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연인이었던 남자와 여자는 헤어진 채 각자의 시간을 살아간다. 몇 년이 흐르고, 배우로 성공한 여자는 우연히 남편과 들른 재즈바의 무대 위에서 남자를 마주한다. 남자가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는 순간 놀랍게도 두 사람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남자와 여자는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 두 연인의 이야기는 완벽히 행복한 엔딩을 향해 달려간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영화 라라랜드의 엔딩을 처음 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참 생각했다. 아니, 두 사람이 이미 헤어진 것 아니었나? 그러니까 이건 평행 세계 그런건가. 남주와 여주가 헤어진 이야기가 가상세계나 환상이었던 거였을 수도 있어. 아, 그러니까 둘의 사랑은 이어졌고 두 사람이 헤어졌던 부분이 가상세계였던 거야.그러고 보니 이건 주인공이 사랑과 꿈을 모두 이루는 꽉 막힌 해피엔딩이었잖아.
그러나 몇 분 후 완벽한 착각을 했단 걸 깨달았다.
상상 속에서 완벽한 행복을 보여주는 세바스찬과 미아 @영화 라라랜드의 캡처
아름다움의 극치인 엔딩을 보여주던 영화는 연주의 끝과 함께 현실세계로 돌아온다. 환상의 시간은 끝나고 두 사람이 헤어져 각자의 삶을 살던 현실이 진짜임이 밝혀진다. 영화는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 순조롭게 이어져 완벽한 엔딩을 이루었을 거라는 ‘만약에’의 시간을 관객에게 선사하다, 마지막에 찬물을 끼얹는다.
꽉 막힌 해피엔딩을 선호하는 나는 이 영화의 마무리를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데이미언 샤젤 감독(나는 이미 이 감독의 2014년작 '위플래시'를 보며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기억이 있다)은 왜 엔딩을 수많은 ‘만약에’의 향연으로 수놓다 마지막에 현실로 되돌아오는 길을 택했을까.만약 그와 그녀가 완벽한 만남을 시작했다면. 두 사람이 함께 파리로 향했다면. 만약에 그와 그녀가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았다면.무엇 때문에 이 가정법의 상황을 몇 분 동안 아름답게 펼쳐 관객에게 보여준 건가.
가만, 그러고 보니 이 엔딩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살아오며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해온 수많은 가정법, 그 ‘만약에’의 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만약 대학 전공을 다른 것으로 택했다면. 만약 다른 일을 업으로 삼았었다면. 진즉에 틀에 박힌 삶이 아니라 조금 더 자유로운 삶을 살아왔다면. 내가 살아오며 수도 없이 떠올렸던 가정법들이다. '만약에'의 가정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하루를 보낸 날도 있었다. 대개 현재 마주한 삶의 불만족도가 가장 높던 시기에 그런 생각을 했다. 과거의 가정법으로 머릿속을 꽉 채우던 날, 내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만약에’ 라는 머릿속 생각과 공허한 마음. 그 외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만약에'의 가정법과 매몰비용의 오류
경제학에는매몰비용(sunk cost)이라는 것이 있다. 간단한 개념이다. 과거에 이미 지출하여 회수할 수 없는 비용. 엎질러진 물을 상상하면 된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담아 컵에 담을 수 없듯, 현재에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매몰비용이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나는 2008년 12월 31일, 극장에서 키아누 리브스와 제니퍼 코넬리 주연의 <지구가 멈추는 날>이라는 영화를 감상했다. 이 작품도 누군가에게는 의미 깊은 영화일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내용이 너무 지루해 지구가 멈춘 듯 영화관에서 잠들었다.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수 십 번 했으나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는 못했다. 왜 그랬을까. 이미 치룬 티켓값이 아까워서였다. 그 8000원이 아까워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내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지루해서 참을 수 없는 영화임에도, 일단 영화관에 들어가면 우리는 눈을 부릅뜨고 작품을 끝까지 감상하려 노력한다. 열심히 본다고 그 돈을 다시 보상받는 것이 아님에도. 이렇게 ‘이미 치룬 영화 티켓값’은 매몰비용의 대표적인 예다.
비슷한 경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나에게 맞지 않는 사이즈의 옷이나 구두를 샀는데 구매할 때 지출한 비용이 생각나 이것들을 버리지 못하는 순간, 이미 치룬 뷔페 입장료가 아까워 배탈이 날 때까지 음식을 먹는 때가 그러하다. 경제학에서는 이 ‘매몰비용’을 고려하지 않아야 합리적 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영화가 지루하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다른 즐거운 일을 하는 것이, 맞지 않는 사이즈의 옷이나 구두는 과감하게 버리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이미 회수할 수 없는 비용에 대한 생각은 집어치우고, 앞으로 치워야 할 비용만 고려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의 지름길이다. 만약 과거에 지출해 되돌릴 수 없는 비용을 계속 생각하며 무언가를 선택할 경우, 매몰비용의 오류를 저질렀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나 비용에 대한 생각에 붙들린채 과거의 곁을 서성대곤 한다. 이미 망친 1교시 시험에 대한 생각에 골몰하다 2교시 시험까지 엉망으로 보는 경우, 이미 들어간 투자비용 때문에 적자임에 분명한 사업을 접지 못하는 케이스가 모두 해당된다. 인간관계도 예외는 아니다. 누군가에게 들였던 시간과 노력 때문에 나에게 심리적으로 마이너스가 되는 연인이나 친구와의 관계를 지속하는 때가 있다.
사람들이 매몰비용의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행동경제학자이자 <넛지>,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 저자인 리처드 세일러는 우리 마음속의 ‘심리적 회계장부’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비용과 이득을 끊임없이 따져보며 회계장부를 작성한다.
가령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며 내 기를 앗아가는 친구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와의 만남이 괴로워도 그동안 인간관계 유지에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 쉽사리 인연을 쉽게 끝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관계를 끊는 건 심리적 회계장부에 마이너스(-)로 남는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착각이다. 내가 과거에 들였던 시간과 노력은 이미 지나간 것으로서 앞으로의 선택을 위해서는 고려하지 않는 편이 낫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에너지 뱀파이어를 계속 만나며 앞으로 내가 소모할 에너지에 대해서만 따져보는 편이 현명하고 합리적인 선택이다.
가정법의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야 할 때
우리가 인생의 힘겨운 순간마다 떠올리는, 무수한 ‘만약 과거에 ~했다면’의 가정법 또한 마찬가지다.과거의 선택을 두고 인생의 가정법을 끊임없이 되새기는 것은 매몰비용의 오류, 엎질러진 물 주워담기와 같다.
라라랜드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떠올려보자. 세바스찬의 연주와 함께 '만약에'의 향연이 끝난 후, 미아는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세바스찬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본다. 두 사람은 잠깐의 만남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 짓는다. 이 장면이 아마 라라랜드의 진정한 엔딩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장면,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세바스찬과 미아의 모습 @영화 '라라랜드'의 캡처
과거에 하지 못했던 선택에 대한 미련, 안타까움, 추억을 가끔 떠올릴 수는 있다. 누구나 '만약에 ~했다면'의 가정법을 이따금 머릿속에 펼쳐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만으로는 현재와 미래를 이어가기 어렵다. 매몰비용의 오류 때문에 앞으로의 선택을 망치는 셈이다.
‘만약에’라는 머릿속 가정, 그 가정이 이어져 만들어낸 환상 속 장면은 아름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언젠가는 가정법의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미련 없이 떠나야 한다는 사실, 라라랜드의 마지막 장면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안녕하세요 유랑선생입니다.
오늘은 3년 전에 <아무거나 3분 교양> 매거진에 올렸던 이 글을 <다정한 교양> 브런치북에 옮겨서 발행합니다.
어줍잖은 고백을 하자면 오늘 새로운 글을 발행하려고 불과 한 시간 전까지 글을 쓰긴 썼어요. 끙끙거리면서 거의 그 글을 완성하긴 했지만 ㅠㅠ 가난을 다룬 주제의 글이고 조금은 민감한 내용일 수도 있어서 그대로 발행해도 될지 고민이 되더라고요. 더 정교하고 세심하게 다듬어서 나중에 올려야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발행한지 조금 오래된 이 글을 다시 올립니다. (글을 옮긴 관계로, <아무거나 3분 교양>에 있던 원글은 발행 취소를 하였습니다;;;그 때 좋아요와 댓글 남겨주신 분들께 죄송하단 말씀 드려요.)
이 글에서 다룬 '매몰비용의 오류'는 제가 평소에 경제 관련 책 집필할 때도 엄청나게 많이 다룬 주제예요. 경제학 책에는 주로 '손실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초고속 비행기 운영을 지속했던 콩코드사의 실수'나 '디지털 카메라의 시대를 예감했음에도 필름 카메라를 끝까지 고집했던 코닥(KODAK)사의 선택'처럼 국가나 기업의 잘못된 선택을 사례로 들어 설명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 글은 브런치스토리 맞춤형(!)으로 제가 좋아하는 영화 <라라랜드>와 관련지어 매몰비용을 설명했던 터라, 여러모로 기억에 남네요.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과거 일에 대한 후회는 쓸모 없다 늘 생각하려 하지만, 이미 지나간 기회나 선택을 자꾸 떠올리면서 '내가 그 때 왜 그랬을까?' '그 순간 만약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란 생각을 이어가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게 현명한 답이란 걸 이미 알지만, 저도 모르게 과거의 망령(!)에 붙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죄송한 말씀 하나 더 드립니다. 11월에는 제가 강연이랑 원고랑 거대 업무(!)가 함께 있어서 글을 올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11월에 업무랑 강연 등등을 잘 끝내고 12월 초, 다시 연재를 재개(!)하도록 할게요. 거듭 죄송하단 말씀 드립니다.
글 찾아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하단 말씀도 드려요 : ) 독자분들께서도, 이웃분들께서도 모쪼록 감기 조심하시면서 건강하고 편안하게 일상 보내시길 빕니다!
덧. 출간이나 강연 소식이나 명화 카드 뉴스, 독서 리뷰 등은 주로 인스타그램에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