자신과 주위를 돌볼 여력이 없어져 또 다른 결핍의 악순환에 빠진다.   가난의 당면과제를 해결할수록 가난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결핍의 덫은 빈곤한 자에게 밑도 끝도 없는 변명을 쥐어주는 이론은 아니다. 가난에서 평생, 끝끝내 벗어날 수 없단 낙인을 찍는 개념도 아니다. 다만 이 이론은 빈곤에 대해 중요한 힌트를 건넨다. 가난한 이들의 머릿속 계산기는 생각보다 크고 단단하다. 역설적이게도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그 계산기가, 가난을 벗어나기 어렵게 만든다.

  


안녕하세요 유랑선생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오늘은 가난과 결핍의 덫에 대한 글을 써봤습니다. 저는 솔직히 가난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 속 뻔한 클리셰에 지루함을 느낄 때가 많아요. 가난을 굉장히 낭만적인 것으로 그리는 시선이나, 동정이나 연민의 대상으로 다루는 글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고요.  '가난한 동네의 특성' '가난이 습관인 이유'처럼 가난을 한 마디 글귀로 단정하는 제목의 콘텐츠에도 거부감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거부감조차 제 열등감이나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긴 하지만요. 아무튼 제 나름의 입장에서, 가난을 다룬 글을 써봤네요.


 그리고 죄송한 말씀을 더 드립니다.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원고랑 다른 일이 겹쳐서 12월에도 글 연재가 어렵더라고요 ㅠㅠ. 그래서 몇 주간 더 쉬고, 내년(2025년) 1월 셋째 주쯤 글을 발행하려고 해요. 정말 죄송하단 말씀드립니다.


 이제 날이 제법 쌀쌀한 겨울, 그리고 폭설까지 휩쓸고 간 겨울이지만(저도 퇴근하는 데 두 시간 반이 걸리더라고요) ㅠㅠ 연말만큼은 마음 편안하게, 행복하게 보내시길 빌어요.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덧. 출간이나 강연 소식이나 명화 카드 뉴스, 독서 리뷰 등은 주로 인스타그램에 올립니다.

유랑선생 인스타그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