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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Oct 06. 2024

영화 <러브레터>, 첫사랑이 잊히지 않는 이유

첫사랑의 강렬한 각인 효과는 어디에서 올까

이 글에는 1995년 일본 영화 <러브레터>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너 이 영화 볼래?” 

 고등학교 2학년 때였던가. 같은 반 친구가 어느 날 은밀하게 속삭였다. 얌전한 모범생인 친구가 이토록 비밀스러운 제안을 건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무턱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가 조용히 건넨 건 비디오테이프였다. 러브레터란 네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일본 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국내에 개방되기 전이었다. 엑스 재팬의 음악이나 공각기동대 같은 애니메이션도 불법 복제를 통해야 접할 수 있던 때.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는 입소문이 자자한 영화였다. 설원에서 여주인공이 ‘오겡끼데스까'お元気ですか!('잘 지내나요'란 뜻이라고 한다)란 말을 외치는 장면은 한국의 광고나 예능에서도 숱하게 패러디되며 유명해졌다.   

   

바로 이 장면. 오겡끼데스까.  @네이버 영화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 와 비디오의 재생 버튼을 누르던 기억이 난다.  투명하고 담백하면서도, 묘한 여운이 남는 영화였다. 이야기의 초반부는 여주인공 와타나베 히로코(나카야마 미호 粉)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히로코에게는 전 약혼자 후지이 이츠키가 있었다. 3년 전 산행을 하다 조난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난 연인.


히로코는 우연히 이츠키의 중학교 졸업앨범에 있는 옛 주소를 알게 된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그의 주소로 별다른 기대 없이, 깊은 그리움이 담긴 서신을 보낸다.      


 놀랍게도 얼마 후 답장이 온다. 알고 보니 답장을 보낸 이는 이츠키와 동명이인인 중학생 시절 동급생이자, 북쪽 지방 오타루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여자 후지이 이츠키였다. (알고 보니 히로코가 여자 이츠키의 주소를 자신의 옛 연인의 주소로 알고 잘못 보낸 것)



와타나베 히로코(좌)와 그의 옛 연인과 동명이인 동급생인 후지이 이츠키(우). 보다시피 똑같이 생김( 나카야마 미호가 1인 2역을 맡았다)


우연으로 시작된 일이었으나 편지 교환은 계속된다. 히로코는 여자 이츠키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옛 연인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묻는다. 그때까지 여자 이츠키에게 있어 남자 이츠키는 조금 무뚝뚝했던, 동명이인이라 곤혹스러운 기억을 몇 번 남긴 급우였다. 그러나 히로코와 서신 교환을 하며 위해 옛 동급생의 기억을 소환한다.   


 이 조용하고 긴밀한 연락이 이어지며 두 여성 사이에도 차곡차곡 유대감이 쌓인다. 그리고 히로코는 동명이인인 두 이츠키 사이의 추억을 들으며 알게 된다. 자신과 여자 이츠키의 얼굴이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단 사실을. 자신의 옛 연인이 중학생 시절 여자 이츠키를 짝사랑했으며, 고백도 못하고 끝난 첫사랑의 강렬한 기억 때문인지 그가 (여자 이츠키와 너무나도 쏙 빼닮은) 자신과 연인이 되었단 사실도 깨닫게 된다.         



첫사랑의 기억은 왜 잊히지 않을까, 자이가르닉 효과


 첫사랑의 기억은 풋풋하고 강렬하다. 황순원의 「소나기」 속 소년 소녀의 이야기가 긴 여운을 남기는 것도, 영화 『클래식』이나 『건축학개론』 속 첫사랑 이야기가 공감을 자아내는 까닭도 비슷한 지점에 있다. 물론 영화 『러브레터』속에는 남자 이츠키의 직접적인 심리 묘사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의 내용이 전개될수록 남자 이츠키가 그녀를 짝사랑했으며 그 감정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음을 관객은 자연스레 알게 된다.


짝사랑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남자 이츠키;;;;; @네이버 영화

 

영화를 보면서 관객은 첫사랑의 의미를 곱씹게 된다. 왜 첫사랑은 특별한 추억인 걸까. 무엇보다 ‘첫 경험’의 강렬한 각인 효과가 존재한다. 설렘과 자유를 만끽했던 첫 여행의 기억, 처음 맛본 특별한 음식의 맛처럼, 인간이 처음으로 느낀 설렘과 만족도는 뇌에 깊숙이 각인된다. 그 시점의 감정과 경험은 응축되어 기억 속 특별한 저장소에 자리 잡는다.       


 다른 시선과 해석도 가능하다. 첫사랑의 특징 중 하나는  ‘미완성’이란 것이다. 예외도 존재하나, 대체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거나 짧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 미완성이 불러오는 각인 효과를 심리학에서는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로 명명한다.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이나 꿈, 완료하지 못한 과제를, 완벽히 끝낸 일보다 더 잘 기억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 심리적 현상을 연구한 이는 옛 소련(리투아니아 출신)의 심리학자인 블루마 자이가르닉(Bluma Zeigarnik. 1900~1988)이다.


블루마 자이가르닉  @위키피디아


 1927년 자이가르닉은 오스트리아 빈의 레스토랑에 앉아 식사를 기다리던 중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웨이터들이 따로 메모를 남기지 않았음에도, 수많은 손님의 주문을 헷갈리지 않고 정확히 서빙을 하는 것이었다. 자이가르닉은 자신의 음식을 날라다 준 웨이터에게 ‘조금 전 옆 테이블에 가져다 놓은 메뉴가 무엇이었는지’ 질문한다. 그러나 웨이터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주문 처리 전(일을 완결하기 전)까지는 주문 내용을 명확히 기억하려고 했으나 주문이 끝나면 기억할 필요가 없기에 긴장이 풀리고 금세 무엇인지 잊어버린 것이다.      


 힌트를 얻은 자이가르닉은 새로운 실험을 해본다. 실험 참가자를 두 그룹으로 나누어 동일한 과제를 여러 개 줬다. 한 그룹은 그대로 과제를 실행하게 한다. 다른 그룹은 수행하기 전에 다음 과제까지 주며 일을 완료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그 결과 방해받은 그룹이 과제 내용을 더 잘 기억해 냈다. 어떤 일에 집중할 때 끝마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게 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긴장과 불편한 상태가 지속된다. 이 탓에 완료하지 못한 과제는 머릿속에 오랫동안 각인된다.       


 첫사랑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짐작 가능하다. 이별이나 결혼으로 ‘완료’ 또는 '완성'(이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된 명확한 연애와 달리 첫사랑은 대개 미성숙한 시기에 만나, 제대로 된 만남이나 헤어짐 없이 짝사랑으로 끝나거나 모호한 형태로 끝맺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미완성의 기억은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는다.



남자 후지이 이츠키. 영화 속 설레는 장면  @네이버 영화

     

 『러브레터』 속 남자 이츠키의 첫사랑이 특히 그렇다. 그의 첫사랑은 명료한 고백이나 완료 없이 머뭇거림 속에 끝난다. 수줍음 많던 남자 이츠키는 남쪽 도시로 전학을 가게 된다. 때마침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결석 중이던 여자 이츠키의 집에 들르긴 하나, 어색한 인사만 남긴 채 둘의 인연은 끝난다.  물론 자신의 마음을 도서 대출카드 뒷면에 조심스럽게 남기긴 하지만. (이 마음이 비로소 전해진 후 ‘쑥스러워서(창피해서) 이 편지는 보낼 수 없어'란 여자 이츠키의 수줍은 독백이 이어진다.) 


결정적 장면에서 끝나는 드라마의 비밀


 자이가르닉 효과는 첫사랑의 기억뿐 아니라 삶의 다양한 지점에 숨어 있다. 드라마나 영화의 엔딩이 대표적인 예다. 대다수 드라마의 매 회차는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장면에서, 엔딩 음악과 함께 아쉽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끝맺음은 보는 이의 허탈감을 자극하거나 스트레스를 유발하지만, 긴장이 마무리되지 않았으니 시청자는 호기심 속에 다음 회차를 기다리게 된다. 마블의 히어로 시리즈나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과 같은 영화의 연작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다음 대사나 장면을 암시하는 장면이나 대사로 관객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다음 시리즈를 보게끔 유도한다.


 드라마의 각 회차 엔딩은 결정적 장면 직전에 끝나며 시청자의 호기심이나 여운을 자극한다. @나무위키

 


  티저 광고(teaser advertising) 역시 미완성 효과를 마케팅 기법이다. 홍보하려는 상품이나 회사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암시와 은유의 장면으로 광고를 구성하는 광고를 말한다.


 티저 광고의 시초로 미국의 유명 담배 브랜드 카멜(CAMEL)의 광고를 꼽는다. 1913년, 카멜은 광고비를 신문사에 내고 신문 지면 광고를 2주간 싣기로 하였다. 놀랍게도 회사는 첫날 아무것도 없는 백지 지면을 내보냈다. 이 백지 광고는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인쇄 사고가 난 것일까 의아해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런데 다음 날의 광고 지면에는 백지에 점이 찍혀 있었다. 날이 갈수록 이 점은 늘어났다. 며칠 후 낙타 모양이 만들어졌다. 낙타가 완성된 뒤 며칠 후에는 C, A, M, E, L이라는 다섯 개 알파벳을 하나씩 등장시켰다. 이런 식으로 하나씩 모습을 등장하던 광고의 마지막 날에야 비로소 카멜 로고가 삽입된 담뱃갑의 모습이 제대로 등장한다. 호기심을 유발하는 이 티저 광고 기법 덕에 카멜 담배 회사의 매출은 급격히 상승했다.   


담배회사 카멜의 티저 광고. 광고 역사상 최초의 티저 광고로 남아 있다.



미완성의 여백이 건네는 말


영화 <러브레터> 속 이야기는 첫사랑의 아련함과 먹먹함으로 종결을 맞이했을까. 그렇지 않다. 여자 이츠키와 히로코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각기 새로운 완료를 향해 나아간다.   

   

극 중 히로코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옛 연인(남자 이츠키)을 마음으로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 이츠키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전 약혼자와 마음 속 이별을 고하고, 새로운 시작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여자 이츠키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에게 있어 남자 이츠키와 학교를 다니던 중학교 3학년 시절은 사실 그녀에게 있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동명이인 이츠키의 추억을 되살리면서(그의 죽음을 알고 큰 충격을 받은 시점도 있었으나) 과거의 시절 중 나쁘지 않은 기억, 되새길 수 있는 좋은 추억이 자리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녀 역시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조금씩 극복해 간다.


각기 새로운 '완료'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히로코(좌)와 이츠키(우) @네이버 영화 스틸컷

 

삶의 모든 과정에 명확한 완료나 완성을 단정 짓긴 어렵다. 완벽하고 깔끔하게 생의 퍼즐조각을 맞추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어떤 일은 미완성으로 남아 마음에 오랫동안 머문다.



 그러나 미완성의 여백이 늘 안타깝고 애석한 것만은 아니다. 그 여운이 기억 속 반짝이는 조각으로, 휘발되지 않는 추억으로 남기도 하니까. 영화 『러브레터』 속 이야기가 그랬듯.      

     



안녕하세요. 유랑선생입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추억의 영화 『러브레터』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어제 새벽 네 시까지 뭘 써야 할지 생각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안 나더라고요. 오늘 아침에 급하게 글을 써서 발행합니다.


 최근에 뉴진스의 하니 님이 일본 콘서트에서 불러서 큰 화제가 되었던 마츠다 세이코의 <푸른 산호초>란 곡이 이 영화에서 의미심장한 노래로 등장하기도 했단 걸, 검색하다 알게 됐네요. (남자 주인공 후지이 이츠키가  조난 사고로 숨을 거두기 직전 부른 노래로 등장했다고 합니다 :) 저 개인적으로는 열일곱 살 겨울방학 내내  이 영화의 OST를 씨디로 듣던 기억도 나서, 저에게도 특별한 영화라, 글을 쓰면서도 즐거웠네요.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려요. 이번 가을에는 제가 당장 집필해야 할 원고가 있어서, 10월이나 11월에는 연재를 조금 쉬거나, 아니면 새롭게 들어갈 원고의 내용을 (아예 새로운 브런치북을 만들어서) 발행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제 성인 대상의 원고를 집필할 예정이라 이 공간에 조금이라도 소개하고 싣는 게 원고 쓰는 데도 도움이 되고, 덜 부담스럽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음 글은 10월 13일(일)에 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덧. 출간이나 강연 소식이나 명화 카드 뉴스, 독서 리뷰 등은 주로 인스타그램에 올립니다.

유랑선생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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