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그런 건 저도 잘 모르고요
내 머릿속 ‘어른의 이미지’는 엄마에게서 왔다.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엄마는 마흔 남짓의 '어른'이었다 -딱 지금의 내 나이다- 당시 엄마는 안정형인 사람, 절제의 인간으로 보였다. 매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 자식들 밥을 챙기고, 가게 문을 열고, 열몇 시간씩 음식 만들고 나르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던 사람. 책벌레 딸을 일주일에 한 번씩 도서관에 데려가는 의식도 꼬박꼬박 치르던 어른.
어릴 땐 궁금했다. 엄마도 가끔은 버겁지 않을까. 인생의 나쁜 패를 제법 많이 만난 엄마였으니까. 이따금 사는 게 징그러울 만도 했으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엄마는 단 한 번의 불평도 내비치지 않았다. 투정도, 회피도 없었다. 그저 맡은 일을 묵묵히 했다.
그래서 지레짐작했다. 엄마의 유전자를 많이 대물림받은 나니까, 마흔 살 전후쯤 되면 나 역시 의젓해질 거라고. 불평 없이 삶을 껴안은 인간. 어깨에 내려앉는 책임을 말없이 감내하는 사람. 바지런함과 의젓함을 (자동장착 부품처럼) 갖춘 어른. 마흔의 나는 나잇값 하는 인간형이 절로 될 거라 믿었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마흔이 넘은 나는 여전히 투덜이 스머프형 인간이다. 주기적으로 삶에 투덜거린다. (물론 속으로만. 이걸 들어줄 청중이 주변에 별로 없다). 회피형 인간인 것도 변하지 않았다. 아침 기상 때에도, 출퇴근 길에도 어디로 도망가고 싶단 생각을 자주 한다.
내가 쉽게 철들지 않는단 사실을, 우리 집 어린이도 눈치챘나 보다. 하루는 아이 책가방에서 그림 그린 걸 발견했다. 학교에서 가족 소개하는 그림 그리기 활동을 했나 보다. 아빠, 엄마, 자신을 그렸는데, 날 그린 그림 옆에 ‘엄마- 잠꾸러기’란 설명글을 붙여 놨다. ‘미인은 잠꾸러기’ 식의 미사여구가 담긴 문구가 아니었다. 진짜로 잠을 많이 잔다는 사실을 반영해 그린 느낌이었다.
뜨끔했다. 저녁잠을 자는 내 모습을 그린 건가. 퇴근 후 가족들 저녁을 차리고 밥을 먹은 다음, 아이 숙제를 봐주는 척하며 과자를 뜯어먹다가 소파에 슬쩍 눕는 게 내 일상 루틴이다. (어떤 때는 슬쩍 눕지 않고 진짜 피곤해서 기절한다) 예부터 아무 데서나 잘 자는 능력을 갖춘 나라서, 이 시점이 되면 자동으로 잠이 슬슬 온다. 그렇게 가수면 상태에 놓인 날 보며 아이가 '엄마 또 자네?!'라고 아빠한테 일러바치는 소리가 들린다. 뒤이어 남편이 날 보면서 혀를 끌끌 차곤 한다.
피로함에 취약한 인간이란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만, 여하튼 과거 마흔 남짓의 엄마와 현재의 나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 잠꾸러기면서 게으른 나, 충동적으로 편의점에 들러 건강에 1도 도움이 되지 않는 과자와 젤리와 초코우유 따위를 사는 나. 모바일 게임 중독으로 캔디크러시 1589단계를 달리는 나. 감정의 등락폭이 점점 커지는 일희일비의 나. 시도 때도 없이 소파에 눕는 인간인 내가, 마흔 인 것이다. 놀랍게도.
가끔은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과연 인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성숙의 길로 가는 존재인 걸까? 의젓한 어른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난 '진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마을 광장에 사람들이 한가득 모여 있다. 다채로운 인간군상이 눈에 띈다. 얼핏 보면 난장판으로도 보이는 이 풍경, 감상자의 의문을 자아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림 속 풍경은 왼편과 오른편으로 분할되어 있다. 화면의 왼쪽 광장은 음식, 음악, 춤으로 가득한 축제 분위기다. 가면을 뒤집어쓰고 춤을 추는 사람들, 음식을 먹고 마시며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 악기 연주자와 곡예사 역시 축제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심지어 맥주 통에 걸터앉은 큰 몸집의 사내는 머리에 고기 파이를 얹고 있다. 허리에는 도축용 칼이 꽂혀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푸줏간 주인임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 광장의 오른쪽은 대조적인 분위기다. 기도를 하거나 성경을 읽으며 종교적인 의식을 치르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그들의 단백질 공급원은 고기가 아니라 생선(중세 유럽인들, 특히 네덜란드인들이 즐겨 먹는 청어로 보인다)인 듯하다. 조용하고 금욕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수수께끼 같은 그림의 의미는 뭘까.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 이란 작품 제목으로 답을 짐작할 수 있다.
사순절이란 유럽의 크리스트교인들이 치르던 의식이다. 매년 2월 중하순 부활절 전, 주일을 뺀 40일의 기간 동안 가톨릭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며 경건하고 정결한 마음을 지키며 지내던 시간을 말한다. 신실한 마음을 지키기 위해 저녁이 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하루에 한 끼만 먹거나 육식을 절제했다. 대신 청어와 같은 생선을 먹으며 수십 일을 보냈다.
기나긴 금욕과 절제의 시간을 버티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순절 직전, 마음껏 놀자는 마음으로 보내던 축제가 사육제(canival, 謝肉祭)였다. 카니발은 라틴어 '카르네 발레(carne vale)', 즉 ‘고기를 치워버린다(Carislevamen)’에서 온 말이다. 금욕의 시간에 돌입하기 직전, 카니발 기간 동안 사람들은 고기와 술을 마음껏 먹고 마시며 축제를 즐겼다.
결국 그림 속 왼쪽은 사육제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한 광장이고, 오른쪽은 사순절을 맞아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인 것이다.
작품을 그린 인물은 16세기 네덜란드의 대가,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hel de Oude, 1527 – 1569)이다. 평범한 농부들의 생활과 풍습을 담은 작품이 많아 ‘농부의 화가’로 불린 예술가다. 그러나 브뤼헐의 작품 속 풍경은 단순한 상황 묘사를 뛰어넘는다. 화가는 인간에 대한 깊숙한 통찰을 화폭에 담아낼 줄 알았다.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 도 마찬가지다. 화면을 둘로 분할한 사순절의 금욕과 사육제의 쾌락은 팽팽한 긴장을 자아낸다.
어쩌면 브뤼헐은 이 두 가지 풍경에서 인간의 양면성을 포착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쾌락과 금욕, 이성과 절제가 공존하니까. 이 두 가지 모순된 면이 때로는 우리 마음속에서 아웅다웅 다투고, 줄다리기를 지속한다. 쾌락과 금욕 사이에 타협할 수 없는 싸움이 일어나 마음속이 전쟁터가 되기도 한다.
예전엔 생각했다. 참다운 어른이 되고 철이 들면, 이 전쟁터에서 금욕과 절제와 초연한 마음이 승리할 거라고. 마음속 전쟁은 절로 사그라지고 나잇값은 절로 하게 될 거라 여겼다. 그러나 나이 먹을수록 철들지 않는 작은 인간이 내 안에 있단 걸 발견하게 된다. 몸은 나이를 먹어 가는데 감정과 욕구는 쉽게 나이를 먹지 않는단 사실도 깨달았다.
그래서 요즘엔 생각한다. 어쩌면 어른이 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한 걸지도 모른다고. 이성과 본능 사이의 싸움이, 내면에서 끝없이 이어질거란 사실을 인정하는 것. 어른에 대한 환상 따위를 쫓는 게 아니라 의젓해지지 않는 내 안의 어떤 지점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일희일비의 인간인 날 직시하며 쾌락과 절제 사이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것. 그게 어른이 되어가는, 나잇값 하는 첫걸음일 수도 있겠다고. 어쩌면 성숙한 사람이 되기엔 글러먹은 날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성숙의 길에 발을 들이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유랑선생입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다정한 교양>에 글을 올립니다. 요즘에는 ‘철드는 게, 어른이 되는 게 과연 무얼까’ 란 의문을 가끔씩 가지게 되어서, 관련 글을 올려봤어요.
되짚어 보니 이 공간에 처음 글을 올릴 때는 프로필 사진도 없었고, 제 필명에 ‘선생’이 들어가니까, 상당히 성숙한 인간형이 존재할 거라 생각하신 분들이 계셨어요. 명확한 이유를 모르겠지만 그땐 절 50~60대 이상의 남성으로 짐작하는 분들도 꽤 계셨던 것 같습니다. 저도 이 공간에 글을 쓸 때는, 그래도 나름대로 제 안의 성숙한 자아(?)를 꺼내 들고 글을 끼적거리는 편이에요.
그렇지만 철들지 않는 어린이가 제 마음속에도 (아주 많이) 살고 있습니다. 얼마 전 심심풀이 삼아 정신연령 검사를 해보니까, 24세가 나오더라고요 허허.
... 그냥 해맑고 천진난만한 면이 있다고 좋게 해석하기로 했습니다.
아무튼 철들지 않는 나, 내 안의 울퉁불퉁한 면을 인정하고 그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게 어른 아닐까란 생각을 요즘엔 하게 되네요.
그리고 제가 죄송한 말씀을 드려요. 다음 주에는 추석 연휴이고, 그다음 주에는 강연이랑 강의가 살짝 몰려 있어 가지고 2주 쉬고 9월 29일(일)에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추석 편안히 쉬시고, 행복하게 9월 보내시길 빌어요.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