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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크 Sep 15. 2022

진흙 속에서 캐어낸 진주 말고 마사지

인천 펜타포트에서 영접한 발마사지

스무 살이 되자 나는 세상에 갓 태어난 것처럼 새로 경험해보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중/고등학교 6년간 입시 준비로 집, 학교, 집, 학교 이외에는 많은 경험을 해보지 못했던 나에게 20살은 사탕박스 같았다. 손대는 것마다 다른 맛인 달콤한 경험들. ‘태어나서 처음인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연애였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 한 사람의 인생이 나에게 오는 것이라는 말처럼 연애를 하다 보면 나의 삶의 지경이 넓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 만났던 남자 친구는 음악에 대한 덕후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가 록 페스티벌이었다. 덕분에 나는 인천 펜타포드 록 페스티벌부터 다양한 록 페스티벌에 가게 된다.


펜타포트는 내 인생 첫 번째 록 페스티벌이었다. 그전까지 뷰민라(뷰티플 민트 라이프)나 그민페(그랜드 민트 페스티벌)와 같이 다양한 페스티벌을 가보았지만, ‘락앤롤’ 스피릿의 록 페스티벌은 펜타포트가 처음이었다.


그전까지 내가 가봤던 페스티벌들은 돗자리를 피고 자리에 앉아서, 소풍하듯 음악을 즐기는 곳이었다. 앉아서 싸온 도시락과 함께 와인 한잔을 우아하게 마시는 그런 경험이랄까? 하지만 펜타포트는 달랐다. 무지하게 달랐다. 사람들은 환호를 하는 게 아니라 고성을 지르고, 방방 뛰는 게 아니라 서로를 향해서 정말 돌진 (슬램 slam) 했다. 그곳에서 나는 비와 땀 그리고 열기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그 당시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은 악명이 높았다. 펜타포트가 열린다 하면, 그 날은 폭우가 내리는 날이었다. 어찌나 비가 오는 날만 예상하고 일정을 짜는 건지. 그 당시 펜타포트는 늘 비와 태풍을 몰고 왔다. 야외 공연장에서는 흙이 비와 만나 진흙이 되고, 나중에는 땅바닥이 뻘처럼 꾸덕꾸덕해졌다. 그 곳에서는 심장을 쿵쿵 울리는 비트소리와 함께 바닥이 마치 꿀렁꿀렁 지구의 자전 속도와 함께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장화를 신어도 진흙이 장화에 달라붙어 오히려 장화가 두배, 세배 더 무거워졌다. 그렇다고 샌들을 신을 수는 없었다. 흥분한 관객들의 ‘슬램’에 발이 밟히기 십상이기 때문에. 결국은 운동화 하나 가져가서 그냥 운동화의 원래 색이 무엇인지 기억이 안날 정도로 더럽혀지고, 갈색으로 물들 때까지 신경을 끈 채 노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는 2011년도에 알게 되었다.


페스티벌에서는 다양한 부스가 차려진다. 그 당시에 다양한 브랜드들이 홍보용으로 페스티벌 장소에 부스를 차렸다. 부스들에서는 공짜로 코카콜라를 나누어주기도 하고,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추첨을 통해 페스티벌 용품들을 나눠주기도 했다.


그 와중에 진흙 탕 속으로 대형 트럭 두대가 들어와서 임시 발 마사지 부스가 차려졌다. 아마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발마사지샵들이 없었던가, 아직 발마사지라는 것이 큰 유행이 되지 못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추측하기로 동남아에만 있던 발마사지 체인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오던 해였던 것 같다. 노란색 로고를 가지고 있던 그 브랜드는 한국에서 새롭게 사업을 런칭하면서 프로모션으로 펜타포트에 임시 부스를 차리고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15분짜리 발 마사지를 해줬다, 공짜로. 공.짜.로. 공짜로!


마사지 부스 앞에는 사람들이 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앞의 긴 줄을 보고 포기했겠지만, 이것은 마사지인걸! 꾸준한 인내심을 가지고 발 밑의 진흙을 질척대며 대기한 지 한 30분쯤 지났을까. 드디어 나의 차례가 왔다.


그때의 그 황홀함을 잊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흙과 하나되어서 무거워진 질펀한 운동화를 벗고 물티슈로 발을 대충 닦은 뒤, 간이 의자에 앉아 따듯한 수조 대야에 두 발을 담그던 그 순간을 말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으~어’라고 소리를 낼  뻔했다. 여름이기는 하지만 장마철에 비바람까지 부는 인천의 날씨 때문에 나는 이가 달달 떨리도록 춥게 느껴지는 순간도 많았다. 따듯한 물에 발을 담그는 것만으로도 얼었던 온몸에 피가 도는 느낌이었다. 꽁꽁 움츠려있었던 몸속의 세포들이 사-악 하면서 팽창되는 그런 느낌이 났다. 한겨울에 오랫동안 밖에 있다가 따듯한 실내에 들어가게 되면 어디서 인가 몸속에서 아지랑이가 펴 오르는 것 같은 느낌 말이다.


따듯한 물에서 짧은 시간 족욕을 한 후, 마사지사가 나의 오른쪽 발을 잡고 뒤꿈치와 그 복숭아 뼈 사이의 옴폭 파져 있는 곳을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엄지손가락과 나머지 손가락들을 이용해서 발목부터 종아리를 부지런히 나의 다리를 지압하여 올라가기 시작했다. 엄지손가락으로 정강이의 좌우를 지그시 누르는데, 닫힌 입술사이로 ‘으’ 소리가 새어 나왔다. 흙냄새 속에서도 재스민 오일 향이 은은히 코 끝으로 올라왔다.


무릎의 아래쪽을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는 그 무릎의 바로 아래쪽 약간 파여있는 엄지와 검지가 쑥 들어가는 그 부위) 마사지하는 순간 나는 다리가 풀려 주져 앉을 것만 같았다. 의자에 앉아있지 않고 서있었더라면 정말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내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마사지사는 발바닥을 검지와 중지를 구부려 지압하게 시작했다. 엄청 아프다. 엄청 아픈데,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그 느낌. 마치 목욕탕 뜨거운 열탕에 딱 들어갔을 때. 분명 온몸의 피부들은 괴롭다고 아우성치고 있는데 저 몸 속 깊은 곳에서는 시원하다고 느끼는 그 느낌과 비슷했다. 마지막으로는 마사지사가 엄지발가락부터 검지, 중지, 약지, 새끼발가락까지 모든 발가락에서 뚜둑둑 소리가 날 때까지 잡아당겼다. 뚜둑 뚜둑, 뚜둑!


분명 발마사지만 받았는데, 온몸이 한결 더 가벼워졌다. 하지만 이렇게 끝내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15분의 짧은 마사지가 끝났을 때는, 나는 나도 모르게 마사지를 해주시는 분에게 여기서 돈을 더 내고 마사지를 받을 수 있냐고 물어보고 있었다. 아쉽게도 홍보차 세워진 당시 세워진 마사지 부스는 임시 부스라 프로모션으로 마사지를 제공하지는 것 이외에 손님은 받고 있지 않았다. 나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앉은자리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일어나야만 했다.


짧은 그 시간이 끝나고 다시금 그 눅눅한 양말과 축축하다 못해 찐득거리는 더러운 신발에 발을 넣어야 할 때는 조금 머뭇거리게 되었지만, 펜타포트에서 짧았던 15분의 발마사지는 내가 마사지의 희열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첫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이 노곤하게 녹아내리는 느낌이다.


발 마사지로 회복한 기운으로 나는 몇 시간을 더 진흙밭에서 가열하게 뛰어다녔다. 사람들과 스테이지 앞에서 기차놀이도 하고, 사일런스 클럽 부스에 가서 몸도 흔들고, 내 귀의 도청장치 노래에 떼창도 하면서. 장장 12시간을 쉼 없이 흔들다가 집으로 돌아온 그날. 공항철도와 경의 중앙선을 타고 먼길을 뱅뱅 돌아 집으로 돌아왔다. (학생이었던 그때 당연히 차는 없었고, 택시를 탈 생각도 못했으며, 쫄딱 젖은 꼴로 오들오들 떨면서 2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집안에서 공인된 최악의 저질 체력인 나는 당연히 그날 밤 앓아누울 줄 알았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만 다녀와서도 이틀씩은 앓아눕던 나인데, 12시간씩 비 속에서 진흙탕을 뛰어다녔는데 멀쩡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당연히 며칠은 앓아누울 것이라고 각오하고 잠이 들었던 나는 그날 푹 꿀잠을 잤고 그다음 날 멀쩡하게 아침 일찍 일어났다. 물론 조금의 근육통은 있었지만, 앓아누울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내가 진흙탕 트럭으로 세워진 임시 발마사지 부스에서 받았던 마사지의 효능 일 거라고 믿는다.


그 이후, 나는 마사지가 주는 기쁨에 흠뻑 빠져버렸다. 그리고 마사지의 효능을 신봉하게 되었다. 등산을 다녀오거나 몸을 쓰는 일들을 하거나, 큰 행사를 끝내거나 아니면 심지어 마음이 아플 때조차 나는 마사지를 받으러 간다. 플라세보 효과일지라도, 마사지를 받고 나면 몸도 가뿐해지고, 심지어 마음조차 맑아지는 느낌이다. 사실 무슨 60분 마사지에 그간의 피로가 다 풀리고, 마음이 맑아진다는 거야, 오버하는 거 아니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사지는 나에게 단지 근육을 풀어주는 육체적인 행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우리는 쳇바퀴 도는 일상을 산다. 주중에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씻고, 아침을 먹고, 밥벌이를 한다. 밥벌이와 관련된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저녁. 집에 돌아와 간단한 요기를 하고 나면 사실 다른 무엇을 할 시간과 에너지도 남아있지 않다. 주말에는 주중에 가불 했던 피로를 갚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한때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사실 요즘도 많은 사람들에게 일과 삶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일과 삶 사이의 균형을 맞추지 못하기 때문이겠지. 나에게도 ‘워라밸’은 너무나 힘든 개념이다. 전체적인 시간의 총량을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어떻게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는지 모르겠다.


나에게 ‘일’은 나이고, 나는 ‘일’이다. 일터에서 뛰어나고 싶고, 잘하고 싶다. 그러다 보니 아침에 출근을 해서 일을 하다 보면, 내가 가진 모든 에너지와 기운을 소진하게 된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 침대로 돌진하곤 한다. 체력의 문제인가 싶어서, 운동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달라진 점은 퇴근하고 운동을 하고 나서 침대로 돌진한다는 점뿐. 퇴근하고 나서도 일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리기가 힘들다.


모든 것이 나의 선택. 특히 외국에 홀로 나와 살면서 뭐든 것이 나의 선택이자 나의 선택에 따른 책임이 된다는 것을 느낀다. 나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단단해져야 한다는 주문을 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머리는 몰라도 몸은 안다. 그러는 사이 나의 어깨는 단단히 굳어갔다. 긴장을 풀려고 해도 어떻게 긴장을 푸는지 모르는 몸이 되어갔다.


마사지는 그런 나에게 일상과 단절을 선물하는 공간과 시간이다. 마사지 가게 주인의 취향을 알 수 있는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마사지 룸을 들어가는 순간, 그 순간, 나는 일상에서와는 다른 내가 된다. 일상과 닮은 점이 없을수록 해방감은 극이 된다. 마시자 샵에 누워있는 나는 무엇을 잘해야 하는 직장인도 아니고, 누군가의 자식이자, 친구, 연인이 아닌 그냥 내가 된다.


어떠한 것도 선택할 필요 없는, 돌아누우라면 돌아눕고, 마사지사에게 나의 몸을 맡긴 채 수동적으로 ‘숨만 쉬고 있’으면 된다. 가만히 누워서 숨만 쉬는 게 유일한 의무이자 역할인 공간. 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 닮은 점이 없는 공간이라는 거 참 멋지지 않은가. 내가 마사지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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