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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Oct 13. 2024

무한 긍정의 역설    

낙관주의자도 비관주의자도 행복할 수 있는 비결

 몇 년 전 모임에서 처음 만난 분에게 질문을 받았다. 글을 쓰신다고 했는데 작가로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을까요?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글 쓰는 일로 근근이 먹고살 수 있다면 정말 다행이죠." 잠시 침묵을 가진 상대가 입을 뗐다. 지원 씨, 글쓰기로 대작가(!)가 되고 싶다거나 어마어마한 베스트셀러를 내고 싶다거나 그런 구체적인 꿈은 없으신가요? 다들 그런 꿈을 가지잖아요. 적절한 답이 생각나지 않아 머뭇거리며 말했다. "흠... 글쓰기로 먹고사는 게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 생계를 이어가겠다는 게 정말 큰 꿈 아닐까요?"


 상대는 의아한 눈빛을 보내며 일침을 가했다. 지원 씨는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큰 꿈을 꿀 기회, 스스로의 가능성을 가로막고 있네요. 좀 더 긍정적으로 미래를 생각하는 게 어떨까요. 좋은 상상을 자주 하고 되뇌면, 그대로 이루어지더라고요. 꿈의 사이즈를 늘려야 해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였다. 덕분에 내 꿈의 왜소한 사이즈에 대해 생각해 봤다. 내 희망이 지나치게 작고 볼품없는 걸까? 내가 너무 부정적인 인간인 걸까?


 미래를 보는 내 시선에 대해서도 고찰해 봤다. 최근 몇 년 간 나는 운 좋은 사람이었다. 휴직 중에 좋아하는 일(글쓰기)을 찾았고, 덕분에 책도 여럿 냈고 좋은 기회도,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다. 주변에서는 종종 더 큰 꿈, 새로운 열망을 가지라는 조언도 건넸. 


 인생 역전. 나에게도 그런 열망이 찾아올 때가 있지. 어마어마한 작가(?)가 된다거나 베스트셀러를 내서 벼락부자(!)나 되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이는 순간이 온다. 만약 로또 1등에 당첨된다면 아파트부터 마련할까, 새 차부터 한 대 뽑을까 고민하는 것과 비슷한 행복회로를 돌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 안에는 비관주의자가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대체로 최악의 결과를 상상하면서 스스로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존재다. 걱정이란 예방주사를 실컷 맞으면 현실은 그 최악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으니, 위안을 얻는 식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이 되라는 세상의 주문, 긍정적이어야 행복하다는 명제를 들을 때마다 고민에 빠진다. 나란 인간은 긍정적인 사람이 되기엔 애초에 글러먹은 걸까?  비관주의가 내 꿈과 행복 근본적으로 가로막고 있는 아닐까? 어떻게 해야 긍정적인 인간으로 환골탈태할 수 있을까? 



낙관주의의 양면


 아무리 비관적인 사람이 많다 해도, 인간에게는 낙관적 편향(optimistic bias) 이란 게 있다. 자신의 미래가 실제보다 더 유리하게 전개될 거라고 믿는 경향 말이다. 행동경제학의 아버지인 대니얼 카너먼은 한 설문조사에서 낙관주의의 수준을 측정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얼마나 오래 살 것으로 생각합니까?’란 질문. 


대체로 사람들은 평균 기대수명보다는 자신이 2~3년쯤 더 길게 살 것이라 예측했다.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뒤 이혼을 할 확률은 몇 %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많은 연인들은 1%도 안 된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현실 속 서양의 이혼율은 40%가 넘는다. 


 이 낙관적 사고에는 명백한 장점이 있다. 긍정 심리학을 창시한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비관주의자에 비해 낙관주의자의 성취도가 평균적으로 높다. 낙관주의자는 면역력도 강하며 우울증에 걸릴 확률도 더 낮다. 애초에 인류의 진화 자체가 낙관주의에 빚진 측면이 있다.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 덕분에 인류는 농사를 짓는 기나긴 시간, 문명을 꽃피우는 긴 기간을 인내할 수 있었다.


물이 반쯤 담긴 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낙관과 비관의 갈림길을 가르는 문제로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낙관주의가 매 순간의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제임스 스톡데일의 일화를 곱씹어 보면 알 수 있다. 스톡데일은 원래 미군의 항공기 조종 장교였다. 베트남 전쟁 당시 참전했다가 베트콩에 포로로 잡혔고, 당시 악명 높았던 호아로라는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포로수용소는 미군에게 여러모로 가혹한 곳이었다. - 베트콩(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미군은 침략군이었으니까. - 스톡데일은 좁은 독방에 갇혀 지내야 했고,  포로에 대한 고문도 이어졌다. 이 길고 지난한 계절을 7년 6개월이나 버틴 뒤, 스톡데일은 마침내 풀려나 고국에 돌아왔다.


살아남은 스톡데일에게 기자가 묻는다. 당신의 많은 동료들이 포로수용소에서 중간에 사망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그 길고 가혹한 기간을 버텨내고 살아왔나요. 스톡데일은 의외의 답을 던졌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이들은 모두 다 죽었습니다.  


제임스 스톡데일의 모습


 스톡데일에 따르면 미군 포로들 사이에는 근거 없는 낙관과 희망의 분위기가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시기가 낙관의 절정에 달할 때였다. 그들은 이번 크리스마스 전에는 나갈 것이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에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낙관주의자들은 다음 희망의 수순을 밟았다. 부활절이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다. 그런 식으로 추수감사절과 다음 크리스마스가 별다른 기쁨 없이 지나갔고, 그들이 바라는 희망은 끝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희망주의자의 낙관은 돌연 상실과 좌절로 변모했다. 몇몇 이들은 상실감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처음엔 스톡데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석방될 거란 낙관에 빠져든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각을 조금씩 내려놓았다. 대신 냉정한 현실을 인정했다. 현실에 맞서기 위한 대비에도 힘썼다. 그는 수용소에서 미군들 사이의 연락망을 구축했고,  조직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 일로 고문을 받았으나, 고문을 앞두고서도 누군가 구해줄 것이라는 환상에 빠지지 않았다. 이번 고문은 더 고통스러울 것이니 참아야 할거란 다짐을 되새기며 대비했다7년 넘는 가혹한 시간을 버티게 해 준 마음가짐이었다.


훗날 미국의 경영학자 짐 콜린스는 성공적으로 이어지는 조직은 다른 조직과 무엇이 차별화되는지에 대해 연구하면서 스톡데일의 일화에 주목했다. 그의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비관주의를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라 명명했다.  


낙관주의도 비관주의도 늘 정답은 아닌 이유


 낙관주의는 대부분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가장 좋은 결과를 기대하면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  최상의 결과를 가정하면 항상 최상의 결과가 나올 것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에는 이 생각이 오히려 커다란 상실이나 좌절로 이어질 수 있다. 좋은 결과에 대한 막연한 기대보단 가장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전략 탐색과 구체적인 시도(전략적 낙관주의)가 도움이 된다. 그 꿈이 현실화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직시하며 플랜 B를 고려할 필요도 있다.


 비관주의자의 경우에는 어떨까. 대부분의 비관주의자는 최악의 경우를 상상한다. 이 거대한 상상력 때문에 과제를 시작하지도 못하거나 회피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어차피 마음속 비관주의를 내쫓기 어렵다면, 불안감을 활용할 수 있다. 최악의 결과를 상정하고 기대 수준을 낮춘 뒤 가장 나쁜 상황이 오지 않도록 대비하는 것이다. 이렇게 불안감을 동력으로 바꾸는 이들을 심리학자 K.노럼은 그의 저서 <걱정 많은 사람들이 잘되는 이유》에서 '방어적 비관주의자'로 명명했다. 


 


 누구나 낙관주의나 비관주의의 양 갈래의 길 앞에서 주저하고 머뭇거릴 때가 있다. 어쩌면 두 갈래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통념을 버리는 게 먼저 일 수 있다. 그래야 행복의 시간도, 고통의 시간도 유유히 건널 수 있지 않을까.  



 안녕하세요. 유랑선생입니다.


 오늘은 비관주의와 낙관주의에 대한 글을 써봤어요. 저는 성향상 비관주의의 지배를 받는 날이 많긴 합니다-그리고 이 성향이 절 힘들게 만들 때가 많긴 하지만- 그래도 글을 쓰거나 삶의 과제를 끝낼 때 비관주의의 도움을 받기도 해요. 


 최근 며칠 동안은 세상에 대한 비관주의가 머릿속에 떠돌아서 힘들었는데(원고 쓰면서 신문 사회면을 많이 훑는 편인데, 그럴수록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점점 살기 나빠지고 망해가는 것 같다"는 근거 없는 비관주의가 자꾸 떠오르곤 합니다), 묘하게도 한강 작가님의 노벨 문학상 소식을 들은 후부터 희망과 긍정의 용기가 샘솟더라고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글을 쓰다 힘들 때마다 제가 되새겨 보는 긍정적인 명제가 하나 있어요. '계속 글을 쓰고 고치다 보면 점점 더 나은 글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차곡차곡 쌓이는 시간에 대한 믿음이 꾸준한 글쓰기를 이어갈 수 있는 큰 동력이었네요. 


참, 그리고 제가 다음 주에는 개인사정이 있어서, 한 주 쉬고 10월 27일(일)에 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하단 말씀드립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덧. 출간이나 강연 소식이나 명화 카드 뉴스, 독서 리뷰 등은 주로 인스타그램에 올립니다.

유랑선생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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